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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1년 북경관현악단의 트럼펫 주자로 입단한다. 당시 개혁개방 이후 중국에 유행하기 시작한 서구 문물과 대중음악에 영향을 받아 그곳에서 ‘칠합판’이라는 밴드를 결성했다. 이때 그가 주로 접한 음악은 사이먼 앤 가펑클, 존 덴버 등 포크 계열의 음악이었다. 또한 당시 등려군 열풍과 대만에서 넘어 온 캠퍼스 포크송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측된다. 밴드 동료들과 외국인들이 출입하던 호텔 같은 곳에서 서양 대중음악을 연주했다고 한다. 이 무렵 서양에서 유행하던 뉴웨이브 – 폴리스, 토킹 헤즈 등의 가수들과 롤링 스톤즈와 같은 본격적인 록 음악을 접하고 방향을 전환, 칠합판 밴드를 해체하고 본격적인 록 음악으로 방향을 전환한다.
 
: 1981년 북경관현악단의 트럼펫 주자로 입단한다. 당시 개혁개방 이후 중국에 유행하기 시작한 서구 문물과 대중음악에 영향을 받아 그곳에서 ‘칠합판’이라는 밴드를 결성했다. 이때 그가 주로 접한 음악은 사이먼 앤 가펑클, 존 덴버 등 포크 계열의 음악이었다. 또한 당시 등려군 열풍과 대만에서 넘어 온 캠퍼스 포크송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측된다. 밴드 동료들과 외국인들이 출입하던 호텔 같은 곳에서 서양 대중음악을 연주했다고 한다. 이 무렵 서양에서 유행하던 뉴웨이브 – 폴리스, 토킹 헤즈 등의 가수들과 롤링 스톤즈와 같은 본격적인 록 음악을 접하고 방향을 전환, 칠합판 밴드를 해체하고 본격적인 록 음악으로 방향을 전환한다.
 
: 1986년 베이징에서 열린 ‘세계 평화의 해’ 기념 공연에서 「일무소유(一无所有)」[https://www.youtube.com/watch?v=m7uk0-vlpP0]를 연주하며 중국 대중의 환호를 받게 된다. 「일무소유(一无所有)」는 그의 음악을 대중들에게 확실히 각인시킨 음악으로써 그의 대표곡으로 자리 잡는다. 그 무렵 혁명 가곡인 「난니완(南泥湾)」을 편곡해서 중국 혁명의 실패를 비판하고 이로 인해 중국 정부의 제재를 받게 된다.
 
: 1986년 베이징에서 열린 ‘세계 평화의 해’ 기념 공연에서 「일무소유(一无所有)」[https://www.youtube.com/watch?v=m7uk0-vlpP0]를 연주하며 중국 대중의 환호를 받게 된다. 「일무소유(一无所有)」는 그의 음악을 대중들에게 확실히 각인시킨 음악으로써 그의 대표곡으로 자리 잡는다. 그 무렵 혁명 가곡인 「난니완(南泥湾)」을 편곡해서 중국 혁명의 실패를 비판하고 이로 인해 중국 정부의 제재를 받게 된다.
: 1987년 결국 북경관현악단에서 제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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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7년 결국 북경관현악단에서 제명되었으며 본격적으로 음악 활동을 시작한다. 이 무렵 헝가리인 베이시스트 카사이 발라츠(Kassai Balazs)와 마다가스카르 출신 기타리스트 에디 피오노나(Eddie Randriamam pionona)가 결성한 밴드 ADO를 만나 같이 활동한다.
 
: 1988년 처음 발표한 음반인 <일무소유(一无所有)>에서 기존의 서구식 대중음악의 형식에 중국 전통 악기를 끌어들여 중국적 록 음악을 만들어 냈다.
 
: 1988년 처음 발표한 음반인 <일무소유(一无所有)>에서 기존의 서구식 대중음악의 형식에 중국 전통 악기를 끌어들여 중국적 록 음악을 만들어 냈다.
 
: 1989년 [[1989천안문사건]] 당시 밴드와 함께 「일무소유(一无所有)」를 시위 현장에서 연주했고 이것이 폭발적인 반응을 얻어 시위가로 불렸다. 이 공연으로 당국의 주목을 받게 되었으며, ‘반체제 가수’의 이미지로 알려진다. 그 후 당국에 의해 활동이 제약을 받기도 했지만 서방세계에서도 주목을 받게 되었다.
 
: 1989년 [[1989천안문사건]] 당시 밴드와 함께 「일무소유(一无所有)」를 시위 현장에서 연주했고 이것이 폭발적인 반응을 얻어 시위가로 불렸다. 이 공연으로 당국의 주목을 받게 되었으며, ‘반체제 가수’의 이미지로 알려진다. 그 후 당국에 의해 활동이 제약을 받기도 했지만 서방세계에서도 주목을 받게 되었다.

2016년 6월 28일 (화) 22:41 판

추이젠(崔健)

출생 1961년 8월 2일
연변
주요 작품 <일무소유(一无所有)>(1988), <해결(解決)>(1991), <붉은 깃발 아래의 알(红旗下的蛋)>(1994)
관련 활동 음악, 영화


소개

중국 록(야오군)의 아버지로 불리는 사람. 중국의 브루스 스프링스틴, 중국의 밥 딜런으로 소개된다. 우리나라의 신중현과 김민기와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중국 조선족 출신으로 1961년 연변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음악을 배웠으며 원래는 트럼펫 연주자였다. 이는 트럼펫 연주자였던 아버지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1981년 북경관현악단의 트럼펫 주자로 입단한다. 당시 개혁개방 이후 중국에 유행하기 시작한 서구 문물과 대중음악에 영향을 받아 그곳에서 ‘칠합판’이라는 밴드를 결성했다. 이때 그가 주로 접한 음악은 사이먼 앤 가펑클, 존 덴버 등 포크 계열의 음악이었다. 또한 당시 등려군 열풍과 대만에서 넘어 온 캠퍼스 포크송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측된다. 밴드 동료들과 외국인들이 출입하던 호텔 같은 곳에서 서양 대중음악을 연주했다고 한다. 이 무렵 서양에서 유행하던 뉴웨이브 – 폴리스, 토킹 헤즈 등의 가수들과 롤링 스톤즈와 같은 본격적인 록 음악을 접하고 방향을 전환, 칠합판 밴드를 해체하고 본격적인 록 음악으로 방향을 전환한다.
1986년 베이징에서 열린 ‘세계 평화의 해’ 기념 공연에서 「일무소유(一无所有)」[1]를 연주하며 중국 대중의 환호를 받게 된다. 「일무소유(一无所有)」는 그의 음악을 대중들에게 확실히 각인시킨 음악으로써 그의 대표곡으로 자리 잡는다. 그 무렵 혁명 가곡인 「난니완(南泥湾)」을 편곡해서 중국 혁명의 실패를 비판하고 이로 인해 중국 정부의 제재를 받게 된다.
1987년 결국 북경관현악단에서 제명되었으며 본격적으로 음악 활동을 시작한다. 이 무렵 헝가리인 베이시스트 카사이 발라츠(Kassai Balazs)와 마다가스카르 출신 기타리스트 에디 피오노나(Eddie Randriamam pionona)가 결성한 밴드 ADO를 만나 같이 활동한다.
1988년 처음 발표한 음반인 <일무소유(一无所有)>에서 기존의 서구식 대중음악의 형식에 중국 전통 악기를 끌어들여 중국적 록 음악을 만들어 냈다.
1989년 1989천안문사건 당시 밴드와 함께 「일무소유(一无所有)」를 시위 현장에서 연주했고 이것이 폭발적인 반응을 얻어 시위가로 불렸다. 이 공연으로 당국의 주목을 받게 되었으며, ‘반체제 가수’의 이미지로 알려진다. 그 후 당국에 의해 활동이 제약을 받기도 했지만 서방세계에서도 주목을 받게 되었다.
1991년 특히 두 번째 앨범 <해결(解決)>을 발표했다. 추이젠은 이 앨범에 수록된 노래 「붉은 천조각(一块紅布)」를 부를 때 홍색 천으로 두 눈을 가리고 있었는데 이것은 이전 시대라면 마땅히 목에 둘렀어야 할 홍색 스카프를 손목에 묶고 붉은 천으론 두 눈을 가리면서 개인적 도전을 감행한 것이다. 「붉은 천조각(一块紅布)」의 라이브 공연에서도 그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붉은 천조각(一块紅布)」 라이브 공연 영상
1994년 <붉은 깃발 아래의 알(红旗下的蛋)> 앨범에서 중국 개혁의 어두운 면을 노래했다.
2015년 말부터 2016년 초에 상하이 드래건 TV의 음악 프로그램인 ‘중국의 스타(中國之星)’에 멘토로 출연하기도 했다.
2015년 발매한 앨범 <얼어버린 빛(光冻)>에서는 록 중심의 음악에서 벗어나 아프로비트와 삼바, 레게의 리듬을 섞은 여러 곡들을 수록했다.
그의 노래에는 혼돈과 방황하는 청년들의 모습, 중국 개혁의 이면을 표현하면서도 일말의 희망을 표현하고 있다. 또 당시의 시대적 고통과 아픔, 그리고 희망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1993년 지양원 감독과 함께 <<북경녀석들(北京杂种)>>[2]의 제작과 편집에 참여하고, 최근에는 영화 감독을 맡아 문화대혁명에 상처 입은 가족들을 다룬 <<남색골두(蓝色骨头)>>[3](2013)를 제작하는 등 영화계에서도 활동하고 있다.

음악 성향

추이젠은 조선족 출신이지만 그의 음악에서는 한국적이거나 조선족 특유의 감성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 오히려 더 중국적인 차원에서 중국인들의 시대적 상황과 맥락에 공감함으로써 그의 곡들이 가치를 지닌다. 또한 그의 곡들에는 중국의 전통악기들이 사용되어 서구적인 록과는 다른 중국적인 록의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일무소유(一无所有)」의 라이브 공연 영상 또한 포크적인 분산 화음을 활용하여 팝록, 포크록에 가까운 느낌을 준다.

1989천안문사건과 「일무소유(一无所有)」

1980년대 후반 북경의 신세대들에게 추이젠의 노래가 인기를 얻었던 이유는 자신들이 느낀 아무것도 가지지 못하고 무엇을 해야 할지도 모르는 혼란스러운 상황을 표현해준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그의 대표곡 「일무소유(一无所有)」에서 이런 상황에 대한 가사들이 등장한다. 노래 가사에서는 나에게는 아무것도 없다는 것, 그렇지만 어딘가로 떠날 것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가사들이 반복된다. 이것은 그 세대가 느낀 막연한 모호함을 잘 표현하는 것이다. 1980년대 덩샤오핑에 의해 개혁개방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이후, 중국에는 수많은 자본이 유입되고 다양한 문화들이 유입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것은 개혁개방 이전의 세대들이 가지고 있던 사회주의 사회에 대한 비전, 인생의 목표, 확고한 가치들을 대가로 하는 것이었다. 자본주의의 물결은 사람들의 사상에도 영향을 미쳤고, 결국 신세대들은 물질적으로 풍요로움은 누리게 되었으나 무엇을 할지는 모르게 되어버린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그것이 그들과 추이젠을 이어주는 중요한 요소가 된 것이다.
그 중에서도 1989년 천안문 광장에서 추이젠이 공연 뒤에 「일무소유(一无所有)」가 시위가로 불려진 것은 그런 상황적 맥락과 추이젠이 연결된다는 점에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추이젠의 예전 곡들은 드러나는 정치성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일무소유(一无所有)>에서도 정치적 비판이나 사회 비판의 메세지는 직접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그저 가진 것 없고 혼란한 상황, 그리고 함께 떠나자는 제안만이 가사에 존재한다. 그렇지만 그것은 그 당시의 대중들에게 절실하게 와닿는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천안문 광장의 그곳에서 시위하던 대중들은 추이젠의 노래에서 자신을 찾아내고 그것을 토로했던 것이다. 천안문 사건을 다룬 다큐멘터리에 등장한 추이젠

참고자료

김병종, 화첩기행 3 – 『타향의 예술가들에게 보내는 편지』, 문학동네, 2014
민정기, 「최건과 일무소유 그리고 1989년의 북경 : 중국 대도시의 하위문화」, 중국현대문학 24호
안영은. 「추이지앤(崔健) 록음악의 문화위치와 문화실천」. 중어중문학, 2009
김영구, 「추이지앤(崔健)의 록음악에 대한 사회사적 접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