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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백은 촉나라 쓰촨 성 쑤이예에서 태어났다. 이백 아버지의 이름은 이객(李客)으로, 일반적으로 원래 그 지역 사람이 아니면서 그 지역에 살고 있는 사람을 '객'이라고 하는데, '타관 사람' 정도의 의미이다. 관리로 부임했거나 장사를 하기 위해 그 지역에 들어온 사람은 십 여년을 넘게 살았더라도 '객'인 것이다. 아마도 이객은 이런 이유에서 '객'으로 불렸을 것이다. 이 때, 이백의 아버지 이객의 성씨에 대해서도 논란이 있다. 원래 이씨가 아니었는데 촉 지역에 들어오며 이씨로 바꾼 것이라는 추측이 있다. 이에 대해서는 두 가지 추측이 있는데, 이객이 본래 호인(胡人), 즉 이민족인 투르크나 혹은 다른 중앙 아시아계 민족이었는데 귀화했다는 추측과, 관헌의 수배를 받거나 원수에게 쫓겨 도주해서 성을 바꾸었다는 추측이 그것이다. 만약 이백의 아버지가 중앙 아시아 출신의 상인이었다고 한다면, 문벌을 중시하는 당시 시대적 상황에 따라 성씨를 이씨라고 말하고 다니는 편이 유리하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특히 당시 성씨에 관한 관념은 지금 우리나라와는 조금 다르다는 것을 유념해야 한다. 영화 <범죄와의 전쟁>에서 최민식과 하정우가 성씨 하나만으로 연이 맺어졌던 것처럼, 당시 중국에도 그런 풍습이 있었다. 일단 같은 성을 가진 사람이라면 서로 친하게 지내고 상부상조하는 것이다. 이 탓에 이백의 성씨에 대해서도 논란이 있다. 이백은 평생동안 자신이 농서 이씨, 즉 황실의 친척이라고 주장했다. <br> | + | 이백은 촉나라 쓰촨 성 쑤이예에서 태어났다. 이백 아버지의 이름은 이객(李客)으로, 일반적으로 원래 그 지역 사람이 아니면서 그 지역에 살고 있는 사람을 '객'이라고 하는데, '타관 사람' 정도의 의미이다. 관리로 부임했거나 장사를 하기 위해 그 지역에 들어온 사람은 십 여년을 넘게 살았더라도 '객'인 것이다. 아마도 이객은 이런 이유에서 '객'으로 불렸을 것이다. 이 때, 이백의 아버지 이객의 성씨에 대해서도 논란이 있다. 원래 이씨가 아니었는데 촉 지역에 들어오며 이씨로 바꾼 것이라는 추측이 있다. 이에 대해서는 두 가지 추측이 있는데, 이객이 본래 호인(胡人), 즉 이민족인 투르크나 혹은 다른 중앙 아시아계 민족이었는데 귀화했다는 추측과, 관헌의 수배를 받거나 원수에게 쫓겨 도주해서 성을 바꾸었다는 추측이 그것이다. 만약 이백의 아버지가 중앙 아시아 출신의 상인이었다고 한다면, 문벌을 중시하는 당시 시대적 상황에 따라 성씨를 이씨라고 말하고 다니는 편이 유리하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특히 당시 성씨에 관한 관념은 지금 우리나라와는 조금 다르다는 것을 유념해야 한다. 영화 <범죄와의 전쟁>에서 최민식과 하정우가 성씨 하나만으로 연이 맺어졌던 것처럼, 당시 중국에도 그런 풍습이 있었다. 일단 같은 성을 가진 사람이라면 서로 친하게 지내고 상부상조하는 것이다. 이 탓에 이백의 성씨에 대해서도 논란이 있다. 이백은 평생동안 자신이 농서 이씨, 즉 황실의 친척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백의 경우에는 세대가 불분명했고, 또 이백이 농서 이씨가 아니라 조군 이씨를 보고도 친척이라고 했다거나, 다른 계통의 이씨에게도 '종형'이라거나 '종제'라고 했다고도 한다. <br> |
25세나 26세까지 동암자(東巖子)라는 선인과 쓰촨 성의 산들을 오르며 도교를 수양하였다.<br> | 25세나 26세까지 동암자(東巖子)라는 선인과 쓰촨 성의 산들을 오르며 도교를 수양하였다.<br> | ||
25세나 26세에 고향을 떠나 강남(江南)을 여행하였으며, 몰락한 귀족의 자제들과 어울렸다. <br> | 25세나 26세에 고향을 떠나 강남(江南)을 여행하였으며, 몰락한 귀족의 자제들과 어울렸다. <br>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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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안에서의 한림원 생활(742~744)=== | ===장안에서의 한림원 생활(742~744)=== |
2018년 6월 26일 (화) 15:06 판
이백 李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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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701년 쓰촨 성 |
사망 |
762년 당나라 안후이 성 |
국적 | 당나라 |
별칭 |
자(字)는 태백(太白, 타이바이) 호(號)는 청련거사(靑蓮居士) 별명(別名)은 시선 |
직업 | 시 (문학) |
종교 | 도교 |
주요 작품 |
산중문답(山中問答) 청평조사(淸平調詞) |
이백(701년~762년)은 중국의 시인이다. 자는 태백(太白), 호는 청련거사(靑蓮居士)이다. 촉나라 쓰촨 성 쑤이예 출생이다.
두보와 함께 중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시인으로 꼽힌다. 이 두 사람을 합쳐서 "이두(李杜)"라고 칭하고 이백을 "시선(詩仙)"이라 부른다. 현재 약 1100여 수의 시들이 남아 있다.
목차
생애
초반기(701년~726년)
이백은 촉나라 쓰촨 성 쑤이예에서 태어났다. 이백 아버지의 이름은 이객(李客)으로, 일반적으로 원래 그 지역 사람이 아니면서 그 지역에 살고 있는 사람을 '객'이라고 하는데, '타관 사람' 정도의 의미이다. 관리로 부임했거나 장사를 하기 위해 그 지역에 들어온 사람은 십 여년을 넘게 살았더라도 '객'인 것이다. 아마도 이객은 이런 이유에서 '객'으로 불렸을 것이다. 이 때, 이백의 아버지 이객의 성씨에 대해서도 논란이 있다. 원래 이씨가 아니었는데 촉 지역에 들어오며 이씨로 바꾼 것이라는 추측이 있다. 이에 대해서는 두 가지 추측이 있는데, 이객이 본래 호인(胡人), 즉 이민족인 투르크나 혹은 다른 중앙 아시아계 민족이었는데 귀화했다는 추측과, 관헌의 수배를 받거나 원수에게 쫓겨 도주해서 성을 바꾸었다는 추측이 그것이다. 만약 이백의 아버지가 중앙 아시아 출신의 상인이었다고 한다면, 문벌을 중시하는 당시 시대적 상황에 따라 성씨를 이씨라고 말하고 다니는 편이 유리하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특히 당시 성씨에 관한 관념은 지금 우리나라와는 조금 다르다는 것을 유념해야 한다. 영화 <범죄와의 전쟁>에서 최민식과 하정우가 성씨 하나만으로 연이 맺어졌던 것처럼, 당시 중국에도 그런 풍습이 있었다. 일단 같은 성을 가진 사람이라면 서로 친하게 지내고 상부상조하는 것이다. 이 탓에 이백의 성씨에 대해서도 논란이 있다. 이백은 평생동안 자신이 농서 이씨, 즉 황실의 친척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백의 경우에는 세대가 불분명했고, 또 이백이 농서 이씨가 아니라 조군 이씨를 보고도 친척이라고 했다거나, 다른 계통의 이씨에게도 '종형'이라거나 '종제'라고 했다고도 한다.
25세나 26세까지 동암자(東巖子)라는 선인과 쓰촨 성의 산들을 오르며 도교를 수양하였다.
25세나 26세에 고향을 떠나 강남(江南)을 여행하였으며, 몰락한 귀족의 자제들과 어울렸다.
구직기(726년~742년)
장안에서의 한림원 생활(742~744)
742년 43세에 현종의 칙령을 받아 한림공봉(翰林供奉)의 자리에 올라가게 되어 수도인 장안(長安)에 머물렀으나 자신의 적성과는 맞지 않는 따분함으로 44세에 사직하였다.
유랑기(744~755)
두보와의 여행(744~745)
사직 후에 자신의 친구이자 시(詩)적 라이벌인 두보와 함께 낙양에서 산둥까지 여행하였다.
안사의 난 이후(755~762)
54세에 다시 강남으로 돌아와 56세에 현종의 16번째 아들인 영왕 인(永王 璘)의 군대에 참여하였으나 영왕의 군대가 숙종에 의해 반란군으로 지목되어 군대에 함께 있던 이백도 지금의 구이저우 성인 야랑(夜郞)에 유배되었다.
그러나 759년 다행히도 삼협(三峽) 부근까지 갔을 때에 숙종의 은사(恩赦)를 받아 다시 강남으로 돌아왔다.
760년 가을부터는 강남의 각지를 유람하였고, 2년 뒤 762년에 안후이 성 당도(安徽省 當塗)의 현령(縣令)이었던 종숙 이양빙(李陽冰)의 집에서 사망하였다.
작품
대표적으로 산중문답(山中問答)과 청평조사(淸平調詞)가 있다. 그는 절구와 고시를 특기로 한 시인으로서 그의 시는 스케일이 크고 자유분방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참고문헌
- <<이백(영원한 대자연인)>>, 안치, 신하윤 외 옮김, 이끌리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