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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1월 29일 (일) 23:49 기준 최신판
명효릉 明孝陵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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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 유적지 |
소재지 | 남경 |
-상위 문서:2015년 답사
명효릉
명효릉이란?[1]
- 명나라의 첫 황릉(皇陵)이며, 효릉(孝陵)이라는 명칭은 마황후(馬皇后)의 시호인 효자(孝慈)에서 따온 것이다. 원래 있던 카이산사[開善寺]를 이전하고 1381년 착공하였으며, 이듬해 마황후가 죽자 공사중인 황릉에 먼저 매장하였다. 1383년 대전(大殿)이 완공되었고, 1405년 태조가 병사한 뒤 매장되었다. 30년의 공사기간을 거쳐 영락제(永樂帝) 때인 1405년에 완공되었으며, 태조 이후의 명나라 황제들은 모두 이 능을 모방하여 황릉을 건설하였다. 효릉의 동쪽에는 주원장의 적장자(嫡長子)인 주표(朱標)가 묻힌 동릉(東陵)이 있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주원장이 죽은 뒤 난징의 13개 성문을 모두 열고 관을 운구하여 성 밖으로 나가 매장하였다고 한다. 이로 인하여 주원장의 진짜 능묘는 난징 서쪽의 조천궁(朝天宮) 삼청전(三淸殿) 지하에 있다는 설도 있고, 황성(皇城)의 만세전(萬歲殿) 지하 또는 베이징[北京]의 만세산(萬歲山)이라는 설도 있다. 이는 주원장이 사후 도굴을 피하기 위하여 생전에 가짜 무덤을 여러 개 만든 데서 비롯된 것이다.
명효릉의 지상 건축물들은 이미 훼손되었지만, 지하의 유적은 아직도 온전히 보존되어 있다. 고대의 문헌에 기록된 바에 따르면, 효릉의 담벽 길이는 22.5㎞였는데, 이는 당시 난징 성벽 길이의 3분의 2에 이르는 방대한 규모이다. 또 효릉의 구도는 베이징의 심삼릉(十三陵)과 기본적으로 일치하는데, 이는 십삼릉이 효릉의 구도를 모방하여 축조하였다는 것을 뒷받침한다.
명효릉 내부에 대해서
왕릉에는 문무방문(文武方門), 비전(碑殿), 향전(享殿), 내홍문(內紅門), 승선교(升仙橋), 명루(明樓), 보정(宝頂)이 일직선으로 배치되어 있고 그 좌우로 동서정정(東西井亭), 어주(御廚), 구복전(具服殿), 동서비전(東西妃殿)등 주요 건축물이 있다. 청나라 강희제 때 만들어진 비전(碑殿)에는 1699년에 어필로 쓴 ‘치융당송(治隆唐宋)’이라는 네 글자가 또렷하게 보인다. 명태조의 치적이 당송시대만큼 융성하였다는 뜻이다. 이곳을 지나면 또 하나의 전각이 있는데 향전(享殿)이다. 효릉전이라고도 한다. 이곳에는 주원장과 그의 부인 마황후와 소실들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향전은 청나라 때 전란으로 소실되어 동치 연간(1862~1874)에 다시 보수한 것이다. 지금도 주춧돌 56개는 그대로 남아 있다고 한다. 향전 앞에는 명대의 무늬가 새겨진 돌난간과 용과 봉황이 새겨진 석주가 상당히 많이 훼손된 채 불구의 형상으로 남아 있다. 명루는 명효릉의 가장 끝에 있다. 네모난 성벽 위에 있는 건축물이 명루라고 하는데 전쟁으로 훼손되어 지금은 황색 벽면만 남아 있다. 휑한 느낌이다. 명루를 둘러싼 성벽은 벽돌로 정교하고 단단하게 쌓아 올렸는데, 흥미롭게도 벽돌마다 제작자의 이름과 만든 곳이 새겨져 있다. 성벽을 쌓으면서 불량 벽돌이 나올 경우, 벽돌에 새긴 이름을 보고 그 사람을 잡아서 처단하였다고 하니 진시황의 병마용을 연상하게 하였다. 포악하고 잔인했던 역대의 군주에게서 볼 수 있는 공통점인가보다. 일찍이 조선시대의 성호 이익(李瀷))은 “주원장의 사납고 각박한 성질은 진시황과 같았다”라고 하였으니 맞는 말인 것 같다. 성벽에 ‘차산명태조지묘(此山明太祖之墓)’라고 쓰여져 있다. 그러니까 명루 뒷편의 완주봉(玩珠峰)에 주원장과 그의 부인 마황후가 묻혀 있다는 것이다. 신도는 능의 입구에 해당된다. 영성문(櫺星門)을 지나니 위엄 있게 생긴 문관과 무관의 석인(石人)이 양쪽 길에 우뚝 서서 사람들을 반겼다. 이 신도석인은 바로 능을 지키는 파수꾼 역할을 한다. 문무석인이 호위하는 양쪽 길에는 원백(圓柏)이라는 나무가 줄을 맞춘 듯 나란히 서 있다. 또 다른 신도가 있다. 이번에는 사자, 낙타, 코끼리, 기린, 말, 해태 등의 6종류의 석수(石獸)가 호위하는 길이다. 커다란 돌을 깎아 만든 것인데 대단히 정교해 보인다. 능 앞에 낙타를 세워 놓은 것은 명효릉이 처음이며, 서역 지방의 안녕을 기원하는 뜻에서라고 한다.
주원장&마황후 관련 일화
천하를 평정하고 명나라를 세운 주원장에게는 전족을 하지 않아 발이 커서 처음엔 마대족이라고 부르다 황후가 되어 대족황후란 별명이 붙은 마황후가 있었습니다. 어릴 때 부모를 여의는 바람에 곽자흥의 양녀로 들어갔다가 주원장과 결혼하게 된 마황후는 매우 영리해서 스스로 글을 배워 남편의 개인비서 역할을 하기도 했습니다. 이윽고 주원장은 명나라의 황제가 되었지만 화를 잘내고 성질이 급하고 남의 꼬임에 잘 넘어갔습니다. 그러다보니 억울하게 모함을 당하는 사람들이 생기곤 했는데 그때마다 마황후는 냉정하게 처리하도록 도왔습니다. 건국 초기에 사람을 잃고 민심을 잃을 고비를 황후의 지혜덕분에 넘기곤 한 셈이지요. 억울한 사람이 생기게 하지 않도록 마황후는 주원장이 화가 나서 신하를 벌하려 하면 자신이 먼저 그 사람을 궁정사에게 보내어 죄를 다스리라고 화를 냈습니다. 궁정사는 궁중의 죄인을 관리하는 기구입니다. 주원장이 이를 의아해하자 말했습니다. “제왕이라면 자기의 희로애락으로 다른 사람을 상주거나 벌을 주지 말아야 합니다. 당신께서 화를 내실 때엔 편차가 생기기 쉬우므로 타당하게 처벌할 수 없지만 궁정사에게 보내면 정황에 비추어 공평하게 처리할 수 있습니다.” 덕분에 주원장은 어리석은 일을 피할 수 있었고, 죄인은 합당한 처벌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지혜로운 마황후였지만 그만 중병에 걸리고 맙니다. 궁궐 안팎의 근심이 가득했지만 이상하게 마황후는 약을 먹지 않았습니다. 누구보다 안타까운 주원장이 초조해하며 그 원인을 묻자 마황후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약 제가 약을 먹어도 살아나지 못한다면 폐하께서는 그 의사를 죽을죄로 다스릴 것입니다.” 주원장의 성격을 잘 알고 있는 마황후는 의사가 억울한 죽음을 당할까 그것이 두려웠습니다. 자신은 치료받지 못하고, 남편은 성질을 이기지 못해 과한 벌을 줄 것이고, 의사는 불가항력에 가까운 치료를 해야 했다는 이유로 죽음을 당할 것이라고 여긴 것입니다. 결국 모든 치료를 거부한 황후의 병세는 급격히 나빠졌고, 5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다녀온 감상
명효릉에 처음 들어섰을때 그 규모에 아주 놀랐다. 명효릉이 그냥 무덤 몇 개 덩그라니 있는 것이 아니라 거대한 공원처럼 이쁘게 되어있었다. 명효릉의 배경 또한 매우 이뻤다. 처음 들어갔을때는 비가 그치고 선선한 날씨여서 아주 좋았다. 우리는 일자로 된 길을 따라 걸었는데 길이 정말 이뻤고 그 풍경을 찍는 사람이 매우 많은 것에 한번 더 놀랐다. 아주 좋고 비싸보이는 카메라로 수십명의 사람이 사진을 찍고 있었다. 그 풍경이 워낙 이쁘긴 하였다. 가이드분께서 많은 이야기들을 해주셨지만 몇 일 동안 알아듣지 못하고 답답한 상황이 역시나 반복되었다. 나와 동기들은 사진찍기에 열중하였다..ㅎ 우리는 그 길을 다시 되돌아 반대편으로 갔다. 그 가는 길에 옥수수랑 어묵도 먹었다. 우리는 그렇게 길을 따라 걸어 거대한 성벽에 도달했다. 그 성벽 안으로 들어가서 다시 가이드분의 설명을 듣고 위로 올라가 또 다른 거대한 풍경을 보고 사진찍기에 몰두했다..ㅎ 거기서 시간을 조금 보낸 후 우리는 중산릉으로 향하였다. 명효릉에서 가장 인상깊었던 것은 그 규모와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그냥 무덤 몇 개 있는 무덤이 아니라 웅장하게 해놓고 그 또한 아름답게 해놓은 것이 인상적이었다. 이번 답사가 대학에 들어와서 첫 답사였고 중국에 중국어문화학과 소속으로 처음 간 것이었다. 아직 중국어가 한참 기초단계라 가이드분의 설명도 듣지못하고 학술적인 내용을 많이 얻지 못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답사가 중국어에 대한 나의 의지를 더욱 더 강력하게 만들었다. 있으면 있을수록 너무나 중국어를 잘해내고 싶었다. 수도 없이 든 생각이 다음에는 중국에서 원활하게 소통하고 지내보고 싶다는 것이다. 이번 답사는 정말 뜻깊고 새로운 경험이었다.
주석
- ↑ [네이버 지식백과] 난징 명효릉 [南京 明孝陵(남경명효릉)] (두산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