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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태후는 한족의 생활방식과 예절방식, 제도 등을 수용해 균전련을 발표하는 등 적극적인 개혁에 나섰다. 유가와 법가를 숭배하고 주술을 금지했으며, 도참과 위서를 배우지 못하게 했다. 이것은 북위의 한족화 과정에 큰 기초가 되었다. | 풍태후는 한족의 생활방식과 예절방식, 제도 등을 수용해 균전련을 발표하는 등 적극적인 개혁에 나섰다. 유가와 법가를 숭배하고 주술을 금지했으며, 도참과 위서를 배우지 못하게 했다. 이것은 북위의 한족화 과정에 큰 기초가 되었다. | ||
==태화개혁== | ==태화개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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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6월 26일 (화) 14:58 판
목차
개요
풍태후는 북위(北魏) 문성제(文成帝) 탁발준(拓跋濬)의 황후이며, 시호(諡號)는 문명태후(文明太后)이다. 문성제가 사망한 후 황태자 탁발홍(拓跋弘)이 열두 살에 황위를 계승했을 때 섭정을 시작하며 정치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또한 탁발홍이 물러나고 효문제(孝文帝)가 왕위에 올랐을 때 권력을 더욱 강화하면서 한족의 제도를 수용해 적극적으로 북위의 기존 풍습을 개혁했다.
생애
북연 황족 출신에서 북위 노비 신분으로 전락하다.
‘태후’로 불리기 전의 풍 씨의 이름은 알려져 있지 않다. 풍 씨의 아버지인 풍랑(馮朗)은 북연의 소성제(昭成帝) 풍홍(馮弘)의 아들로 본래 북연의 황족 출신이었지만 북연에 망조가 짙게 깔리자 북위에 귀순했다. 풍랑은 북위에서 관직을 맡으며 아들 풍희(馮熙)와 딸 하나를 두었는데, 그 딸이 바로 북연이 멸망한 후 채 6년이 지나지 않았을 때 442년 태어난 풍 씨이다. 그러나 풍 씨가 부모의 사랑을 충분히 받기도 전에 그녀의 아버지 풍랑이 모반에 연루되어 죽게 되자 풍 씨 역시 북위의 노비로 전략해 궁에 들어가게 되었다.
고모의 보살핌 아래 문성제의 여인이 되다.
풍 씨는 당시 북위 황제였던 태무제(太武帝) 탁발도(拓跋燾)의 총비 좌소의(左昭儀)의 궁으로 들어가게 되었는데, 그녀는 과거 북연의 공주이자 풍 씨의 고모였다. 풍 씨는 운 좋게 고모의 보살핌을 받게 되었는데, 그녀가 궁에 입성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북위 궁 안에서는 피바람이 불었다. 452년 환관 종애(宗愛)가 태무제를 시해하고, 그 다음으로 즉위한 탁발여(拓跋余)까지 죽이고 손자 탁발준을 황제로 옹립한 것이다. 짧은 기간에 황제가 여러 번 바뀐 것을 본 좌소의는 궁에서 살아남기 위해 풍 씨를 탁발준에게 바쳤다. 풍 씨는 그의 총애를 얻어 그녀가 11살일 때 귀인으로 책봉되었다가 그녀가 14살 때 정식 황후로 책봉되었다.
모계 권력을 억제하려던 북위의 관습
풍 씨가 슬하에 친아들을 두지 않은 것이 어떤 의미인지 알기 위해서는 북위만의 독특한 규율을 살펴봐야 한다. 북위의 초대 황제 도무제(道武帝) 탁발규(拓跋珪)는 선비족, 즉 유목민족이다. 유목민족은 농경민족보다 모계의 영향을 더 많이 받았다. 탁발규가 황제에 오르기 전 일어났던 대부분의 전쟁 역시 외부의 적과의 싸움이 아니라 탁발 씨 일족을 비롯해 처가, 외가, 친가 등 부족 간 싸움이었다. 이러한 배경으로 인해 북위에는 특이한 관습이 만들어졌는데, 바로 후비가 낳은 아들이 태자가 되면 태자의 생모는 모두 사약을 받는 것이었다. 이 관습은 황후로 책봉된 풍 씨 역시 피할 수 없었다. 그녀가 아들을 낳게 되면 그 아들은 태자가 될 것이고 그렇다면 그녀 또한 사약을 마셔야 할 운명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탁발준이 총애했던, 그리고 풍 씨와 황후 자리를 놓고 경쟁했던 이비(李妃)에게 사약이 내려지게 했다. 탁발준에게 태자를 세우도록 부추겨서 이비의 장자 탁발홍이 태자로 세워지며 북위의 규율에 따라 이비가 사약을 받은 것이었다. 이는 풍 씨가 황후 자리가 오른 지 채 한 달이 안 되었을 때의 일이었다.
문성제의 이른 사망, 그리고 정치력 발휘의 시작
465년, 탁발준이 26세에 병으로 갑작스레 사망했다. 북위에서는 오랜 관습에 따라 황제가 쓰던 물품을 태웠는데, 그가 죽은 지 사흘 째 되던 날 물품을 태우는 과정에서 풍 씨가 통곡하며 불길 속으로 뛰어 들어 가려던 것을 주위 사람들이 겨우 말렸다. 문성제의 뒤를 이어 이비의 장자이자 태자였던 탁발홍이 황제 자리에 올랐다. 바로 헌문제(獻文帝)이다. 또한 풍 씨 역시 풍태후로 받들어졌다. 모계 권력을 견제하던 북위의 관습에 따르면 풍태후 역시 정치에 관여할 수 없었다. 하지만 탁발홍이 즉위했을 당시 그의 나이는 겨우 12살이었고, 권력은 어린 황제가 아니라 태원왕(太原王) 기마대장 을혼(乙渾)의 손에 있었다. 을혼은 감금되어 있던 상서(尙書) 양보년과 평양공 가애인을 죽이라 명했으며, 탁발준의 장례를 위해 궁에 왔던 평원왕 욱려도 죽여 버렸다. 풍태후는 왕실 사람들과 대신, 장군들과 을혼 무리를 진압했고, 이를 계기로 풍태후는 자신이 국정을 살필 것이라고 선포했다. 탁발홍이 14살이 될 때까지 총 2년 여간 풍태후는 공식적으로 섭정했는데, 섭정을 끝낸 후에도 풍태후가 뽑아둔 관료들과 풍태후의 정치적 관여에 대해 탁발홍은 불쾌해했다. 게다가 어떤 사람이 그의 생모가 어떻게 죽었는지 넌지시 알려주면서 둘 사이의 관계가 더욱 악화되었다. 탁발홍은 당시 풍태후의 총애를 받고 있던 이혁(李弈)과 그의 가족을 모조리 죽였다. 그러나 이내 자신을 능가하는 권력이 있는 풍태후와 맞설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종교에 마음을 둔 채 갑작스레 자신의 숙부인 탁발자를 다음 황제로 추천하며 자신은 보위에서 물러나겠다는 뜻을 보였다. 그러나 풍태후는 나이 많은 탁발자를 맡게 되면 자신이 섭정할 명분이 사라지기에 그녀는 탁발홍의 아들인 탁발굉을 황제 자리에 앉혔는데, 그가 바로 효문제이다.
효문제의 즉위, 그리고 풍태후의 개혁
효문제 탁발굉은 겨우 다섯 살에 즉위했다. 풍태후는 그가 어렸을 때부터 직접 기르며 가르쳤다. 그러나 황제 자리에서 물러난 후에도 탁발홍은 태상황으로서 계속해서 풍태후와 부딪쳤다. 탁발홍은 황실의 주요 업무를 모두 보고 받고, 직접 군대를 이끌고 정벌에 나서기도 하는 등 계속해서 황제와 조정 통치권을 놓치지 않으려고 했다. 그리고 결국 풍태후는 헌문제를 독살시켰다. 이는 『위서』 권105, 천상지3(2413쪽)에서도 언급되어 있다.
“(高祖承明元年 5월 康子) 헌문제가 깨닫지 못하다가 6월에 이르러 폭붕(暴崩 -돌연사)하였다. 실로 그것은 酖毒(짐독)의 網(화)가 아닌가”
476년 6월, 당시 헌문제의 나이는 스물 셋에 불과했다. 풍태후는 주위에 정치적으로 부딪치는 인물이 없는 상황 속에서 황실 관료들의 보좌를 받으며 효문제보다 더 큰 권력을 가지고 개혁을 실시한다. 이것이 바로 역사에서 ‘태화개혁’이라고 불리는 개혁이다. 오늘날 효문제의 개혁으로 알려져 있지만, 본질적으로는 풍태후가 집권했을 시기에 이뤄진 것이었다. 풍태후는 한족의 생활방식과 예절방식, 제도 등을 수용해 균전련을 발표하는 등 적극적인 개혁에 나섰다. 유가와 법가를 숭배하고 주술을 금지했으며, 도참과 위서를 배우지 못하게 했다. 이것은 북위의 한족화 과정에 큰 기초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