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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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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6월 15일 베이징에서 태어났다. 당시 베이징은 北平으로 불렸기 때문에 그의 아버지인 시중쉰(習仲勛)은 그의 이름을 近平(베이징에 가깝다)으로 지었다고 전해진다. 당시 그의 가족은 두 명의 누나와 두 살 연하의 남동생 시위안핑까지 모두 여섯이었다. 당과 정부 주요 기관, 간부의 거주지 밀집 지역인 중난하이(中南海)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는데, 이는 당시 당 중앙 선전부장을 맡은 대간부인 아버지 시중쉰의 영향이 컸다. 언제까지나 유복한 환경에서 성장할 것만 같았지만, 아버지 시중쉰의 실각으로 시진핑은 9세의 어린 나이에 인생의 첫 번째 고비를 맞게 된다. 1962년 [[류즈단]] 사건으로 그의 아버지 시중쉰이 억울하게 실각을 당하게 되자, 시진핑 또한 반동분자의 자식이라는 이유로 온갖 천시를 받았다. 1969년, 결국 그는 [[상산하향]](上山下鄕)운동 정신에 입각하여 샨시성 옌촨(延川)현 량자허(梁家河) 따투이(大隊)로 7년 간의 하방(下放)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고위 간부의 자제였던 시진핑은 농촌 생활에 적응할 수 없었고, 3개월 만에 베이징으로 도망쳐왔다. 당시 '학습반'에 구금되어 하수도 공사에 투입되었는데, 시진핑은 이 시절을 회상하며 농촌이나 도시나 육체 노동의 고달픔은 다를 바 없었다고 말한다. 다시금 결의를 다지고, 샨시성으로 내려온 시진핑은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 농촌 사람들과도 격 없이 지내며 계속해서 공산당 입당 지원서를 제출했다. 당시 아버지인 시중쉰이 복권되기 전 상황이었으므로 끊임없이 입당을 거절 당했다. 하지만 1974년 1월, 10전 11기의 성과로 21세의 시진핑은 공산당원이 되었다. 그 해 11월, 량자허 따투이 당 지부 서기까지 역임하게 된다. 이는 그의 정치 인생에 걸음마와 같은 행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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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6월 15일 베이징에서 태어났다. 당시 베이징은 北平으로 불렸기 때문에 그의 아버지인 시중쉰(習仲勛)은 그의 이름을 近平(베이징에 가깝다)으로 지었다고 전해진다. 당시 그의 가족은 두 명의 누나와 두 살 연하의 남동생 시위안핑까지 모두 여섯이었다. 당과 정부 주요 기관, 간부의 거주지 밀집 지역인 중난하이(中南海)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는데, 이는 당시 당 중앙 선전부장을 맡은 대간부인 아버지 시중쉰의 영향이 컸다. 언제까지나 유복한 환경에서 성장할 것만 같았지만, 아버지 시중쉰의 실각으로 시진핑은 9세의 어린 나이에 인생의 첫 번째 고비를 맞게 된다. 1962년 [[류즈단]] 사건으로 그의 아버지 시중쉰이 억울하게 실각을 당하게 되자, 시진핑 또한 반동분자의 자식이라는 이유로 온갖 천시를 받았다. 1969년, 결국 그는 [[상산하향]](上山下鄕)운동 정신에 입각하여 샨시성 옌촨(延川)현 량자허(梁家河) 따투이(大隊)로 7년 간의 하방(下放)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고위 간부의 자제였던 시진핑은 농촌 생활에 적응할 수 없었고, 3개월 만에 베이징으로 도망쳐왔다. 당시 '학습반'에 구금되어 하수도 공사에 투입되었는데, 시진핑은 이 시절을 회상하며 농촌이나 도시나 육체 노동의 고달픔은 다를 바 없었다고 말한다. 다시금 결의를 다지고, 샨시성으로 내려온 시진핑은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 농촌 사람들과도 격 없이 지내며 계속해서 공산당 입당 지원서를 제출했다. 당시 아버지인 시중쉰이 복권되기 전 상황이었으므로 끊임없이 입당을 거절 당했다. 하지만 1974년 1월, 10전 11기의 성과로 21세의 시진핑은 공산당원이 되었다. 그 해 11월, 량자허 따투이 당 지부 서기까지 역임하게 된다. 이는 그의 정치 인생에 걸음마와 같은 행보였다. [[문화대혁명]]의 영향으로 학업에 대한 열망이 가득했던 그는 이듬해 인 1975년 10월, 칭화(淸華)대학교 화학공업학과 입학했다. 1978년, 아버지 시중쉰이 복권되고, 이듬해 4월에는 대학 졸업 후, 중앙군사위원회 판공실 비서(겅뺘오(耿飇) 국방장관 비서)를 역임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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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2월 24일 (토) 14:17 판

시진핑

출생 1953년 6월 15일
베이징 시
학력 칭화대학 대학원 법학 박사
가족 시중쉰(習仲勳), 어머니 = 치신(齐心), 부인 = 펑리위안(彭麗媛 )
관련 활동 중국(국가주석), 중국 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주석),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총서기


개요

시진핑은 중국 제7대 국가 주석으로 2013년부터 중국을 이끌기 시작했다.

생애

1953년 6월 15일 베이징에서 태어났다. 당시 베이징은 北平으로 불렸기 때문에 그의 아버지인 시중쉰(習仲勛)은 그의 이름을 近平(베이징에 가깝다)으로 지었다고 전해진다. 당시 그의 가족은 두 명의 누나와 두 살 연하의 남동생 시위안핑까지 모두 여섯이었다. 당과 정부 주요 기관, 간부의 거주지 밀집 지역인 중난하이(中南海)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는데, 이는 당시 당 중앙 선전부장을 맡은 대간부인 아버지 시중쉰의 영향이 컸다. 언제까지나 유복한 환경에서 성장할 것만 같았지만, 아버지 시중쉰의 실각으로 시진핑은 9세의 어린 나이에 인생의 첫 번째 고비를 맞게 된다. 1962년 류즈단 사건으로 그의 아버지 시중쉰이 억울하게 실각을 당하게 되자, 시진핑 또한 반동분자의 자식이라는 이유로 온갖 천시를 받았다. 1969년, 결국 그는 상산하향(上山下鄕)운동 정신에 입각하여 샨시성 옌촨(延川)현 량자허(梁家河) 따투이(大隊)로 7년 간의 하방(下放)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고위 간부의 자제였던 시진핑은 농촌 생활에 적응할 수 없었고, 3개월 만에 베이징으로 도망쳐왔다. 당시 '학습반'에 구금되어 하수도 공사에 투입되었는데, 시진핑은 이 시절을 회상하며 농촌이나 도시나 육체 노동의 고달픔은 다를 바 없었다고 말한다. 다시금 결의를 다지고, 샨시성으로 내려온 시진핑은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 농촌 사람들과도 격 없이 지내며 계속해서 공산당 입당 지원서를 제출했다. 당시 아버지인 시중쉰이 복권되기 전 상황이었으므로 끊임없이 입당을 거절 당했다. 하지만 1974년 1월, 10전 11기의 성과로 21세의 시진핑은 공산당원이 되었다. 그 해 11월, 량자허 따투이 당 지부 서기까지 역임하게 된다. 이는 그의 정치 인생에 걸음마와 같은 행보였다. 문화대혁명의 영향으로 학업에 대한 열망이 가득했던 그는 이듬해 인 1975년 10월, 칭화(淸華)대학교 화학공업학과 입학했다. 1978년, 아버지 시중쉰이 복권되고, 이듬해 4월에는 대학 졸업 후, 중앙군사위원회 판공실 비서(겅뺘오(耿飇) 국방장관 비서)를 역임하게 된다.

업적

평가


정책방향




한국과의 상황

참고자료

1. 「시진핑」, 소마 마사루, 2011

외부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