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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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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리스마이스너 지음, 마오의 중국과 그 이후 2, 이산, 2004
 
모리스마이스너 지음, 마오의 중국과 그 이후 2, 이산,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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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영남 지음, 파벌과 투쟁(덩샤오핑 시대의 중국2), 민음사, 2016
 
조영남 지음, 파벌과 투쟁(덩샤오핑 시대의 중국2), 민음사, 2016

2019년 6월 20일 (목) 21:04 판

자오쯔양

출생 1919년 11월
사망 2005년 1월 17일

생애

자오쯔양은 후난 성 지주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10대였을 1930년대 중반 공산주의 운동에 가담했고 이후 내전을 치르게 되는 마지막 10년 동안 홍군의 정치간부로 일했다. 그는 1949년 이후 위계적인 관료기구 내에서 빠르게 승진했으며 문화대혁명 기간에는 쫓겨나기도 했다. 그러나 1972년에 광둥 성당 위원회 서기로 복귀했다. 거기서 그는 약자로 리이저라고 알려진 젊은 민주활동가들을 조심스럽게 도왔다. 자오쯔양은 1970년대 말 쓰촨 성의 지도자로서 혁신적인 시장개혁정책을 추구했다. 그로 인해 덩샤오핑의 눈에 들었다. 1980년 덩샤오핑은 자오쯔양을 베이징의 중앙정치국 상무위원으로 승진시켰으며 아주 오랫동안 저우언라이가 지켜왔던 국무원 총리직도 그에게 맡겼다. 고위직에 오른 자오쯔양은 연해전략, 가격개혁 등을 단행했다. 그는 덩샤오핑의 정책, 즉 농업과 공업을 자본주의적으로 개혁하고 특히 대외무역과 외국인 투자에 중국을 개방하는 정책을 가장 열렬히 유능하게 추진하는 인물로서 자신의 위치를 다져나갔다. 하지만 덩샤오핑이 자신의 부하가 지식인들 사이에 부르주아 자유화를 용인하고 있다고 의심하게 되면서 둘의 관계가 악화되었다. 결정적으로 천안문 사태덩샤오핑과 반대되는 선택을 하면서 덩샤오핑 집권 기간동안 가택연금상태에 있었다.

자오쯔양의 시장지향정책

연해전략

연해전략이란 1986년 자오쯔양이 주장한 만주와 산둥에서부터 남쪽으로는 광둥에 이르기까지 태평양 연안을 따라 펼쳐져 있는 경제적으로 가장 선진적인 지역에 대외무역과 외국인 투자를 추진하는 전략이다. 그는 이런 경제특구의 범위를 더욱 확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경제특구(4개 도시)-연해 개방도시(14개 도시)-연해 경제 개방구-내지로 연결되는 개방체제를 형성할 것을 주장했다. 제13차 당대회의 결정 이후 1988년 초 그의 연해발전전략은 더욱 철저하게 실행되었고 총 2억의 인구를 가진 연해지역(만주에서 광둥까지)을 외국인 투자가에게 개방했다. 구체적으로 연해 지역에서는 대외개방형 경제 발전을 위주로 해서 노동집약형 제품이나 노동집약과 기술집약이 결합된 제품을 생산했다. 그리고 해외에서 자금과 설비, 원자재를 수입하고 이를 국내에서 가공,생산하여 국제시장에 판매했다. 또한 향진기업을 적극 발전시켜 대외개방형 경제의 주력군으로 삼았다. 그 밖에도 기존의 무역체제를 대폭 개혁했다. 그의 연해전략은 수출지향적 경제를 진흥시키기 위해 설계된 것으로 이 전략 하에서 외국과의 무역은 더욱 활발해졌고 외국인 투자가들에게는 아주 유리한 조건이 제시되었다. 그 결과 유입된 외국자본은 경기부양정책과 함께 놀라울 정도로 높은 공업성장률(1988년 21%)을 이룩하는 원동력이 되었으며, 1980년대의 마지막 몇 년 간 덩샤오핑 정권을 침몰시킨 관료들의 부패풍조에도 한몫했다.

기업개혁, 가격개혁

자오쯔양의 시장지향정책에는 기업개혁도 있었다. 하지만 국유공장의 재정과 경영에 대한 정부의 통제를 제거하려는 이런 노력은 대부분 무산되었다. 자오쯔양은 덩샤오핑의 열렬한 지지를 받으면서 또 하나의 개혁을 시도했는데 바로 가격개혁이었다. 이는 완제품과 원자재를 포함한 수많은 상품에 대한 국가의 고정가격을 점차 폐지하고 시장의 힘에 의존하게 하는 정책이었다. 가격개혁이 더욱 확대되어 점점 더 많은 상품의 가격이 시장의 결정에 맡겨졌다. 그러나 가격 자유화에 대한 막연한 예상은 경제와 금융에 혼란을 초래했다. 이미 강력한 통화팽창 압력으로 고통받고 있던 경제상황에서 물가폭등에 대한 공포는 걷잡을 수 없는 은행권의 자금이탈, 사재기, 매점매석, 공업기업과 상업기업의 가격인상 등을 초래했다. 1988년 초가을, 대도시의 인플레이션은 연 30%에 육박했다. 경제가 통제 불가능한 상태에 빠지자 정부는 비극적인 파산을 면하기 위해 엄격한 긴축정책을 채택했다. 결국 가격개혁은 공식적으로 제도화되기 전에 폐지되었으며 신용대출은 더욱 까다로워졌고 통화공급과 자본투자는 격감했으며 사실상의 자율권을 얻었던 많은 기업과 지역에 중앙정부의 통제가 다시 가해졌다.

그 외 시장지향정책

공장과 기업은 자신의 이익과 손실에 스스로 책임을 지는 독립된 단위로서 운영되도록 했다. 그리고 실제로 이들은 이익의 극대화라는 자본주의 원칙에 따라 사업을 해야 했다. 또한 자오쯔양은 철밥통으로 알려진 직업안정제도의 폐지를 재차 강조하고 자본주의에 더욱 충실한 노동시장을 창출했다.

결과

자오쯔양이 정책을 시행하는 동안 자본주의적 발전의 속도는 더욱 빨라졌다. 이 모든 발전(엄청난 양의 외국인 투자 유치, 부동산시장의 성장, 쉽게 조작될 수 있는‘시장의 힘’에 맡겨진 상품)은 관료들의 부정축재를 부채질했고 관료들에게 부자가 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세 발걸음 발전 전략

자오쯔양이 제시한 건국 100주년이 되는 2049년까지 추진할 3단계의 경제 발전 전략이다. 1단계는 1980년의 국내총생산을 2배로 늘려 온포문제(생계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2단계는 본 세기 말(2000년)까지 국내총생산을 다시 2배로 늘려 인민 생활이 소강수준(기본 생활의 영위 수준)에 도달하는 것이다. 3단계는 다음 세기 중엽(2049년)에 1인당 국내총생산을 중등발전국가 수준으로 발전시켜 인민 생활이 비교적 부유하게 되어, 현대화를 기본적으로 실현하는 것이다.

제 13차 당대회

공산당 제13차 당대회는 1987년 10월 25일부터 11월 1일까지 개최되었다. 공식 의제는 세 가지였다. 첫째는 중앙위원회 정치 보고 등 각종 업무 보고의 청취와 심의다. 둘째는 공산당 당헌의 수정이다. 셋째는 인선이다. 덩샤오핑은 정치개혁과 지도부의 연소화를 위한 세대교체를 중요한 문제로 다룰 것이라고 했다. 제13차 당대회는 두 가지 측면에서 자오쯔양에게 중요했다. 첫째, 자오쯔양의 직위가 공식화되었다. 후야오방은 1986년 12월 5일 3천명의 학생들이 다가올 지방대의원선거에서 실제적인 선택의 기회가 없다며 시작된 항의시위가 확산되면서 강제로 혼란의 책임을 지게 되었다. 자오쯔양은 1987년 1월 후야오방 후임으로 공산당 총서기 서리에 지명되었고 제13차 당대회에서 그 직위가 공식화되었다. 또한 이 대회는 자오쯔양이 지난 1월부터 후야오방의 자리를 이어받아 추진하고 있던 정책을 승인했다. 둘째, 중앙정치국 상무위원회를 새로 구성하면서 다섯 명의 상무위원 중 오직 자오쯔양만이 제13차 당대회 이후까지 남아있었다. 제13차 당대회는 덩샤오핑 그리고 다른 원로 당 지도자들이 공식 직책에서 물러나 당과 국가의 정치에 적극적으로 관여하지 않게 된 것을 축하하는 행사였던 것으로 일반에 받아들여졌다.

하상

하상은 중국중앙텔레비전(CCTV)을 통해 1988년 6월 전국에 방영되었다. 자오쯔양은 하상의 전국방영을 보장해주기까지 한 하상 제작진들의 후원자였다. 따라서 자오쯔양과 그의 경제 정책이 이 다큐멘터리에서 칭송되고 있다. 1988년 6월 중순 첫 방송이 나간 이후 7월에 당 선전부장 후치리가 더 이상 방영하지 못하도록 했지만 자오쯔양이 직접 개입함으로써 8월 중순에 전국방영이 다시 허용되었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자오쯔양이 하상 비디오테이프 복사본을 신권위주의 이론의 화신인 싱가포르의 독재자 리콴유에게 선물로 주었다고 한다.

자오쯔양과 덩샤오핑의 관계

자오쯔양과 덩샤오핑의 관계는 덩샤오핑이 자신의 부하가 지식인들 사이에 부르주아 자유화를 용인하고 있다고 의심하게 되면서 악화되었다. 또한 그의 시장정책이 인플레이션 때문에 비난받았고 자오쯔양의 가족은 수출입거래에서 큰돈을 번 그의 두 아들과 함께 관료들의 부정축재행위의 화신이 되어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자오쯔양은 덩샤오핑이 당시의 경제적 어려움을 들어 자신을 희생양으로 삼고 2년 전 후야오방을 숙청했듯이 자신을 제거하려 한다고 생각했다. 자기의 정치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 또 타고난 천성으로 인해 자오쯔양은 천안문사태에서 반항적인 학생들과의 타협을 선호하는 편이 되었다. 이로써 자오쯔양은 그의 오랜 후원자인 덩샤오핑에 맞서게 되었다. 이후 천안문시위에 당-국가의 간부들과 산업노동자들도 참여했다는 사실에 논란 원로들은 계엄령을 선포하도록 요구했다. 이 사실이 5월 18일 덩샤오핑의 집에 소환된 당 총서기 자오쯔양에게 전달되었고 그날 저녁 긴급 소집된 중앙정치국 상무위원회 회의에서 계엄령 선포가 승인되었다. 여기서 자오쯔양은 혼자 반대표를 던졌고 덩샤오핑과의 관계는 완전히 틀어졌다. 덩샤오핑 시대의 나머지 시간 동안 자오쯔양은 가택연금상태에 있었다.

천안문사태에서의 자오쯔양

1989년 5월 4일 자오쯔양은 두가지 주장을 했다. 첫째는 학생들의 요구가 합리적이지만 그것이 민주적 절차를 통해 합법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었고 둘째는 정부와 학생 지도자들 사이에 협상을 해야 하며, 이는 민주적 기반 위에서 진행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학생들의 애국주의를 칭찬했으며, 그들의 요구사항 중에서 언론의 자유와 독립적인 사법제도의 설립을 보장하라는 점을 비롯하여 많은 것을 지지했다. 5월 18일 회의에서 그는 중앙정치국의 계엄령 선포 권고를 막는 데 실패했다. 이후 천안문 광장을 향해 홀로 떠났다. 지난 주 자오쯔양은 학생들의 애국적인 행동을 칭찬하고 그들의 요구 중 상당부분을 지지하면서 광장 점거를 그만 끝내라고 애원했었다. 그 와중에도 그는 학생 대표들과의 직접적인 대화를 가급적 자제했다. 5월 19일 이른 아침 그는 단식투쟁자들 사이를 하염없이 배회하고 있었다. 그는 눈물을 흘리며 “내가 너무 늦게 왔다”고 말했다. 그리고 “우리도 한때는 젊었고 모두 터질 것 같은 힘을 갖고 있었다. 우리도 시위를 했으며, 그 결과에 대해 생각하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자오쯔양의 오랜 정치경력에서 가장 인간적이고 길이 기억될 에피소드가 될 만한 이 회한 섞인 행동은 6월 말 중국공산당 총서기직에서 정식 해임되는 과정에 그에게 쏟아졌던 비난의 한 빌미가 되었다.

참고자료

모리스마이스너 지음, 마오의 중국과 그 이후 2, 이산, 2004

조영남 지음, 파벌과 투쟁(덩샤오핑 시대의 중국2), 민음사, 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