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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진족은 북방 민족의 한 갈래이며 금(金)나라를 세운 민족이다. 즉, 여진어는 금나라 여진족이 사용하던 언어였으며, 여진 문자는 금나라 태조 아골타(阿骨打)의 명에 따라 희윤(希尹)과 엽로(葉魯)를 비롯한 사람들이 만든 문자이며 1119년 반포되었다. 이후 희종(熙宗) 완안단(完顔亶) 또한 여진 문자를 만들어 1138년에 반포했다. 따라서 희윤 등이 만든 여진 문자는 ‘여진대자(女眞大字)’라 하고, 희종이 만든 여진 문자는 ‘여진소자(女眞小字)’라고 한다. | 여진족은 북방 민족의 한 갈래이며 금(金)나라를 세운 민족이다. 즉, 여진어는 금나라 여진족이 사용하던 언어였으며, 여진 문자는 금나라 태조 아골타(阿骨打)의 명에 따라 희윤(希尹)과 엽로(葉魯)를 비롯한 사람들이 만든 문자이며 1119년 반포되었다. 이후 희종(熙宗) 완안단(完顔亶) 또한 여진 문자를 만들어 1138년에 반포했다. 따라서 희윤 등이 만든 여진 문자는 ‘여진대자(女眞大字)’라 하고, 희종이 만든 여진 문자는 ‘여진소자(女眞小字)’라고 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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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진 사람에게는 문자가 존재하지 않았다. 그래서 완안부(完顔部) 추장 완안석로(完顔石魯) 때는 여진의 여러 부족 간에 사신이 왕래할 때 신패(信牌)를 사용했지만, 구체적인 내용은 전부 구술로 전달하였다. 또한 신패의 형식 또한 여진의 부(附)마다 통일되지 않아 완안석로의 손자 완안영가(完顔盈歌)가 신패를 개별적으로 만들지 못하도록 금지령을 내린 후에야 그 형식이 통일되었다. | ||
+ | 당시 여진에는 문자가 없었기 때문에 사신으로 반드시 기억력이 좋은 사람을 선발했지만 이 또한 큰 불편함을 초래했다. 금나라의 태조 아골타는 요(遼)나라를 물리친 후에 사로잡은 한인과 거란인과도 거란 문자 및 한자로 소통했으며, 이때부터 여진 귀족의 대부분은 거란 문자로 소통했다. 이 당시 국내 문서 기록이나 이웃 나라와의 통신은 대부분 거란 문자를 채용했고, 이후 아골타가 희윤과 협로에게 명령해서 여진 문자가 창제되었다. 이와 관련된 기록은 『금사(金史)』에서 확인할 수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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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금나라 사람들은 처음에는 문자가 없었으나 나라가 점점 강성해지면서 이웃 나라와 교류할 때에도 거란 문자를 사용하였다. 태조는 완안희윤에게 금나라의 문자를 만들고 제도를 준비하라고 명했다. 그래서 완안희윤은 한인의 해자(楷字)를 근거하여 문자체를 모방한 한편 거란자의 제도에 근거하여 본국 언어 상황에 걸맞은 여진 문자를 만들었다.…태조는 크게 기뻐하고 반포할 것을 명령했다.……그 후에 희종은 여직자(女直字)를 만들었는데 완안희윤이 만든 여진 문자와 함께 사용했다. 완안희윤이 만든 것을 여진 대자라 했고 희종은 만든 것을 소자라고 했다.” (『금사(金史)』 권73 <완안희윤전(完顔希尹>)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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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직(女直)에는 처음에 문자가 없었으므로 요나라를 정벌하고 거란인과 한인을 사로잡았을 때에도 거란문과 한자로 소통하였다.……완안희윤은 거란 문자를 모방하여 여진 문자를 만들었다.” (『금사(金史)』 권66 <역전(易傳)>) |
2018년 11월 30일 (금) 16:38 판
개요
여진족은 북방 민족의 한 갈래이며 금(金)나라를 세운 민족이다. 즉, 여진어는 금나라 여진족이 사용하던 언어였으며, 여진 문자는 금나라 태조 아골타(阿骨打)의 명에 따라 희윤(希尹)과 엽로(葉魯)를 비롯한 사람들이 만든 문자이며 1119년 반포되었다. 이후 희종(熙宗) 완안단(完顔亶) 또한 여진 문자를 만들어 1138년에 반포했다. 따라서 희윤 등이 만든 여진 문자는 ‘여진대자(女眞大字)’라 하고, 희종이 만든 여진 문자는 ‘여진소자(女眞小字)’라고 한다.
창제 배경
여진 사람에게는 문자가 존재하지 않았다. 그래서 완안부(完顔部) 추장 완안석로(完顔石魯) 때는 여진의 여러 부족 간에 사신이 왕래할 때 신패(信牌)를 사용했지만, 구체적인 내용은 전부 구술로 전달하였다. 또한 신패의 형식 또한 여진의 부(附)마다 통일되지 않아 완안석로의 손자 완안영가(完顔盈歌)가 신패를 개별적으로 만들지 못하도록 금지령을 내린 후에야 그 형식이 통일되었다. 당시 여진에는 문자가 없었기 때문에 사신으로 반드시 기억력이 좋은 사람을 선발했지만 이 또한 큰 불편함을 초래했다. 금나라의 태조 아골타는 요(遼)나라를 물리친 후에 사로잡은 한인과 거란인과도 거란 문자 및 한자로 소통했으며, 이때부터 여진 귀족의 대부분은 거란 문자로 소통했다. 이 당시 국내 문서 기록이나 이웃 나라와의 통신은 대부분 거란 문자를 채용했고, 이후 아골타가 희윤과 협로에게 명령해서 여진 문자가 창제되었다. 이와 관련된 기록은 『금사(金史)』에서 확인할 수 있다.
“금나라 사람들은 처음에는 문자가 없었으나 나라가 점점 강성해지면서 이웃 나라와 교류할 때에도 거란 문자를 사용하였다. 태조는 완안희윤에게 금나라의 문자를 만들고 제도를 준비하라고 명했다. 그래서 완안희윤은 한인의 해자(楷字)를 근거하여 문자체를 모방한 한편 거란자의 제도에 근거하여 본국 언어 상황에 걸맞은 여진 문자를 만들었다.…태조는 크게 기뻐하고 반포할 것을 명령했다.……그 후에 희종은 여직자(女直字)를 만들었는데 완안희윤이 만든 여진 문자와 함께 사용했다. 완안희윤이 만든 것을 여진 대자라 했고 희종은 만든 것을 소자라고 했다.” (『금사(金史)』 권73 <완안희윤전(完顔希尹>)
“여직(女直)에는 처음에 문자가 없었으므로 요나라를 정벌하고 거란인과 한인을 사로잡았을 때에도 거란문과 한자로 소통하였다.……완안희윤은 거란 문자를 모방하여 여진 문자를 만들었다.” (『금사(金史)』 권66 <역전(易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