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오밍"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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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CBA 데뷔시즌 야오밍은 상하이 샤크스에서 경기당 평균 10득점 8리바운드 2.3블록의 준수한 활약을 펼쳤다. 그러나 두번째 시즌이었던 1998-1999시즌 정규리그 개막을 목전에 두고 야오밍은 왼쪽 발이 골절되는 심각한 부상을 당하게 된다. 이로 인해 야오밍은 시즌을 통째로 결장하게 된다. 이 때의 부상 후유증으로 야오밍의 제자리 점프력은 10cm에서 15cm 사이로 급격히 줄어들게 된다. 뼈를 깎는 노력으로 이뤄낸 프로 데뷔의 기쁨도 잠시, 어린 나이에 몸을 혹사시킨 대가가 데뷔 2년차 피로골절이라는 혹독한 시련으로 되돌아온 것이다. | ||
+ | 하지만 길고 긴 재활을 끝내고 코트로 돌아온 야오밍은 1999-2000시즌 정규리그에서 경기 당 평균 20.9득점 12.9리바운드를 기록, 데뷔 후 처음으로 평균 20-10을 돌파하며 상하이 샤크스의 주축 멤버로 거듭난다. 야오밍의 활약으로 상하이 샤크스는 1999-2000시즌과 2000-2001시즌 두 시즌 연속으로 CBA 파이널에 진출하지만, 왕즈즈가 이끄는 빠이 로케츠에 가로막혀 두 시즌 모두 준우승에 만족해야 했다. | ||
+ | 2001년 여름 왕즈즈가 NBA로 떠나면서 경쟁자가 사라진 야오밍은 2001-2002시즌 정규리그에서 평균 32.4득점 19리바운드 4.8블록을 기록하며 팀을 플레이오프로 이끈다. 게다가 플레이오프에서는 평균 38.9득점 20.2리바운드 4.3블록을 올리며 마침내 상하이 샤크스를 우승으로 이끌었다. 이 때 그는 필드골 성공률 76%를 기록하는 등 CBA 불멸의 기록을 남기었다. | ||
+ | 2001년에 아시아선수권에서 MVP를 차지하기도 하였다. | ||
+ | 2002년 여름, 야오밍은 NBA 진출을 공식 선언한다. |
2019년 5월 25일 (토) 02:25 판
출생과 유년기 시절
야오밍은 상하이에서 프로 농구선수 출신의 부모 사이에서 외동아들로 태어났다. 야오밍의 아버지 야오즈위엔은 208cm, 어머니 팡펑디는 188cm의 신장을 가졌으며, 특히 팡펑디는 중국여자농구대표팀 주장을 맡을 정도로 실력이 뛰어났다. 이렇게 남다른 부모님의 유전자를 물려받은 야오밍은 10세 때에 5피트 5인치(약 165cm)로 자랐다. 당시 스포츠 전문병원에서 전문의에게 성장판검사를 받은 야오밍은 의사로부터 그의 키가 221cm까지 자라날 것이라는 진단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야오밍은 9살이 되던 해에 (우유 한 병의 유혹에 넘어가) 초등학교 농구부에 지원하며 농구를 시작한다. 농구를 갓 시작한 야오밍은 기본기가 아예 없는 선수였다. 때문에 야오밍이 다니던 초등학교의 농구부 감독이었던 리장민 감독은 매일 정규훈련 후 야오밍과 나머지 훈련을 진행하여 볼 핸들링과 사이드스텝 등의 기본기를 반복 훈련시켰다고 한다. 이러한 리 감독의 노력 덕분에 야오밍은 안정적인 볼 핸들링과 슈팅을 장착할 수 있었다. 2016년 야오밍이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리며 소감을 발표할 때에 리장민 감독을 가장 존경하는 은사로 꼽을 정도로, 리 감독은 야오밍의 농구인생에 큰 도움을 준 은사이다. 야오밍은 13세 때 CBA 상하이 샤크스의 주니어 팀에 입단하였는데, 입단과 동시에 일요일을 제외하고 일주일에 6번, 매일 10시간이 넘는 강훈련을 하였다. 입단한지 한 달 만에 몸무게가 20kg가까이 빠졌을 정도로, 훈련의 강도는 상상 이상이었다. 당시 야오밍의 훈련 파트너는 류웨이였는데, 둘은 매일 붙어다니며 고된 훈련과 농구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고, 후에 프로와 국제 무대에서 계속해서 호흡을 맞추는 좋은 파트너가 된다. 상하이 샤크스 주니어 팀에서 고된 훈련을 받으며 4년의 시간을 보낸 야오밍은 17세의 나이로 상하이 샤크스의 성인 선수로 입단하였다.처음 상하이 샤크스의 유소년 팀에 입단했을 때 193cm이던 신장도 어느새 2m를 훌쩍 넘어 220cm를 향해가고 있었다.
CBA 경력
CBA 데뷔시즌 야오밍은 상하이 샤크스에서 경기당 평균 10득점 8리바운드 2.3블록의 준수한 활약을 펼쳤다. 그러나 두번째 시즌이었던 1998-1999시즌 정규리그 개막을 목전에 두고 야오밍은 왼쪽 발이 골절되는 심각한 부상을 당하게 된다. 이로 인해 야오밍은 시즌을 통째로 결장하게 된다. 이 때의 부상 후유증으로 야오밍의 제자리 점프력은 10cm에서 15cm 사이로 급격히 줄어들게 된다. 뼈를 깎는 노력으로 이뤄낸 프로 데뷔의 기쁨도 잠시, 어린 나이에 몸을 혹사시킨 대가가 데뷔 2년차 피로골절이라는 혹독한 시련으로 되돌아온 것이다. 하지만 길고 긴 재활을 끝내고 코트로 돌아온 야오밍은 1999-2000시즌 정규리그에서 경기 당 평균 20.9득점 12.9리바운드를 기록, 데뷔 후 처음으로 평균 20-10을 돌파하며 상하이 샤크스의 주축 멤버로 거듭난다. 야오밍의 활약으로 상하이 샤크스는 1999-2000시즌과 2000-2001시즌 두 시즌 연속으로 CBA 파이널에 진출하지만, 왕즈즈가 이끄는 빠이 로케츠에 가로막혀 두 시즌 모두 준우승에 만족해야 했다. 2001년 여름 왕즈즈가 NBA로 떠나면서 경쟁자가 사라진 야오밍은 2001-2002시즌 정규리그에서 평균 32.4득점 19리바운드 4.8블록을 기록하며 팀을 플레이오프로 이끈다. 게다가 플레이오프에서는 평균 38.9득점 20.2리바운드 4.3블록을 올리며 마침내 상하이 샤크스를 우승으로 이끌었다. 이 때 그는 필드골 성공률 76%를 기록하는 등 CBA 불멸의 기록을 남기었다. 2001년에 아시아선수권에서 MVP를 차지하기도 하였다. 2002년 여름, 야오밍은 NBA 진출을 공식 선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