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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루쉰이 1924년 12월 29일에 "수다쟁이"잡지에 일곱 번째로 발표한 작품이다. | + | 루쉰이 1924년 12월 29일에 "수다쟁이"잡지에 일곱 번째로 발표한 작품이다. 루쉰은 한 존재의 방황과 고뇌를 분노하며 저항하는 전사의 모습으로도 새로운 시대를 위한 강렬한 자기 희생의 염원으로도 나타냈다. '복수2'에서는 예수의 죽음을 모티브로 해서 한 시대의 지식인으로서 책임의식과 희생정신을 드러낸다. 루쉰은 유대인들은 예수를 못 박은 어리석고 저주받은 사람들로 묘사한다. 이들은 중국의 백성들을 상징한다. 또한 예수에 루쉰 자신을 투영해 그는 예수를 못박은 유대인들의 앞날을 안타까워하고 그들의 현재를 증오한다. ''사람의 아들을 못 박은 사람들의 몸은 신의 아들을 못 박은 자보다도 더 피비린내가 났고 더럽혀져 있었다."라는 구절이 있다. 이는 루쉰이 민중에 대한 회의를 느끼면서도 현존하는 인간을 비판한 것을 보여준다 . 이것을 통해 현재의 인간을 부정해 새로운 인간을 확립하는 루쉰의 정신혁명 사고 방식을 알 수 있다. 예수의 죽음은 루쉰이 중국에 대해 내린 결단과 맥락을 같이한다. 예수가 기꺼이 진 십자가는 루쉰이 지고 간 시대적 사명을 상징한다. 예수는 십자가를 지고 사람들이 죄악과 고통에서 벗어나도록 하려 했다. 이것과 마찬가지로 루쉰은 한 시대의 지식인으로서 해야하는 의무와 사명을 다하려는 신념을 나타냈다고 볼 수 있다. |
2016년 12월 26일 (월) 18:44 판
원문
因为他自以为神之子,以色列的王,所以去钉十字架。
兵丁们给他穿上紫袍,戴上荆冠,庆贺他;又拿一根苇子打他的头,吐他,屈膝拜他;戏弄完了,就给他脱了紫袍,仍穿他自己的衣服。看哪,他们打他的头,吐他,拜他……他不肯喝那用没药 调和的酒,要分明地玩味以色列人怎样对付他们的神之子,而且较永久地悲悯他们的前途,然而仇恨他们的现在。
四面都是敌意,可悲悯的,可咒诅的。
丁丁地响,钉尖从掌心穿透,他们要钉杀他们的神之子了,可悯的人们呵,使他痛得柔和。丁丁地响,钉尖从脚背穿透,钉碎了一块骨,痛楚也透到心髓中,然而他们自己钉杀着他们的神之子了,可咒诅的人们呵,这使他痛得舒服。十字架竖起来了;他悬在虚空中。
他没有喝那用没药调和的酒,要分明地玩味以色列人怎样对付他们的神之子,而且较永久地悲悯他们的前途,然而仇恨他们的现在。
路人都辱骂他,祭司长和文士也戏弄他,和他同钉的两个强盗也讥诮他。看哪,和他同钉的……四面都是敌意,可悲悯的,可咒诅的。
他在手足的痛楚中,玩味着可悯的人们的钉杀神之子的悲哀和可咒诅的人们要钉杀神之子,而神之子就要被钉杀了的欢喜。突然间,碎骨的大痛楚透到心髓了,他即沉酣于大欢喜和大悲悯中。
他腹部波动了,悲悯和咒诅的痛楚的波。
遍地都黑暗了。
“以罗伊,以罗伊,拉马撒巴各大尼?!”(翻出来,就是:我的上帝,你为甚么离弃我?!上帝离弃了他,他终于还是一个“人之子”;然而以色列人连“人之子”都钉杀了。
钉杀了“人之子”的人们的身上,比钉杀了“神之子”的尤其血污,血腥。
一九二四年十二月二十日
해제
야초로 돌아가기
루쉰이 1924년 12월 29일에 "수다쟁이"잡지에 일곱 번째로 발표한 작품이다. 루쉰은 한 존재의 방황과 고뇌를 분노하며 저항하는 전사의 모습으로도 새로운 시대를 위한 강렬한 자기 희생의 염원으로도 나타냈다. '복수2'에서는 예수의 죽음을 모티브로 해서 한 시대의 지식인으로서 책임의식과 희생정신을 드러낸다. 루쉰은 유대인들은 예수를 못 박은 어리석고 저주받은 사람들로 묘사한다. 이들은 중국의 백성들을 상징한다. 또한 예수에 루쉰 자신을 투영해 그는 예수를 못박은 유대인들의 앞날을 안타까워하고 그들의 현재를 증오한다. 사람의 아들을 못 박은 사람들의 몸은 신의 아들을 못 박은 자보다도 더 피비린내가 났고 더럽혀져 있었다."라는 구절이 있다. 이는 루쉰이 민중에 대한 회의를 느끼면서도 현존하는 인간을 비판한 것을 보여준다 . 이것을 통해 현재의 인간을 부정해 새로운 인간을 확립하는 루쉰의 정신혁명 사고 방식을 알 수 있다. 예수의 죽음은 루쉰이 중국에 대해 내린 결단과 맥락을 같이한다. 예수가 기꺼이 진 십자가는 루쉰이 지고 간 시대적 사명을 상징한다. 예수는 십자가를 지고 사람들이 죄악과 고통에서 벗어나도록 하려 했다. 이것과 마찬가지로 루쉰은 한 시대의 지식인으로서 해야하는 의무와 사명을 다하려는 신념을 나타냈다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