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秦穆公 진목공 | 秦穆公 진목공 | ||
진목공 (?-BC.621). 일부 기록에서는 진무공이라고 불리었다. 춘추시대 진나라 국왕으로 성은 영이고 이름은 임호이다. 39년간 재위(BC.659-BC.621)하였으며 사기에서 춘추오패의 하나라고 인정받았다. 인재를 매우 중시하여 재위 당시 건숙을 등용하고 비표, 손기 등 신하의 보좌를 받았다. 일찍이 진(晉)문공이 진(晉)나라로 돌아가 왕위를 쟁취하는 것을 도왔으며, 주 양왕 때 출병하여 촉국 및 한구관의 서쪽에 위치한 기타 국가를 공격하였다. 천리 길을 개척하여 주양왕으로부터 서방 제후의 우두머리로 임명받았으며 서융을 물리쳐 사백년 후 진의 중국통일의 기초를 닦았다. | 진목공 (?-BC.621). 일부 기록에서는 진무공이라고 불리었다. 춘추시대 진나라 국왕으로 성은 영이고 이름은 임호이다. 39년간 재위(BC.659-BC.621)하였으며 사기에서 춘추오패의 하나라고 인정받았다. 인재를 매우 중시하여 재위 당시 건숙을 등용하고 비표, 손기 등 신하의 보좌를 받았다. 일찍이 진(晉)문공이 진(晉)나라로 돌아가 왕위를 쟁취하는 것을 도왔으며, 주 양왕 때 출병하여 촉국 및 한구관의 서쪽에 위치한 기타 국가를 공격하였다. 천리 길을 개척하여 주양왕으로부터 서방 제후의 우두머리로 임명받았으며 서융을 물리쳐 사백년 후 진의 중국통일의 기초를 닦았다. | ||
− | + | ==生平 생애== | |
+ | 진덕공의 막내 아들로, 진선공, 진성공의 동생이다. 백리해,건숙, 유여를 모신으로 등용하고 진나라를 정복했다. 진혜공을 포로로 잡고 양(남조)과 예양국을 멸망시켰다. 진문공을 도와 진진(秦晋)연맹을 실현시켰으나 진문공의 사후 연맹은 와해되고 진(秦)과 진(晋)은 서로 대치하게 되었다. BC.627년 호지전(지금의 허난 삼문 골짜기 동남부 지방), BC.625년 방아지전 (지금의 산시성 동북부 지방) 에서 진(晋) 군에게 두 번 패한 뒤, 진(秦)의 동진(東進0의 길은 진(晋)에 의해 막혔다. 진목공 36년(BC.624년), 진목공이 손수 병사를 통솔하여 진(晋)나라를 토벌하였다. 황하를 건넌 뒤 나룻배를 전부 불태워서 결사항전의 의지를 표명하였다. 진(秦)나라 군대가 왕관(지금의 산시성 원시 현 동쪽)과 그 교외지역을 탈취하자 진(晋)나라 군대는 출전을 거부하고 모진에서 황하를 건너 남쪽의 효지에 다다랐다. 그곳에서 그해 전장에서 전사한 장병들을 흙으로 쌓아 표지를 만들고 돌아갔다. 진목공은 방향을 바꾸어 서쪽으로 나아갔으며, 진나라는 한구관의 서쪽 일대와 서융을 제패했다고 알려졌다. 또한 목공은 12국을 겸하고, 천리를 개척함. <한비자 10권> | ||
+ | 진(秦)목공은 진(晋)태자 신생의 누나인 목희를 아내로 삼았다. 진목공 39년 (BC.621년), 진목공은 사후에 어옹(지금의 산시성 펑샹 동남쪽)에 안장 되었으며 이 당시 순장당한 사람의 수는 177명에 달한다. | ||
+ | <좌전>에는 "진목공은 훌륭한 임금이지만 순장으로 인해 인재의 대량 손실을 초래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 ||
2018년 6월 25일 (월) 21:12 판
개요
秦穆公 진목공
진목공 (?-BC.621). 일부 기록에서는 진무공이라고 불리었다. 춘추시대 진나라 국왕으로 성은 영이고 이름은 임호이다. 39년간 재위(BC.659-BC.621)하였으며 사기에서 춘추오패의 하나라고 인정받았다. 인재를 매우 중시하여 재위 당시 건숙을 등용하고 비표, 손기 등 신하의 보좌를 받았다. 일찍이 진(晉)문공이 진(晉)나라로 돌아가 왕위를 쟁취하는 것을 도왔으며, 주 양왕 때 출병하여 촉국 및 한구관의 서쪽에 위치한 기타 국가를 공격하였다. 천리 길을 개척하여 주양왕으로부터 서방 제후의 우두머리로 임명받았으며 서융을 물리쳐 사백년 후 진의 중국통일의 기초를 닦았다.
生平 생애
진덕공의 막내 아들로, 진선공, 진성공의 동생이다. 백리해,건숙, 유여를 모신으로 등용하고 진나라를 정복했다. 진혜공을 포로로 잡고 양(남조)과 예양국을 멸망시켰다. 진문공을 도와 진진(秦晋)연맹을 실현시켰으나 진문공의 사후 연맹은 와해되고 진(秦)과 진(晋)은 서로 대치하게 되었다. BC.627년 호지전(지금의 허난 삼문 골짜기 동남부 지방), BC.625년 방아지전 (지금의 산시성 동북부 지방) 에서 진(晋) 군에게 두 번 패한 뒤, 진(秦)의 동진(東進0의 길은 진(晋)에 의해 막혔다. 진목공 36년(BC.624년), 진목공이 손수 병사를 통솔하여 진(晋)나라를 토벌하였다. 황하를 건넌 뒤 나룻배를 전부 불태워서 결사항전의 의지를 표명하였다. 진(秦)나라 군대가 왕관(지금의 산시성 원시 현 동쪽)과 그 교외지역을 탈취하자 진(晋)나라 군대는 출전을 거부하고 모진에서 황하를 건너 남쪽의 효지에 다다랐다. 그곳에서 그해 전장에서 전사한 장병들을 흙으로 쌓아 표지를 만들고 돌아갔다. 진목공은 방향을 바꾸어 서쪽으로 나아갔으며, 진나라는 한구관의 서쪽 일대와 서융을 제패했다고 알려졌다. 또한 목공은 12국을 겸하고, 천리를 개척함. <한비자 10권> 진(秦)목공은 진(晋)태자 신생의 누나인 목희를 아내로 삼았다. 진목공 39년 (BC.621년), 진목공은 사후에 어옹(지금의 산시성 펑샹 동남쪽)에 안장 되었으며 이 당시 순장당한 사람의 수는 177명에 달한다. <좌전>에는 "진목공은 훌륭한 임금이지만 순장으로 인해 인재의 대량 손실을 초래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참고자료
중국 위키피디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