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히스툰 비문"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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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형문자의 로제타석인 베히스툰 비문은 고 페르시아어와 엘람어, 바빌로니아어 세 문자가 사용되었다. 그러나 이 대단한 삼중 언어를 이용하기 위해서는 우선 사본을 만들어야 했다. 이 절벽에 딛고 설 공간이 너무 좁았기 때문에 이는 대단히 어려운 일이었다.(비문을 더욱 돋보이게 하고 보호하기 위해 고대에 산중턱이 이미 제거된 것으로 보인다.) 이에 도전한 모험가는 여러 나라 말을 구사할 줄 알았던 영국군 장교, 헨리 크레스위크 롤린슨경(1810~1895)이었다. 그는 사다리를 이용해서 다른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오직 왼팔로 바위에 몸을 기대고서 왼손에는 노트를, 그리고 오른손에는 연필을 들고 사다리 맨 윗칸에 나서는 위험을 무릎쓰고 사본을 만들어 나갔다. 그러나 비문의 꼭대기까지는 손이 닿지 않았다. 운 좋게도 그 때 한 쿠르드 소년이 나타나서 절벽에 난 한 틈새로 올라가 그 틈에 나무 못을 박은 다음 비문의 표면을 가로질러 못을 하나 더 박고 줄을 매달아서 아래에 있는 롤린슨의 지시에 따라 종이 반죽으로 비문의 틀을 떠냈다. 이것은 용기있는 결단력이 이루어낸 업적이었다. 이후 10 여년의 노력 끝에 1847년 마침내 베히스툰 비문 전체의 사본이 만들어 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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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형문자의 [[로제타스톤]]인 베히스툰 비문은 고 페르시아어와 엘람어, 바빌로니아어 세 문자가 사용되었다. 그러나 이 대단한 삼중 언어를 이용하기 위해서는 우선 사본을 만들어야 했다. 이 절벽에 딛고 설 공간이 너무 좁았기 때문에 이는 대단히 어려운 일이었다.(비문을 더욱 돋보이게 하고 보호하기 위해 고대에 산중턱이 이미 제거된 것으로 보인다.) 이에 도전한 모험가는 여러 나라 말을 구사할 줄 알았던 영국군 장교, 헨리 크레스위크 롤린슨경(1810~1895)이었다. 그는 사다리를 이용해서 다른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오직 왼팔로 바위에 몸을 기대고서 왼손에는 노트를, 그리고 오른손에는 연필을 들고 사다리 맨 윗칸에 나서는 위험을 무릎쓰고 사본을 만들어 나갔다. 그러나 비문의 꼭대기까지는 손이 닿지 않았다. 운 좋게도 그 때 한 쿠르드 소년이 나타나서 절벽에 난 한 틈새로 올라가 그 틈에 나무 못을 박은 다음 비문의 표면을 가로질러 못을 하나 더 박고 줄을 매달아서 아래에 있는 롤린슨의 지시에 따라 종이 반죽으로 비문의 틀을 떠냈다. 이것은 용기있는 결단력이 이루어낸 업적이었다. 이후 10 여년의 노력 끝에 1847년 마침내 베히스툰 비문 전체의 사본이 만들어 졌다.
  
 
== '''해독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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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2월 3일 (월) 16:11 판

베히스툰.jpg

개요

'고대 비문의 여왕'이라고 불리는 베히스툰 비문은 바빌론, 수사, 그리고 엑바타나(현재의 하마단)를 연결하며 중앙아시아를 거쳐 인도까지 연결되는 고대의 왕도 상에, 게르만자로부터 30km 동쪽에 위치한 산 중턱에 새겨져있다. 또한 이 비문은 지상으로부터 가파른 경사면 69m 위에 90도로 깍아진 가로 18m, 세로 7m 평평한 절벽 위에 두 단에 걸쳐 새겨져 있기 때문에 이 비문과 부조물을 보기가 쉽지 않다. 베히스툰 비문은 쐐기문자를 판독하고 고대 페르시아어를 이해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해독과정

설형문자의 로제타스톤인 베히스툰 비문은 고 페르시아어와 엘람어, 바빌로니아어 세 문자가 사용되었다. 그러나 이 대단한 삼중 언어를 이용하기 위해서는 우선 사본을 만들어야 했다. 이 절벽에 딛고 설 공간이 너무 좁았기 때문에 이는 대단히 어려운 일이었다.(비문을 더욱 돋보이게 하고 보호하기 위해 고대에 산중턱이 이미 제거된 것으로 보인다.) 이에 도전한 모험가는 여러 나라 말을 구사할 줄 알았던 영국군 장교, 헨리 크레스위크 롤린슨경(1810~1895)이었다. 그는 사다리를 이용해서 다른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오직 왼팔로 바위에 몸을 기대고서 왼손에는 노트를, 그리고 오른손에는 연필을 들고 사다리 맨 윗칸에 나서는 위험을 무릎쓰고 사본을 만들어 나갔다. 그러나 비문의 꼭대기까지는 손이 닿지 않았다. 운 좋게도 그 때 한 쿠르드 소년이 나타나서 절벽에 난 한 틈새로 올라가 그 틈에 나무 못을 박은 다음 비문의 표면을 가로질러 못을 하나 더 박고 줄을 매달아서 아래에 있는 롤린슨의 지시에 따라 종이 반죽으로 비문의 틀을 떠냈다. 이것은 용기있는 결단력이 이루어낸 업적이었다. 이후 10 여년의 노력 끝에 1847년 마침내 베히스툰 비문 전체의 사본이 만들어 졌다.

해독내용

롤린슨이 그 고 페르시아 비문을 읽어내기 전에는 그 장면을 이스라엘 부족의 포로 모습이라고 상상하는 학자들도 있었다. 하지만 해독 결과 다리우스 대왕이 세 가지 쐐기문자들, 즉 고대 페르시아어, 엘람어, 아카드어로 자기가 왕으로 즉위한 과정을 비시툰산에 새겨놓았던 것이었다. 벽에는 상단 중심에 다리우스 대왕, 그의 두 신하, 그리고 자기가 정복하여 처단한 10명의 반란을 일으킨 왕들의 부조물이 가로 3m, 세로 5.5m에 새겨져 있다. 그리고 이를 세 가지 언어로 된 설형문자로 둘러 쌓여 있다. 또한 페르시아의 최고신인 아후라 마즈다가 그 위에 떠있다.


참고문헌

학술논문

배철현, 「비시툰 비문에 나타난 페르시아 제국의 다언어주의」, 성서사랑방 제14호, 2000.12

단행본

앤드류 로빈슨, 『문자 이야기』, 사계절, 2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