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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년(B.C 514), 오왕이 태자 부차(夫差)에게 초를 공격하여 번(番)을 취하였다. 초가 두려워 영을 버리고 약(鄀)으로 도읍을 옮겼다. | *11년(B.C 514), 오왕이 태자 부차(夫差)에게 초를 공격하여 번(番)을 취하였다. 초가 두려워 영을 버리고 약(鄀)으로 도읍을 옮겼다. | ||
*19년(B.C 496), 오가 월을 공격하자 월왕 [[구천]](句踐)은 취리(檇李)에서 이를 맞이하여 싸웠다. 월은 결사대로 도전하여 오의 군대 앞에 세 줄로 서서는 고함을 지르며 스스로 목을 그었다. 오의 병사들이 이를 구경하는 사이 월이 오를 공격하여 패배시키고 오왕 합려의 발가락에 상처를 입히니 군대는 7리를 후퇴했다. 오왕은 부상이 도져 죽었다. 합려는 태자 부차에게 뒤를 잇게 하면서 “너는 네 아비를 죽인 구천을 잊을 수 있느냐?”라고 물었다. 부차가 “어찌 감히!”라고 대답했다. 3년 뒤 월에 보복했다. | *19년(B.C 496), 오가 월을 공격하자 월왕 [[구천]](句踐)은 취리(檇李)에서 이를 맞이하여 싸웠다. 월은 결사대로 도전하여 오의 군대 앞에 세 줄로 서서는 고함을 지르며 스스로 목을 그었다. 오의 병사들이 이를 구경하는 사이 월이 오를 공격하여 패배시키고 오왕 합려의 발가락에 상처를 입히니 군대는 7리를 후퇴했다. 오왕은 부상이 도져 죽었다. 합려는 태자 부차에게 뒤를 잇게 하면서 “너는 네 아비를 죽인 구천을 잊을 수 있느냐?”라고 물었다. 부차가 “어찌 감히!”라고 대답했다. 3년 뒤 월에 보복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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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장검(魚腸劍)이 춘추를 찌르다=== | ===어장검(魚腸劍)이 춘추를 찌르다=== | ||
합려는 장자 상속이 이루어진다면 마땅히 자신이 오나라의 왕위에 올라야함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아닌 사촌 동생 요에게 왕의 자리가 돌아가자 이에 대해 반감을 품고 있었다. 초 평왕이 죽자 요왕은 성급하게 군대를 움직여 초나라로 진격하였고, 초나라에 포위됨과 동시에 오나라 도성은 비게 되었다. 합려는 전설제와 공모하여 거사 일을 잡고, 요왕을 대접한다는 명분으로 초대하여 쿠데타를 일으키게 된다. | 합려는 장자 상속이 이루어진다면 마땅히 자신이 오나라의 왕위에 올라야함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아닌 사촌 동생 요에게 왕의 자리가 돌아가자 이에 대해 반감을 품고 있었다. 초 평왕이 죽자 요왕은 성급하게 군대를 움직여 초나라로 진격하였고, 초나라에 포위됨과 동시에 오나라 도성은 비게 되었다. 합려는 전설제와 공모하여 거사 일을 잡고, 요왕을 대접한다는 명분으로 초대하여 쿠데타를 일으키게 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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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려는 결국 손무를 장군으로 삼았다. | 합려는 결국 손무를 장군으로 삼았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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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자서]](伍子胥)=== | ===[[오자서]](伍子胥)=== | ||
자서는 자이고, 이름은 원(員)이다. 초나라 태자 건의 스승이었던 오사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간신 [[비무극]](費無極)의 무고로 아버지와 형이 살해되자 복수를 기약하며 오나라로 도주해 오왕 합려를 보좌하여 오나라를 강국으로 키웠다. 이후 합려의 아들 부차가 월나라를 공격하여 대승을 거두었을 때 오자서는 월나라와의 강화를 강하게 반대했다. 하지만 부차는 오자서의 말을 듣지 않았고, 결국 정치적 동지이자 라이벌 백비의 모함에 걸려 자결로 생을 마감한다. [[사마천]]은 『[[사기]]』-오자서 열전에서 소의를 버리고 큰 치욕을 갚아 명성이 후세에 전해졌으며, 모든 고초를 참으며 공명을 이룬 강인한 대장부라고 평가했다. | 자서는 자이고, 이름은 원(員)이다. 초나라 태자 건의 스승이었던 오사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간신 [[비무극]](費無極)의 무고로 아버지와 형이 살해되자 복수를 기약하며 오나라로 도주해 오왕 합려를 보좌하여 오나라를 강국으로 키웠다. 이후 합려의 아들 부차가 월나라를 공격하여 대승을 거두었을 때 오자서는 월나라와의 강화를 강하게 반대했다. 하지만 부차는 오자서의 말을 듣지 않았고, 결국 정치적 동지이자 라이벌 백비의 모함에 걸려 자결로 생을 마감한다. [[사마천]]은 『[[사기]]』-오자서 열전에서 소의를 버리고 큰 치욕을 갚아 명성이 후세에 전해졌으며, 모든 고초를 참으며 공명을 이룬 강인한 대장부라고 평가했다. |
2018년 6월 15일 (금) 15:46 판
합려(闔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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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 |
사망 |
B.C 496년 |
생존시기 | 춘추전국시대 |
목차
개요
춘추 시대 오나라의 국군(國君). 이름은 광(光)으로, 왕이 되기 전에는 공자 광으로 불렸다. 오나라 수몽(壽夢, 미상 ~ B.C 561 추정)의 장자인 제번(諸樊)의 아들로 태어나 왕위 계승에 불만을 품고 오나라 왕 요를 찔러 죽인 후 오나라 왕으로 등극한다. 초나라에 대한 복수심에 불타는 오자서 등의 도움을 받아 오나라를 강국으로 성장시키나 월나라 왕 구천에게 패한다. 아들 부차에게 "너는 구천이 네 아비를 죽인 것을 잊을 수 있겠느냐?"라는 유언을 남겨 복수를 맹세하게 했다.
생애
- 원년(B.C 514) 오자서를 행인으로, 백비를 대부로 삼다.
- 3년(B.C 512) 오왕 합려와 오자서 그리고 백비가 군사를 거느리고 초를 공격하여 서를 빼앗고 오에서 도망간 두 공자를 죽였다. 공자 광이 영(郢)으로 쳐들어가려 했으나 장군 손무(孫武)가 “인민들이 지쳐서 안 되니 기다립시오.”라고 했다.
- 4년(B.C 511), 초를 공격하여 육과 첨을 취하였다.
- 5년(B.C 510), 월을 공격하여 물리쳤다.
- 6년(B.C 519), 초가 자상(子常) 낭와(囊瓦)에게 오를 공격하게 하자 이에 맞싸워 예장(豫章)에서 초의 군대를 크게 물리치는 한편 초의 거소를 취하여 돌아왔다.
- 9년(B.C 516), 오왕 합려가 오자서와 손무를 청하여 “처음 그대들은 영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였는데 지금은 어떻소?”라고 물었다. 두 사람은 “초의 장군 자상은 욕심이 많아 당과 채에서 원망이 많습니다. 왕께서 굳이 크게 정벌하고 싶으시다면 당과 채의 도움을 얻어야만 할 것입니다.”라고 답했다. 합려는 이에 따라 군대를 크게 일으켜 당, 채와 함께 서쪽으로 초를 정벌하러 나서 한수(漢水)에 이르렀다. 초 역시 병사를 보내 오를 막아 한수를 끼고 진을 쳤다. 왕 합려의 동생 부개(夫槪)가 전투에 나서려 했으나 합려가 허락하지 않았다. 부개는 “왕께서 이미 신에게 군의 통솔을 맡겼고 전세도 유리한 상황인데 뭘 더 기다린단 말입니까?”라 하고는 자신의 부대 5천으로 초를 기습해 초의 군대를 대파하여 달아나게 만들었다. 이에 오왕도 병사를 풀어 뒤를 쫓아왔다. 북으로 영에 이르기까지 다섯 번을 싸워 초가 다섯 번 모두 패했다. 초 소왕(昭王)은 영에서 빠져나와 운(鄖)으로 도망쳤다. (운의 현령인) 운공(鄖公)의 동생이 소왕을 죽이려 하자 소왕은 운공과 수(隨)로 도망쳤다. 오 군대가 마침내 영에 진입했고, 오자서와 백비는 초 평왕의 시체에 채찍질을 가함으로써 부모의 원한을 갚았다.
- 10년 봄(B.C 515), 월은 오왕이 영에 있어 나라가 비었다는 것을 알고는 오로 쳐들어왔다. 오가 다른 군대에게 월을 치게 했다. 초는 진(秦)에 위급함을 알리자 진은 군대를 보내 초를 구하고 오를 공격하니 오의 군대가 패했다. 진과 월이 잇따라 오를 공격하고 오왕은 초에서 물러날 수 없는 상황을 합려의 동생 부개가 보고는 오로 도망쳐 돌아가서는 자기가 오왕이 되었다. 합려가 이를 알고는 바로 병사를 이끌고 돌아가 부개를 공격하니 부개는 패하여 초로 달아났다. 초 소왕은 이 틈에 9월 다시 영으로 돌아왔다.
- 11년(B.C 514), 오왕이 태자 부차(夫差)에게 초를 공격하여 번(番)을 취하였다. 초가 두려워 영을 버리고 약(鄀)으로 도읍을 옮겼다.
- 19년(B.C 496), 오가 월을 공격하자 월왕 구천(句踐)은 취리(檇李)에서 이를 맞이하여 싸웠다. 월은 결사대로 도전하여 오의 군대 앞에 세 줄로 서서는 고함을 지르며 스스로 목을 그었다. 오의 병사들이 이를 구경하는 사이 월이 오를 공격하여 패배시키고 오왕 합려의 발가락에 상처를 입히니 군대는 7리를 후퇴했다. 오왕은 부상이 도져 죽었다. 합려는 태자 부차에게 뒤를 잇게 하면서 “너는 네 아비를 죽인 구천을 잊을 수 있느냐?”라고 물었다. 부차가 “어찌 감히!”라고 대답했다. 3년 뒤 월에 보복했다.
관련 일화
어장검(魚腸劍)이 춘추를 찌르다
합려는 장자 상속이 이루어진다면 마땅히 자신이 오나라의 왕위에 올라야함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아닌 사촌 동생 요에게 왕의 자리가 돌아가자 이에 대해 반감을 품고 있었다. 초 평왕이 죽자 요왕은 성급하게 군대를 움직여 초나라로 진격하였고, 초나라에 포위됨과 동시에 오나라 도성은 비게 되었다. 합려는 전설제와 공모하여 거사 일을 잡고, 요왕을 대접한다는 명분으로 초대하여 쿠데타를 일으키게 된다.
"북쪽 나라에는 이런 말이 있네. '찾지 않으면 어찌 얻을 수 있으랴.' 나는 왕이 될 적자이니, 이제 그 자리를 찾고자 하네." (…) 때맞춰 왕(요)이 좋아하는 요리를 올릴 차례가 되었다. 호위병들은 요리사의 옷을 벗기고 갈아입혔다. 요리사는 순순히 따랐다. 그는 무릎 걸음으로 커다란 쟁반에 구운 물고기를 얹어서 왕의 앞으로 다가갔다. 드디어 왕에게 고기를 올릴 순간이 왔다. 왕이 사정거리에 들어왔다. 침착하게 물고기 뱃속에 숨겨놓은 칼을 잡은 전설제. 칼을 뽑자마자 그대로 일어서며 왕의 가슴을 찔렀다. 칼은 왕의 가슴을 깊숙이 파고들었다. 그와 거의 동시에 호위병들의 칼이 전설제의 양쪽 가슴을 관통했다. (…) 광은 이렇게 왕이 되었다.
적국의 인재들을 거두다
오나라는 점차 국력이 강해지기 시작했고, 팽창하는 나라에 걸맞은 위인들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합려는 대범한 인물이었다. 그는 인재들의 출신을 가리지 않았다. 그는 거리낌 없이 적국의 인재를 최고위에 올리고 가까이서 부렸다. 그 중 오자서, 백비, 손무는 합려 내각의 삼걸이라고 칭해진다.
1.오자서에게 정사를 맡기다
합려는 오자서(伍子胥)에게 정사를 맡겼다. 초나라 사람으로서 오자서는 아버지와 형을 잃고 초나라에서 도망한 포로에 불과하다며 겸양 했으나, 합려가 재차 간곡히 청하자 이를 받아들이게 된다. 오나라 내에서는 훌륭한 행인으로, 밖으로는 수많은 객경들에게 최고의 모델이 된다.
"과인은 나라를 강하게 하고 패왕이 되고 싶소이다. 어떻게 하면 가능하겠소?" (…) "신은 '나라를 다스리는 길은 군주의 권위를 안정시키고 백성들을 다스리는 것(安君理民)이 상책'이라 들었습니다." 합려는 귀를 세웠다. "군주의 권위를 안정시키고 백성을 다스리려면 과인이 어떻게 해야 하오?" 오자서는 말을 꾸미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처음부터 힘과 질서를 기반으로 한 패도를 말했다. "무릇 안군치민(安君治民)하여 패왕이 되어 가까이 있는 이들을 따르게 하고 멀리 있는 이들을 통제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먼저 성곽을 세우고, 수비 시설을 갖추고, 창고를 채우고, 무기고를 정비해야 합니다." 합려는 기뻤다. (…) "과인이 그대에게 이 일을 맡길 테니 대책을 마련해주시오."
2.백비와 국사를 논하다
합려는 또 한 명의 초나라 사람을 등용하게 되는데 그가 바로 백비(伯嚭)이다. 백비는 다양한 서적에서 부정적인 성격이 강조되나, 능력만큼은 오자서 못지 않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초나라에 난리가 일어나자 백비는 자신의 일족과 함께 오나라로 도망했고, 고립무원의 처지였던 오자서와는 다르게 기반을 가지고 있었다. 등용 이 후 월나라의 뇌물을 받아 오-월 전쟁에서 오나라를 패배로 이끌지만, 이러한 사실이 그가 외국에서 들어오는 선물을 관장하는 태재의 직위에 있었고 이 때문에 의심을 산 것인지, 아니면 실제로 자신의 이익을 챙긴 것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합려는 오자서에게서 백비의 이야기를 듣고 그를 만났다. "과인의 나라는 멀리 궁벽한 곳에 쳐져 있어 동쪽으로는 바다와 접한 곳이오. 그대의 선인께서 초나라 왕의 노여움을 입고 비무극의 참소를 받았기에, 그대가 이 나라가 멀다 하지 않고 왔다고 들었소. 장차 어떻게 과인을 가르치려 하시오?" (…) 합려는 백비의 일을 불쌍하게 여겨 그를 대부로 삼고 함께 국사를 의논했다. 합려로서는 백비의 가문과 그의 투지 등 어느 것 하나 버릴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백비는 단순한 참모가 아니라 일약 태재의 직을 맡게 되는데, (…) 백비에게는 합려가 바라는 무엇이 있었으니, 그는 바로 국가의 제도에 통달한 인물이었던 것이다. (…) 태재는 왕이 국도를 건설할 때, (종묘와 사직, 성곽을 세울 때) 방위를 판별하고, 국도와 교외의 경계를 확정하며, 관직을 설치하고 직분을 배분하는 일을 한다.
3.손무에게 군사를 맡기다
오자서의 식견과 백비의 지식만으로는 패자가 될 수 없었다. 이제 사지를 움직이는 핵심, 군대를 맡길 인재를 등용할 때였다. 그 때 등장한 것이 바로 제나라의 손무(孫武)이다.
손무는 병법으로 이름이 알려져 오나라 왕 합려를 알현하게 되었다. "그대의 병법 13편은 내가 모두 보았소. 병사들을 부리는 것을 한 번 보여줄 수 있겠소?" "좋습니다." "여자들도 괜찮소?" "물론입니다." 손무의 장담에 합려는 궁중의 미녀 180명을 내주었다. 그러자 손무는 궁녀들을 두 부대로 나누고는, 왕이 아끼는 첩 두 명으로 하여금 대장이 되게 하고 창을 쥐어준 다음 명령을 내렸다. (…) 군령을 모르는 여자들이 그만 이 장난 같은 놀이에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 손무는 명령을 따르지 않은 애첩 두 명의 목을 베려 했다. 합려가 황급히 말렸으나 손무는 냉정했다. "신은 이미 명을 받아 장수가 되었습니다. 장수가 군중에 있을 때는 비록 군주의 명이라도 받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손무는 기어이 합려의 애첩 둘의 목을 베어 (…) 겁에 질린 여자들은 북이 울리면 전후좌우로 정연하게 움직였다. (…) 합려는 결국 손무를 장군으로 삼았다.
관련 인물
오자서(伍子胥)
자서는 자이고, 이름은 원(員)이다. 초나라 태자 건의 스승이었던 오사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간신 비무극(費無極)의 무고로 아버지와 형이 살해되자 복수를 기약하며 오나라로 도주해 오왕 합려를 보좌하여 오나라를 강국으로 키웠다. 이후 합려의 아들 부차가 월나라를 공격하여 대승을 거두었을 때 오자서는 월나라와의 강화를 강하게 반대했다. 하지만 부차는 오자서의 말을 듣지 않았고, 결국 정치적 동지이자 라이벌 백비의 모함에 걸려 자결로 생을 마감한다. 사마천은 『사기』-오자서 열전에서 소의를 버리고 큰 치욕을 갚아 명성이 후세에 전해졌으며, 모든 고초를 참으며 공명을 이룬 강인한 대장부라고 평가했다.
백비(伯嚭)
오나라 대신. 원래 초나라 대부였으나, 비무극이 초나라 영윤 낭와(囊瓦)와 결탁하여 동성인 극완을 공격해 자살케 하자 씨족을 거느리고 오나라로 망명하였다. 그 후 자신을 천거한 오자서와 함께 합려의 총애를 받으며 오나라의 정치를 담당했다. 백비는 오왕 부차가 월왕 구천을 죽이지 않도록 설득해 오자서와 대립했고, 결국에는 월왕 구천의 책사인 범려의 꾀에 넘어가 오왕 부차를 오도(誤導)하게 되었다. 곧 월나라를 대파(大破)한 공에 자아도취되어 부차를 안일과 환락에 빠지도록 만들었으며 그를 계속 저지하고 직간(直諫)하는 오자서를 참소하여 자결하게 만들었다. 이 후 스스로도 월왕 구천에게 처형당하게 되었다. 그는 국가의 안위를 돌보지 않고 개인의 이익을 탐하여 적국과 내통하고 결국 오나라를 쇠망으로 이끌었다고 평가받는다.
손무(孫武)
원래 제나라 사람이지만, 오자서의 소개로 오왕 합려를 섬기며 오나라의 육군을 훈련시켰다고 한다. 합려가 초나라 수도를 점령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고 전해지지만, 그 이후의 행적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부차(夫差)
오나라의 마지막 왕이자 합려의 아들로 '와신상담'의 주연이다. 월왕 구천에게 패하여 죽은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 섶나무 위에서 자며(와신) 복수심을 불태운다. 기원 전 494년 구천에게 복수할 기회가 왔으나 그를 죽여야 한다는 오자서의 간언을 받아들이지 않고 살려두어 완전한 복수의 기회를 놓친다. 패자가 될 욕심으로 북진정책에만 신경을 쓰는 사이, 설욕에 여념이 없던 구천의 공격을 받자 화의를 요구하지만 거절 당하고 오자서의 간언을 듣지 않을 것을 후회하며 자결하였다.
구천(夫差)
'와신상담'의 또 다른 주연. 왕위를 이어받자마자 오왕 합려와 싸워 그를 죽이고 대승을 거두었다. 오나라 부차의 공격으로 회계산에서 패배하자, 백비에게 뇌물을 써 죽음을 면하고 범려와 함께 오나라로 끌려가 부차의 신하가 되었다. 2년여의 인질 생활 끝에 오나라에서 귀국한 구천은 회계산의 치욕을 씻기 위해 쓸개를 핥으며(상담) 부국강병에 힘썼다. 그리고 범려와 문종의 보좌 하에서 꾸준히 힘을 길러 끝내 오나라를 멸망시켜 춘추시대의 마지막 패자가 되었다.
참고자료
박인수 저, 『춘추 전국의 패자와 책사들』, 석필, 2001
임종욱 저, 『중국역대 인명사전』 이회문화사, 2010
공원국 저, 『춘추전국이야기 5 - 오월쟁패, 춘추 질서의 해체』, 위즈덤하우스, 2012
풍몽룡 저, 김구용 역, 『열국지사전』 솔출판사, 2001
사마천 저, 김영수 역, 『완역 사기 세가』 알마, 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