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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균전제는 주인이 없는 버려진 땅을 성인이 된 15세 이상 남녀에게 균등하게 배분하고, 일정 기간 농민을 지원하는 제도이다. 균전제는 485년 10월, 대신 이안세(李安世)의 건의로 실시되었는데, 북위에서 시작한 균전제는 당나라에 이르기까지 약 300년 동안 적용되었다. | + | 균전제는 주인이 없는 버려진 땅을 성인이 된 15세 이상 남녀에게 균등하게 배분하고, 일정 기간 농민을 지원하는 제도이다. 균전제는 485년 10월, 대신 이안세(李安世)의 건의로 실시되었는데, 북위에서 시작한 균전제는 당나라에 이르기까지 약 300년 동안 적용되었다.<ref>고성희, 《한 권으로 읽는 중국여성사》, 이담, 2013, p.77</ref> |
풍태후가 집권하던 시기는 북위가 이제 막 유목에서 농경으로 넘어가는 때였다. 그러다보니 국토의 상당 부분이 황무지로 버려져 있었다. 또한 기근과 재해로 집을 버리고 유랑민으로 돌아다니는 농민들이 많았으며 이들의 폭동도 종종 발생하곤 했다. 따라서 균전제를 실시함으로써 풍태후는 농민들을 고향으로 되돌아오게 하고, 그들의 삶을 안정시켜 국가 경제도 안정시키고자 하였다. 실제로 균전제 실시 후, 땅을 얻은 농민들이 고향에 돌아와 정부의 호적에 기록된 편호(編戶) 농민이 되어 국가 경제가 회복되는 결과를 낳았다. | 풍태후가 집권하던 시기는 북위가 이제 막 유목에서 농경으로 넘어가는 때였다. 그러다보니 국토의 상당 부분이 황무지로 버려져 있었다. 또한 기근과 재해로 집을 버리고 유랑민으로 돌아다니는 농민들이 많았으며 이들의 폭동도 종종 발생하곤 했다. 따라서 균전제를 실시함으로써 풍태후는 농민들을 고향으로 되돌아오게 하고, 그들의 삶을 안정시켜 국가 경제도 안정시키고자 하였다. 실제로 균전제 실시 후, 땅을 얻은 농민들이 고향에 돌아와 정부의 호적에 기록된 편호(編戶) 농민이 되어 국가 경제가 회복되는 결과를 낳았다. | ||
2018년 6월 26일 (화) 21:42 판
목차
개요
풍태후는 북위(北魏) 문성제(文成帝) 탁발준(拓跋濬)의 황후이며, 시호(諡號)는 문명태후(文明太后)이다. 문성제가 사망한 후 황태자 탁발홍(拓跋弘)이 열두 살에 황위를 계승했을 때 섭정을 시작하며 정치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또한 탁발홍이 물러나고 효문제(孝文帝)가 왕위에 올랐을 때 권력을 더욱 강화하면서 한족의 제도를 수용해 적극적으로 북위의 기존 풍습을 개혁했다.
생애
북연 황족 출신에서 북위 노비 신분으로 전락하다.
‘태후’로 불리기 전의 풍 씨의 이름은 알려져 있지 않다. 풍 씨의 아버지인 풍랑(馮朗)은 북연의 소성제(昭成帝) 풍홍(馮弘)의 아들로 본래 북연의 황족 출신이었지만 북연에 망조가 짙게 깔리자 당시(위진남북조 시대)에 중원 이북을 차지했던 북위에 귀순했다. 풍랑은 북위에서 관직을 맡으며 아들 풍희(馮熙)와 딸 하나를 두었는데, 그 딸이 바로 북연이 멸망한 후 채 6년이 지나지 않았을 때 442년 태어난 풍 씨이다. 그러나 그녀의 아버지 풍랑이 모반에 연루되어 죽게 되었다.[1] 당시 북위에서 죄인의 가족 중 남자의 경우 몰살당했고, 여자의 경우에는 궁궐 노비가 되는 것이 관례였다. 이에 따라 풍 씨 역시 북위의 노비로 전략해 궁에 들어가게 되었다.
고모의 보살핌 아래 문성제의 여인이 되다.
풍 씨는 당시 북위 황제였던 태무제(太武帝) 탁발도(拓跋燾)의 총비 좌소의(左昭儀)의 궁으로 들어가게 되었는데, 그녀는 과거 북연의 공주이자 풍 씨의 고모였다. 풍 씨는 운 좋게 고모의 보살핌을 받게 되었는데, 그녀가 궁에 입성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북위 궁 안에서는 피바람이 불었다. 452년 환관 종애(宗愛)가 태무제를 시해하고, 그 다음으로 즉위한 탁발여(拓跋余)까지 죽이고 손자 탁발준을 황제로 옹립한 것이다. 짧은 기간에 황제가 여러 번 바뀐 것을 본 좌소의는 궁에서 살아남기 위해 풍 씨를 탁발준에게 바쳤다. 풍 씨는 탁발준 문성제의 총애를 받아 그녀가 11살일 때 귀인으로 책봉되었다가 그녀가 14살 때 정식 황후로 책봉되었다.
모계 권력을 억제하려던 북위의 관습
풍 씨가 슬하에 친아들을 두지 않은 것이 어떤 의미인지 알기 위해서는 북위만의 독특한 규율을 살펴봐야 한다. 북위의 초대 황제 도무제(道武帝) 탁발규(拓跋珪)는 선비족, 즉 유목민족이다. 유목민족은 농경민족보다 모계의 영향을 더 많이 받았다. 탁발규가 황제에 오르기 전 일어났던 대부분의 전쟁 역시 외부의 적과의 싸움이 아니라 탁발 씨 일족을 비롯해 처가, 외가, 친가 등 부족 간 싸움이었다. 이러한 배경으로 인해 북위에는 특이한 관습이 만들어졌는데, 바로 후비가 낳은 아들이 태자가 되면 태자의 생모는 모두 사약을 받는 것이었다. 이 관습은 황후로 책봉된 풍 씨 역시 피할 수 없었다. 그녀가 아들을 낳게 되면 그 아들은 태자가 될 것이고 그렇다면 그녀 또한 사약을 마셔야 할 운명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탁발준이 총애했던, 그리고 풍 씨와 황후 자리를 놓고 경쟁했던 이비(李妃)에게 사약이 내려지게 했다. 탁발준에게 태자를 세우도록 부추겨서 이비의 장자 탁발홍이 태자로 세워지며 북위의 규율에 따라 이비가 사약을 받은 것이었다. 이는 풍 씨가 황후 자리가 오른 지 채 한 달이 안 되었을 때의 일이었다.
문성제의 이른 사망, 그리고 정치력 발휘의 시작
465년, 문성제가 26세에 병으로 갑작스레 사망했다. 북위에서는 오랜 관습에 따라 황제가 쓰던 물품을 태웠는데, 그가 죽은 지 사흘 째 되던 날 물품을 태우는 과정에서 풍 씨가 통곡하며 불길 속으로 뛰어 들어 가려던 것을 주위 사람들이 겨우 말렸다. 문성제의 뒤를 이어 이비의 장자이자 태자였던 탁발홍이 황제 자리에 올랐다. 바로 헌문제(獻文帝)이다. 또한 풍 씨 역시 풍태후로 받들어졌다. 모계 권력을 견제하던 북위의 관습에 따르면 풍태후 역시 정치에 관여할 수 없었다. 하지만 탁발홍이 즉위했을 당시 그의 나이는 겨우 12살이었고, 권력은 어린 황제가 아니라 태원왕(太原王) 기마대장 을혼(乙渾)의 손에 있었다. 을혼은 감금되어 있던 상서(尙書) 양보년과 평양공 가애인을 죽이라 명했으며, 탁발준의 장례를 위해 궁에 왔던 평원왕 욱려도 죽여 버렸다. 을혼의 폭정은 문성제가 죽은 다음해 2월, 풍태후가 왕실 사람들과 대신, 장군들을 이끌고 을혼 무리를 진압하기 전까지 이뤄졌다. 풍태후는 을혼의 반란군을 진입한 것을 계기로 자신이 국정을 살필 것임을 선포했다. 헌문제가 14살이 될 때까지 총 2년 여간 풍태후는 공식적으로 섭정했다. 467년 8월 헌문제의 부인 이씨가 아들 탁발굉을 낳은 후, 풍태후는 조정 권력을 헌문제에게 넘겨줬다. 그러나 이것이 풍태후가 정치에서 완전히 손 뗐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여전히 풍태후가 뽑아둔 조정 내의 관료들과 풍태후가 정치적으로 관여했고, 이에 대해 헌문제는 불쾌해했다. 헌문제는 뇌물죄를 빌미로 당시 풍태후의 총애를 받고 있던 이혁(李弈)과 그의 가족을 모조리 죽였다. 하지만 풍태후는 직접 헌문제에게 보복하는 것 대신, 정치적으로 그를 고립시키는 전략을 썼다. 정사에서 계속 자신의 뜻이 부딪치는 상황에서, 헌문제는 결국 즉위한 지 5년 만에 자신의 숙부인 탁발자를 다음 황제로 추천하며 자신은 보위에서 물러나겠다는 뜻을 보였다. 그러나 풍태후 입장에서 나이 많은 탁발자를 맡게 되면 자신이 섭정할 명분이 사라졌다. 따라서 그녀는 탁발홍의 아들인 탁발굉을 추천했는데, 그가 바로 효문제이다. 효문제는 471년 8월, 다섯 살을 채우기 전에 황제 자리에 올랐다.
효문제의 즉위, 헌문제의 피살, 그리고 개혁
효문제 탁발굉은 겨우 다섯 살에 즉위했다. 풍태후는 그가 어렸을 때부터 직접 기르며 가르쳤다. 당시 풍태후 입장에서 가장 큰 걸림돌은 헌문제, 즉 황제 자리에서는 물러났으나 태상황이 된 탁발홍이었다. 471년에 자신의 아들 탁발굉에게 왕위를 물려준 후에도, 탁발홍은 계속 조정 권력을 놓지 않으려는 모습을 보였다. 칙령을 내려서 정치, 경제 등의 국가의 큰일은 자신이 직접 처리했고, 직접 군대를 이끌고 변방의 외적을 토벌했다. 475년 10월에는 평성 북쪽 교회에서 열병식을 가짐으로써 자신의 위세를 떨쳐보려고 했다. 결국 476년 6월, 풍태후는 헌문제를 독살시켰다. 이는 『위서』 권105, 천상지3(2413쪽)에서도 언급되어 있다.
“(高祖承明元年 5월 康子) 헌문제가 깨닫지 못하다가 6월에 이르러 폭붕(暴崩 -돌연사)하였다. 실로 그것은 酖毒(짐독)의 網(화)가 아닌가”[2]
헌문제는 그렇게 스물 셋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헌문제의 사망 후, 더 이상 풍태후와 정치적으로 부딪치는 인물은 없었다. 또한 효문제는 어렸을 때부터 풍태후의 손에 길러져 그녀에게 큰 효심을 보이고 있었다. 비록 황제는 효문제였지만 실질적인 권력자는 풍태후였다. 풍태후는 약 14년 간의 집정 기간 동안 북위에 남아있던 악습을 철폐하고, 한족의 생활방식과 예절방식, 제도 등을 수용하는 등 적극적인 개혁을 펼쳐갔다. 그녀의 개혁은 북위 한족화 과정에 기초가 되었다.
49세의 일기로 눈을 감다.
풍태후는 491년 9월, 병으로 인해 눈을 감았다. 당시 효문제는 슬픔을 이기지 못해 5일 동안 식음을 전폐하고 두문분출하였다. 10월에 효문제가 풍태후를 방산의 영고릉에 안장하였는데 능묘와 장례의 규모가 국왕의 예를 갖춘 것이었다. 또한 풍태후에 대한 효문제의 추모의 정과 존경심을 나타내는 조서가 반포되기도 했다.[3]
태화개혁
태화개혁은 효문제의 개혁이다. 하지만 개혁의 대부분은 풍태후가 집권한 시기에 이뤄졌고, 풍태후의 정책 개혁의 연장선인 만큼 풍태후가 태화개혁의 주도자라고 보는 의견이 많다. 이 의견이 지지받는 근거로는 당시 효문제가 어렸을 때부터 풍태후에게 교육 받아 실질적인 권력의 힘이 그녀에게 있었다는 점, 그리고 풍태후가 엄연히 한족 출신이었다는 점이 있다.
배경
북위는 선비족, 즉 유목민족에 의해 탄생한 국가이다. 유목민족 출신인 선비족은 수렵을 업으로 삼았고, 물자 조달은 약탈이 주된 목적인 전쟁을 통해 이뤄졌다. 즉, 신하들의 수입은 일정한 봉급이 아니라 전쟁이 끝나면 황제가 나눠준 전리품이었다. 문제는 북위가 중원 이북을 통일한 후 이렇다한 전쟁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관리들은 수입을 위해 백성들을 핍박했다. 신하의 수입원에서부터 유목민족의 생활방식과 중원에서 큰 차이가 발생했고, 이는 북위의 통치 아래에 있는 백성들의 고통으로 이어졌다. 문성제와 헌문제도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려고 시도했으나 뚜렷한 성과를 얻지 못했다. 이는 풍태후가 과감한 개혁을 해야겠다고 다짐한 계기가 되었다.
태화개혁의 핵심은 선비족의 생산방식, 생활방식을 한족의 방식으로 바꾸는 것이었다. 태화개혁 내용으로는 반록제(班祿制), 균전제(均田制), 그리고 북위의 풍습 폐지 등이 있다.
반록제(班祿制)
반록제는 관리들에게 봉록(俸祿), 즉 일정한 수입을 지급하는 제도로, 이는 북위에서 전쟁에서 얻은 전리품으로 물자를 공급받던 기존의 방식에서 벗어나기 위해 만들어졌다. 배경에서도 언급되었다시피, 중원 이북을 북위가 통일하게 되면서 더 이상 약탈을 목적으로 할 만한 전쟁이 이뤄지지 않았다. 그러다보니 관리들은 백성들을 수탈하거나 뇌물을 받았다. 풍태후는 이 상태가 지속된다면 부정부패가 끊이지 않을 거라고 판단, 한족의 봉록 제도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484년 6월, 반봉록(班俸祿) 조서, 즉 반록제를 시작한다는 조서를 내렸다. 제도의 내용은 이렇다. 기존의 호조(戶調) 이외에, 각 호에 포목 세 필과 곡식 두 말 아홉 되를 추가로 징수해서 관직에 따라 봉록을 내린다. 그리고 세금을 더 징수하거나 제도를 제대로 시행하지 않은 관리는 엄벌에 처한다.[4] 실제로 조서를 내린 직후, 풍태후는 반록제를 따르지 않은 관리 40명을 처형했다. 반록제는 초반에 새로운 제도의 도입이 혼란을 불러일으킬 거라는 신하들의 반대에 부딪쳤다. 그래서 풍태후는 조정 회의를 열어서 신하들과 직접 논의했는데, 이 때 고려(高閭)라는 신하가 옛 제도로 돌아가면 부정부패가 만연할 것이며, 한족이 세웠던 역대 왕조들이 안정적이었던 근본적인 이유가 반록제였음을 주장하며 풍태후의 개혁에 힘을 실었다. 고려를 비롯한 여러 신하들의 지지로 반록제는 원활하게 추진될 수 있었다.
균전제(均田制)
균전제는 주인이 없는 버려진 땅을 성인이 된 15세 이상 남녀에게 균등하게 배분하고, 일정 기간 농민을 지원하는 제도이다. 균전제는 485년 10월, 대신 이안세(李安世)의 건의로 실시되었는데, 북위에서 시작한 균전제는 당나라에 이르기까지 약 300년 동안 적용되었다.[5] 풍태후가 집권하던 시기는 북위가 이제 막 유목에서 농경으로 넘어가는 때였다. 그러다보니 국토의 상당 부분이 황무지로 버려져 있었다. 또한 기근과 재해로 집을 버리고 유랑민으로 돌아다니는 농민들이 많았으며 이들의 폭동도 종종 발생하곤 했다. 따라서 균전제를 실시함으로써 풍태후는 농민들을 고향으로 되돌아오게 하고, 그들의 삶을 안정시켜 국가 경제도 안정시키고자 하였다. 실제로 균전제 실시 후, 땅을 얻은 농민들이 고향에 돌아와 정부의 호적에 기록된 편호(編戶) 농민이 되어 국가 경제가 회복되는 결과를 낳았다.
관습 철폐
“미신은 나라에 혼란을 일으키는 근거가 된다. 상서롭지 못한 책들을 모조리 불태워버려라. 앞으로는 이런 미신서적을 가지고 있는 자를 사형에 처하도록 한다.”
풍태후는 이 말을 시작으로 주술과 미래의 일을 예언하는 참위(讖緯)를 금지시켰다. 또한 동성통혼과 같은 탁발족의 원시적인 혼인 풍습 또한 모두 금지시켰다. 이후 효문제는 탁발족의 복장인 호복을 금지하고 탁발족의 성씨를 원(元)씨로 고치는 등 북위의 한족화를 가속화시킨다.
교육 제도 확립
헌문제 시기에 교육 기관은 중앙에 관학만 존재했을 뿐, 지방에는 특별한 교육기관이 존재하지 않았다. 풍태후는 집권 초기부터 교육을 매우 중시했다. 그녀는 지방 곳곳에 향학을 세우라는 칙령을 내렸다. 또한 황족자제들을 교육시키는 황자학도 설치했다. 이러한 교육제도를 통해 풍태후는 북위의 유목민족이 한족의 예절방식에 적응할 수 있도록 했다.
풍태후에 대한 평가
풍태후는 ‘문명태후’라는 시호를 받은 것처럼 뛰어난 여성 정치가였다고 평가받는다. 하지만 이와는 별개로 그녀에 대한 평가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풍태후의 태화개혁 덕분에 북위가 안정되고 번성할 수 있었다는 의견이다. 풍태후가 권력을 장악한 후, 이를 남용하지 않고 효문제를 교육하고 한화 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한 것이 북위의 번영에 기여했다는 점을 높이 평가하는 관점이다.
반면 권력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녀가 부정적으로 평가되는 부분도 있다. 권력을 탐하면서 헌문제를 사실상 폐위시키고, 끝내 독살시킨 점은 풍태후 정치 인생의 가장 큰 오점이라고 평가받는다. 또한 비록 태화개혁을 통해 나라의 번영에 기여를 했지만, 그녀의 장기적인 집권은 북위 후기에 효문황후 유씨와 같은 황후들이 자신들이 집정해야 하는 이유, 즉 선례로 남게 되었다.
후대에 풍태후가 ‘문명태후’로 기록되었다는 것은, 분명 그녀가 정치가로서의 능력이 역사에 인정되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하지만 풍태후가 권력을 유지하는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의 피를 봤다는 부정적인 평가를 단순히 그녀의 업적만으로 덮어서는 안 된다는 평가도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다.
역사서 속 풍태후
청나라의 초기 학자 조익(趙翼)의 ‘이십이사차기(二十二史箚記)’에 따르면[6], 역사서 속 풍태후에 대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북위(北魏) 문명풍태후(文明馮太后)는 행동거지가 올바르지 않았으며, 총애하던 자로[內寵] 이혁(李奕)이란 이가 있었는데, 헌문제(獻文帝)가 다른 일로 그를 죽이자 풍태후는 결국 헌문제를 죽였다.” (『魏書』 卷13 「文成文明皇后馮氏傳」, 328면)
“승명(承明) 원년(476)에 나이 스물셋으로 (헌문)제가 영안전(永安殿)에서 죽었다.” (『魏書』 卷6 「顯祖紀」, 132면)
“문명태후가 (헌문)제에게 안 좋은 감정이 있어 (헌문)제가 죽었다.” (『北史』 卷2 「魏顯祖紀」, 77면)
“태후는 성품이 엄격하고 분명해서 좌우에 허물이 있으면 곧잘 매질을 가했는데, 그래도 곧 이어 또 처음과 같이 대우했고, 혹은 다시 부귀함을 더해 주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그녀가 준) 이로움에 마음을 두고 죽을 때까지 (그녀에게서) 물러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魏書』 卷13 「文成文明皇后馮氏傳」, 329면)
“태후는 또한 밖으로 인망이 있는 원비(元丕), 유명근(游明根) 등을 예로 대우하여, 왕예 등을 장려하고 칭찬할 때마다 번번이 (원)비 등을 끌어 참석시켜서 사사로움이 없음을 보였다.” (『魏書』 卷13 「文成文明皇后馮氏傳」, 330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