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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5월 26일 (일) 22:31 판
보시라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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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49년 7월 3일 |
학력 | 중국 사회과확원 국제 늇 |
가족 | 아버지: 시중쉰(習仲勳), 어머니: 치신(齐心), 부인: 펑리위안(彭麗媛) |
관련 활동 | 2004년 상무부 부장, 2007년 10월, 제17기 당 중앙정치국 위원, 2007년 12월, 충칭 시위원회 서기에 취임, 제15기 당 중앙위원회 후보, 제16기 당 중앙위원, 제17기 당 중앙정치국 위원 |
개요
1949년 7월3 3일생 중국 공산당이의 원로이자 정부의 재정부장을 역입한 보이보의 아들이며, 혁명원로의 자제들로 구성된 태자당 파벌의 일원으로 아버지 보이보는 이른바 8대 원로의 한 사람이라 태자당의 주축 구성원이었다.
생애
문화대혁명 시기에 그는 홍위병(紅衛兵) 조직의 연동의 주동 멤버로서 "뿌리가 붉으면 붉은 싹이 나온다"라고 하는 계급론을 강조하였다. 1979년 베이징 대학교 역사학과를 졸업하였고, 1982년에 중국 사회과학원에서 국제뉴스 전공으로 대학원을 졸업했다. 중국 공산당 중앙서기처 연구실 간부로 있다가, 랴오닝 성에서 금현현 부서기를 한 뒤에 1992년부터 대련 시장을 맡아, 경제 및 환경 업무에 참여하였다. 2001년부터는 랴오닝의 성장, 2004년에는 상무부 부장이 되었다.. 보시라이는 2007년 충칭시 당서기로 발령 난 이후 충칭 모델을 기획하여 국내외로 대대적으로 홍보하고 충칭을 출발점으로 현실화하려고 했다. 보시라이는 충칭시 당서기 재임 중(2007년 - 2011년)에 4년간, 과거 마오쩌둥 시대의 대약진 운동 등 운동으로부터 지속된 공산주의 혁명 가요곡을 노래하자는 캠페인을 실시하였고, 문화대혁명을 생각나게 하는 풍조를 보여준다. 보시라이는 충칭시 당서기로 재직 시 2008년 7월부터 충칭 관리의 부정부패 적발과 조직폭력 범죄자 처형이라는 실적 공개에 앞장 서고, 이른바 범죄와의 전쟁을 통해 1,500명 이상을 적발하였다. 충칭시의 부정부패 관리 추방을 구실로 하여 전 충칭시 서기 왕양과 예전에 충칭시 서기를 맡았던 허궈창의 측근들을 제거하는 것이 목적이었다고도 말한다. 2010년 3월, 붉은색 가요로 방송 채널을 가득 채우고 부패조직 소탕을 수단으로 기세를 올리며 군중을 모아간 보시라이의 제1차 캠페인 창홍타흑이 종료되었다. 보시라이는 대외적으로 성과를 강조하였지만, 지나치다거나 군중노선으로 자신의 권력에 방해가 되는 인물을 제거하는 수단으로 사용하여 권력을 노리려 했던 것에 불과하다, 와 같이 부정적인 평도 있다.
주요정책
충칭모델
1978년 말 선언된 중국의 개혁개방으로 1980년대에는 중국 동남부 연해지역인 주강지역에 경제특구가 설치되면서 시작되었다. 이후 상하이 푸동지구, 텐진 등 화발해 지역을 중심으로 중국의 개혁개방이 심화되어왔다. 중국 개혁개방 지역의 확대는 기존의 사회주의 체제와 더불어 자본주의 경제 영역의 공존 범위를 확대시키는 체제의 실험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 것은 국가 주도적으로 시장화 개혁을 추진하고 동시에 점진적인 제도 개혁과 개방을 통해 중국의 발전 경험의 특징을 그대로 보여준다. 이런 면에서 중국모델의 내용은 혼합경제의 특성을 잘 엿볼수 있다. 하지만 현재의 중국모델은 혼합경제의 특성이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관료의 기득권을 대표하는 국유기업과 노동착취로 성장한 사기업이 공존하는 수준에 머무른다. 따라서 정경유착의 부패가 만연한 기반 위에서, 빈부격차와 같은 문제가 심화되는 경향을 보이며, 연해지역과 내륙지역 간의 지역간 격차도 벌어지게 된다. 이러한 문제로 인해 중국모델은 형성되면서 중국모델의 위기가 고조되는 상황에 당면한 것이다. 이에 따라 중국은 중국모델의 위기 국면을 타개하려는 모습을 보인다. 지역 간 불균형을 해소하기 위해 서부 대개발, 동북진흥, 중부굴기 등의 지역 균형발전 전략이 제시된다. 사회적 양극화 해소를 위해 소득재분배, 도농격차 해소, 사회 인프라 구축 등을 모색한다. 이 중 서부대개발의 전략적 기점이자 중국의 4대 직할시의 한곳인 충칭에서 이러한 맥락의 개혁정책들이 추진된다. 즉, 충칭의 개혁은 중국모델의 한계와 위기를 극복하려는 시도엿다. 2010년 기준으로 충칭의 GDP는 7890억 위안으로 중국의 31개 성(省)급 지역별 GDP 총량 순위에서는 아직 23위에 불과하지만, 그 전년 대비 GDP 증가율은 17.1%로 17.4%의 증가율을 보인 톈진(天津)에 이어 2위를 차지할 정도 로 초고속 성장을 이루고 있다. 이러한 가파른 경제성장과 더불어 범죄 소탕과 부패 관료 척결 등을 추진하며 주목을 받는다. 이른바 범죄와의 전쟁을 통해 부패를 척결하고 2010년에 충칭의 주민 체감안전 지수가 전국 1위로 나타난 것이다. 하지만, 이보다 더 충칭모델이 주목받았던 이유는 4가지를 꼽을 수 있다. 첫째는 내륙개방 정책이 추진되었다는 점이다. 이는 가공무역 중심의 기존 연해 지역의 개방체제와는 달리 많은 부품을 국내 생산에 의존하여 수출 시장은 물론이고 내수경제를 활성화시키는 새로운 가공무역 체제를 구축하는 것이었다. 충칭에서는 본래 중앙 정부의 서부대개발 전략의 핵심 도시로 지정됨에 따라 교통 인프라가 대거 구축되었고 이에 기반하여 거대한 산업단지 및 부품 생산체제가 조성되었다. 이에 따라 충칭에는 거대한 요소시장이 형성되었고 충칭의 초고속 경제성장에 따라 주민소득이 증가함에 따라 충칭에는 새로운 내수시장이 형성되고 있는 것이다. 두번째는 국유자산 보존을 통한 선순환적 혼합경제를 구축하려했다는 것이다. 즉, 충칭은 민영화 없이도 국유기업을 개혁하여 국유기업의 우량화를 도모하고 공유제 토지 제도를 유지하면서도 토지지표거래제 시행을 통해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경제사회 체제를 구축하였다. 또한, 이로부터 얻은 국유 수익을 국가재정으로 귀속시켜 사회인프라 투자와 복지 구현 에 사용하였다. 세번째로, 호구제 통합과 임대주택 정책 등 양극화 해소를 위한 민생 정책을 추진한 것이다. 충칭은 청두(成都)와 함께 이른바 ‘전국 도농통합 의 종합개혁 시험지로 선정되었는 데, 이를 기회로 충칭은 인근 농촌의 농민공 등을 충칭시 호구에 통합시켜 충칭시로부터 주거, 취업, 교육, 양로보험, 의료보험 5가지 방면의 사회보장 혜택을 얻도록 하였다. 충칭은 또한 농촌을 떠나 도시로 유입 되는 농민공에게 공공임대주택을 제공함으로써 농민공의 도시 주거권을 안정적으로 보장하는 정책을 함께 추진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충칭은 이러한 경제사회 개혁 정책을 추진하는 동시에 사회주 의적 정체성을 강조하는 다양한 행사와 활동도 대대적으로 벌였다. 충칭 TV 프로그램에서 상업광고 방영을 금지했다거나 충칭 전 주민에게 사회주의 혁명 시대의 문화를 상기시키고자 했던 혁명가요 부르기는 이와 관련된 대표적인 이벤트로 알려진 바 있다. 당 간부들의 정치적 순결성을 강조하기 위해 부패 관료들을 처벌했던 범죄와의 전쟁에서도 이러한 취지가 반영되었다. 충칭의 간부들이 일반 대중의 삶을 경험하여 대중과 동고동락하도록 만든 싼진싼통(三进三同) 정책도 이에 해당한다. 즉, 충칭의 간부들이 ‘기층사회에 들어가고 시골 촌 락에 들어가고 농가 속으로 들어가서(进基层、进村子、进农户) 농민 대 중과 함께 먹고 함께 살며 함께 일하는(同吃、同住、同劳动) 경험을 하 도록 한 것이다
몰락
보시라이 사건
2012년 상반기 중국 정치에서 매우 격렬한 권력 투쟁이 발생했다. ‘충칭(重慶) 모델’로 제18기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상무위원회 진입이 유력하던 충칭시 당 위원회 서기인 보시라이(薄熙來)가 2012년 4월 10일 엄중한 당 기율 위반 혐의로 중앙위원 및 중앙위원회 정치국원 직위를 박탈당하고 조사를 받게 됐다. 또 바로 직전인 지난 3월에는 보시라이를 지지한 것으로 알려진 저우융캉 (周永康) 현 제17기 중공 중앙 정치국 상무위원 겸 중공 중앙 정법위원회 서기의 실각설, 파벌간의 투쟁으로 인한 제18차 중국 공산당 전국대표대회의 연기설 등이 제기되기도 했다.이는 현재 이른바 ‘보시라이’사건으로 명명되고 있다 충칭모델의 성과로 18차 당대회에서 중국의 최고 정책 결정 집단인 정치국 상무위원직으로의 승진이 유력시되던 보시라이가 해임의 운명을 맡게 된 것은 직접적으로 ‘왕리쥔(王立軍) 사건’ 즉 2월 6일 왕리쥔 전 충칭 시 공안국장의 미국 망명 시도 및 무산이다. 즉, 보시라이 의 심복으로 충칭시의 ‘범죄와의 전쟁(打黑)’을 주도하여 대중적인 지지 를 받았던 충칭시 공안국장 겸 부시장인 왕리쥔이 불문명한 사유로 공안국장에서 면직 당한지 얼마 안돼 청두에 소재한 미국 총영사관에 진입하여 망명을 신청하며 보시라이를 비난한 사건이다. 보시라이는 왕리쥔 사건 이후에도 충칭시의 공식 일정을 모두 수행해 왔고 보시라이는 3월 전국인민대표대회에 충칭시 인민대표들을 이끌고 참가하였다. 이러한 상황적 요인으로 왕리쥔 사건에도 불구하고 보시라 이가 정치적 타격을 받지 않을 것이라는 예측이 지배적이었다. 더욱 이 보시라이는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별도의 기자회견을 열어 자신 가 족의 결백을 자신감 있게 강변하기도 했다. 자신의 왕리쥔 사건 관련설 을 부인하고 자신의 사임설을 부정함으로써 이번 사건에 대한 자신의 책임 범위를 최소화하고 자신의 정치적 운명을 낙관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렇듯 당당한 행보를 보이던 보시라이의 발목을 잡은 두 번째 사건이 발생한다. 그 사건은 전국인민대표대회 폐막을 앞두고 열린 원자바오(温家宝) 총리의 기자회견이었다. 원자바오 총리는 이 자리에서 돌연 “현직 충칭 시 정부는 반드시 반성해야”라고 보시라이를 직접적으로 겨냥하여 비판 하였다. 그는 동시에 “정치개혁이 없으면 문화대혁명 같은 역사적 비극 이 다시 온다”고 경고하기도 하였는데 이는 보시라이의 충칭 행적을 비 난한 것으로 해석되었다.19) 원자바오의 공개적인 보시라이 비판 직후 보시라이는 충칭시 당서기직을 해임당하고 공식 무대에서 자취를 감추 었고 이후 정치국원 직위도 박탈당하였다. 이후 충칭 시 당위원회 서기 직위에서만 해임되었던 보시라이는 4 월 10일에 이르면 정치국원 및 중앙위원 직에서도 전격적으로 해임되고 당 중앙기율검사위원회의 조사를 받게 되었음이 중국 관영 통신에 의해 공식적으로 보도된다 세 번째 단계는 보시라이의 아내인 구카이라이가 2011년 11월 15일 충칭에서 사망한 영국인 사업가 닐 헤이우드를 살해한 혐의로 조사를 받다가 2012년 4월에 사법 당국이 물증의 일부를 확보하고 사건에 대한 조사가 진행되는 상황에 보시라이 부부의 수십억 달러에 달하는 불법 자금 및 불법 자금을 유통한 의혹 역시 조사하면서 발생한다. 당시 보시라이에 대한 처벌 수위는 확정되있지 않았다. 하지만 일련의 3 가지 사건으로 인해 다음과 같은 처벌을 받게 된다. 2012년 9월 28일, 중국 공산당 중앙정치국은 보시라이의 공직과 당적의 박탈 및 사법처리를 결정하였다. 2012년 10월 26일, 전국인민대표회의 상무위원회가 보시라이의 전인대 대표자격을 박탈했다. 2013년 9월 22일, 중급인민법원은 보시라이에게 1심 무기징역 선고를 했다. 2013년 10월 25일, 산둥성 고급인민법원은 보시라이에게 2심 무기징역 선고를 했다. 이로써 보시라이에 대한 사법 절차가 완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