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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강유위는 13세 이후 [[주차기]](朱次琦)로부터 수학했고 스승으로부터 개혁적 정세학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말고문을 익힌 강유위는 수차례 [[동시]](童試)에 응시했으나 번번이 낙방했고 25세와 31세에는 북경으로 올라가 순천향시에 응시했으나 역시 낙방했다. 거듭 과거에 떨어지면서 팔고문과 구식학문에 회의를 갖게 되었으며, 자연스럽게 공양학과 서양학문에 기울어지는 모습을 보였다. | |
강유위가 개혁가로 성장할 수 있는 사상적 계기는 1882년부터 이루어진다. 강유위는 [[만국공보]]를 통해 서양의 지식을 접하였으며, 전족 등 구습폐지 운동에 가담하는 한편 ‘대동(大同)’이상에 대한 각성과 숙고를 시작한다. 즉, 강유위는 실리공법전서(1884)와 강자내외편(1886)의 저술을 통하여 평등을 공리로 하는 대동의 뜻을 정립한다. 한편 1888년 강유위는 제 1차상서의 상달에 실패하고 광주로 돌아왔을 때 요평(寥平)의 금문학서를 접하고 금문경학의 ‘미언대의’와 ‘통경치용’의 지적 계시를 받았다. 이는 곧 자신의 금문학서인 신학위경고(1891), 공자개제고(1892)의 저술과 풀판으로 이어졌다. 신학위경고는 고문경학의 경향적 근거에 대한 비판이라면 공자개제고는 금문학에 근거한 개혁의 철학을 담은 저작이다. 강의 이두 저작은 당대 관리와 유학자들에 큰 반향을 일르켰고 1894년 여연원(余聯沅)의 탄핵을 받아 이단으로 몰려 신학위경고와 그 판이 소각, 파괴되었다. | 강유위가 개혁가로 성장할 수 있는 사상적 계기는 1882년부터 이루어진다. 강유위는 [[만국공보]]를 통해 서양의 지식을 접하였으며, 전족 등 구습폐지 운동에 가담하는 한편 ‘대동(大同)’이상에 대한 각성과 숙고를 시작한다. 즉, 강유위는 실리공법전서(1884)와 강자내외편(1886)의 저술을 통하여 평등을 공리로 하는 대동의 뜻을 정립한다. 한편 1888년 강유위는 제 1차상서의 상달에 실패하고 광주로 돌아왔을 때 요평(寥平)의 금문학서를 접하고 금문경학의 ‘미언대의’와 ‘통경치용’의 지적 계시를 받았다. 이는 곧 자신의 금문학서인 신학위경고(1891), 공자개제고(1892)의 저술과 풀판으로 이어졌다. 신학위경고는 고문경학의 경향적 근거에 대한 비판이라면 공자개제고는 금문학에 근거한 개혁의 철학을 담은 저작이다. 강의 이두 저작은 당대 관리와 유학자들에 큰 반향을 일르켰고 1894년 여연원(余聯沅)의 탄핵을 받아 이단으로 몰려 신학위경고와 그 판이 소각, 파괴되었다. | ||
강유위는 신학위경고를 통하여 고문경학의 경학적 허위성을 폭로하였다. 먼저, 강유위는 동한(東漢) 이후의 경학은 유흠에 의해 위조된 것으로 ‘위경(僞經)’이라 단정한다. | 강유위는 신학위경고를 통하여 고문경학의 경학적 허위성을 폭로하였다. 먼저, 강유위는 동한(東漢) 이후의 경학은 유흠에 의해 위조된 것으로 ‘위경(僞經)’이라 단정한다. |
2020년 12월 26일 (토) 21:57 판
강유위(康有爲)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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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58년 광동성 남해현 |
사망 |
1927년 |
목차
생애
강유위는 1858년 중국 광동성 남해현의 한 향신 가문에서 태어났다. 당시 청조는 제1, 2두 차례의 아편전쟁과 같은 외세의 침탈과 태평천국운동의 영향으로 국력이 현저하게 쇠퇴하고, 천하 질서가 위협받기 시작하던 시기였다. 어린 시절 전통적인 학문인 송명이학을 공부했지만 경세치용(經世致用)을 주장했던 그는 20세도 되지 않은 어린 나이에 춘추전국시대의 제자백가와 불교, 육왕심학(陸王心學), 금문경학(今文經學) 등 비주류 전통사상과 더불어 서학까지 섭렵하면서 시대에 부합되는 새로운 대안을 찾고자 하였다. 그리고 1890년대에 이르러 유학의 종교화를 주장하는 공교운동(孔敎運動)을 선도했을 뿐 아니라, 중국 최대의 체제 내 개혁운동인 유신변법운동(維新變法運動)을 이끌었다. 1898년 변법운동이 실패하자 강유위는 망명길에 올랐는데, 1913년 귀국하기까지 14년이라는 시간을 동남아, 인도, 유럽과 북미에서 지내게 되었다. 화교들의 도움으로 유족한 생활을 할 수 있 었던 그에게 망명시절은 세계 각지를 견문하고 사색하게 한 중요한 시기였다. 귀국한 후에도 그는 활발한 정치활동과 저술, 언론활동을 진행하다 1927년 청도에서 세상을 떠났다.
초기
그는 광서제에게 서양 열강의 이권 침탈로 중국이 위험한 상황에 처하였으니 청조는 서양을 본받아 개혁해야 한다는 내용의 상서를 올렸다. 그러나 그의 상소는 광서제에게 이르지 못하여 받아들여지지 않자 향리로 돌아가 제자교육에 힘썼다. 이후 그는 “신학위경고”와 “공자계재고”를 저술하였다. 신학위경고는 청말 금문공양학파의 주장을 그 정점으로 밀고 나간 저서이다. 그는 이를 통해 유흠(劉欽)의 경설 및 그 계통을 잇는 후한 고문학의 위경이라고 하여 보수파를 공격함으로써, 변법운동의 장애를 제거하기 위한 이론적 근거를 마련하고자 하였다. 또한 나아가 “공자계재고”를 저술하여 공자가 일으킨 유교야말로 가장 우수한 가르침이며 육경은 모두 공자가 지은 것으로, 공자 이 개제(改除)에 즈음하여 오로지 요순문무의 고에 의탁하였으며 여기에서 공자의 미언을 엿볼 수 있다는 것이었다. 즉, 그는 여기에서 공자의 이름을 빌어 변법의 정당성을 증명하고자 하였다. 이것이 강유위의 변법사상의 중심이다. 그는 공양설에 기초한 이 “공자계재설”을 통해 공자를 유교의 종교적 교조와 같은 위치에 놓고, 이 공교를 국가의 통일적 종교로 만들자고 주장하였다. 이로써 무술개혁 때에 많은 관제개혁을 실행하려고 하였다. 그는 진화론적 공양삼세설를 기초이론으로 하고 부국강병을 당연 목표로 하였다. 서태루를 중심으로 한 보수파의 반대로 현실적으로 그 개혁안이 성공을 걷지 못했지만, 철만 변법을 주장하는 지식인들이 그리는 근대라는 밑그림을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다. 서태후는 광서를 영대에 가둔 다음 변법파를 제거하고 변법에 동정한 내외 관리들도 모두 파면했다. 강유위는 결국 영국과 일본 공사관의 도움을 받아 일본으로 망명했다.
일본 망명
일본으로 망명한 강유위는 서양의 정치를 학습하여 전제군주를 입헌군주로 개혁해야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일본명치변정고”, “아라사대피득변정기고” 등의 전문에 중국이 약한 원인은 전제군주를 실시하는데 있다고 하고 민권으로 중국을 구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그래서 그는 서양이 실행한 삼권분립을 모방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의 민권설은 황제의 권력에 의탁한 민권설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그는 변볍을 단행함에 “먼저 군권을 존중하고 다음으로 민맹(民盲)을 구한다”고 하였다. 그는 봉건정권아래에서 맹아적 자산계급의 이익을 요구한 것으로 민권사상을 완전히 배제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민주 혁명이 날로 심해지는 시기에 들어서는 오히려 그는 민권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하였다. 그리하여 “보황회(保皇會)”를 조직하였고, 혁명에 반대입장을 취하였다.
귀국
그는 13개국을 유람한 뒤 16년만에 귀국하여 신해혁명 이전에는 보황회를 조직하여 혁명파에 반대노선을 걸었다. 민국(民國)이 들어선 이후 1913년 상해에서 “불인(不忍)”이라는 잡지를 간행하여 ‘공화정을 반대하고 국구주의를 보존하자’를 주장하였다. 1917년에는 장훈(張勳)과 더불어 복벽을 도모했으나 성공하지 못했고, “공화평의”를 지어 입헌군주제와 공자 숭상을 주장하였으나 동정한 자들이 거의 없었다. 다만 그가 제창한 공교회(孔敎會)는 오랫동안 존속하였다. 그가 보수주의자들의 대변자가 된 것은 청 왕조에 대한 그의 비상한 충성심 때문에서만이 아니라 입헌군주제가 공화제보다 낫다는 그의 오랜 시념 때문이었다. 결단서이 있고, 고집이 쎈 그는 자기의 사상이 인기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고집하였다. 혁명파에 대한 반대노선과 1898년에 그의 개혁운동 실패는 공화국이라는 정체에 대한 무조건적인 반대라기보다는 정치적, 도덕적 붕괴로 인한 분열, 내란에 대한 걱정이 앞섰기 떄문이었을 것이다. 그는 아직 서양의 정치체제에 대한 정확한 탐색과 민주줒의라는 겅체에 대한 이해사 제대로 정립되지 않았기 때문에 혁명이라는 단뎨를 방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그의 이론은 늙어서도 젊은 시절의 이론에 벗어나지 못하였다. 시대의 변화에 따르지 않고 그는 청말 위기에 벗어나기 위한 방법으로 변법을 주자아하여 정치개혁을 외쳤다. 그는 민국 초에 혁명의 반대 노선에 설 수 밖에 없었던 것은 여전히 전통 사상에 근거한 거란, 승평, 태평의 삼세와 대동,소강의 이법의 전통 사상을 버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만 그는 보수파와 혁명파 사이에 변화의 주축에 섰던 것은 확실하다.
금문경학과 유신, 입헌론
강유위는 13세 이후 주차기(朱次琦)로부터 수학했고 스승으로부터 개혁적 정세학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말고문을 익힌 강유위는 수차례 동시(童試)에 응시했으나 번번이 낙방했고 25세와 31세에는 북경으로 올라가 순천향시에 응시했으나 역시 낙방했다. 거듭 과거에 떨어지면서 팔고문과 구식학문에 회의를 갖게 되었으며, 자연스럽게 공양학과 서양학문에 기울어지는 모습을 보였다.
강유위가 개혁가로 성장할 수 있는 사상적 계기는 1882년부터 이루어진다. 강유위는 만국공보를 통해 서양의 지식을 접하였으며, 전족 등 구습폐지 운동에 가담하는 한편 ‘대동(大同)’이상에 대한 각성과 숙고를 시작한다. 즉, 강유위는 실리공법전서(1884)와 강자내외편(1886)의 저술을 통하여 평등을 공리로 하는 대동의 뜻을 정립한다. 한편 1888년 강유위는 제 1차상서의 상달에 실패하고 광주로 돌아왔을 때 요평(寥平)의 금문학서를 접하고 금문경학의 ‘미언대의’와 ‘통경치용’의 지적 계시를 받았다. 이는 곧 자신의 금문학서인 신학위경고(1891), 공자개제고(1892)의 저술과 풀판으로 이어졌다. 신학위경고는 고문경학의 경향적 근거에 대한 비판이라면 공자개제고는 금문학에 근거한 개혁의 철학을 담은 저작이다. 강의 이두 저작은 당대 관리와 유학자들에 큰 반향을 일르켰고 1894년 여연원(余聯沅)의 탄핵을 받아 이단으로 몰려 신학위경고와 그 판이 소각, 파괴되었다. 강유위는 신학위경고를 통하여 고문경학의 경학적 허위성을 폭로하였다. 먼저, 강유위는 동한(東漢) 이후의 경학은 유흠에 의해 위조된 것으로 ‘위경(僞經)’이라 단정한다.
교육사상
강유위의 교육사상은 애국의 입장에서 나온 교육사상으로서 과거를 바꾸고, 팔문을 폐지하며, 학교를 일으켜 민지(民智)를 열고, 인재를 양성할 것을 주장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또 대동세계의 교육체계를 구상하기도 하여 교육에 대한 이상적인 모습을 그리기도 하였다. 그의 교육사상은 당시와 이후에도 중국 근대교육의 발전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교육내용
강유위는 교육을 발전시키는 것이 국가를 발전시키는 기본적인 방법이라고 보았다. 그는 한 국가의 강약은 교육의 발달여부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여기고, 국가가 부장하려면 국민의 지혜 즉, 민지(民智)를 개발해야 한다고 보았다. 그리고 이러한 민지의 개발은 교육을통해서 해야 한다고 보았다. 그는 <상청제 제2서>에서 재주와 지혜가 있는 백성이 많으면 국가가 강해지고, 그 반대이면 국가는 약해진다고 주장하고, 중국이 괴약한 근본원인을 교육이 발달하지 않은데 있다고 보았다. 강유위는 일본교육개혁의 성취를 상당히 중시하였다. 그래서 그는 일본이 강한 것은 학교가 흥한 것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가 보기에 일본은 많은 인재의 배양을 위하여 한편으로는 외국전문가를 텅하여 가르침을 받고, 한편으로는 많은 학생들을 유학을 보냈다. 그런데 강유위가 보기에 이런 외국전문가를 청하거나 유학을 보내는 것이 매우 효과가 있는 것으로 보였다. 중국이 부강하려면 반드시 외국이 교육을 발전시킨 경험과 인재를 배양한 경험을 학습해야하는데, 그러려면 외국인 교사를 초빙하거나, 유학을 보내야 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보았다. 강유위는 중국을 부강시켜 나라를 구하려면 경제와 교육ㅇ을 발전시켜야 하는데 현재와 같은 과거제도로 배출되어 나오는 인재로는 국가의 발전을 이루기 어려운 것으로 보았다. 그는 과거를 통해서 선발되어 나오는 사람은 대부분 지식이 결핍되고, 필요한 지식을 배우고 나오지 않아 쓸모가 없다고 여겼다. 따라서 그는 팔사취사제도는 그 해가 매우 크므로 폐지해야한다고 주장하였다. 과거제를 비판하는 것과 동시에 강유위는 적극적으로 학교를 일으킬 것을 제창하였다. 변법유신의 인재를 배양해 나라를 위기로부터 구하기 위하여 강유위는 여러 차례 청정부에 학교설립, 서양의 학교제도와 과학기술의 수입 등을 호소하였다. 1898년 강유위는 청의 광서제를 향하여 ‘청개학교절’을 올리고 건의하였다. 이는 서양의 학교제도를 받아들여 중국에 새로운 학교제도를 세우려 한 것이다. 한편, 강유위는 대동서라는 책을 썼는데, 이 책은 강유위가 구상하는 하나의 대동사회의 이상을 구체화하여 기술해 놓은 것이다. 이 대동사회에서는 국가, 계급, 가정이 없는 전 세계의 인류가 평등한 사회이다. 그는 이상적인 대동사회의 교육제도를 설계하였다. 그 내용을 보면 그는 학교를 4단계로 구분하여 제시하였다. 즉 인본원, 육영원, 소학원, 중학원, 대학원등이 그것이다. 강유위는 교육내용 및 방법과 관련해서도 많은 새로운 주장들을 내어놓았다. 교육내용과 관련해서는 서학을 중요내용으로 제시한 것이 특징이라 하겠다. 그는 <장홍학기>에서 학생들에게 가르쳐야할 내용으로 ‘학강’, ‘학과’, ‘과의학과’의 3개 방면을 내어놓았다.
교육방법
그는 학생들이 자유로이 자기의 사상을 발휘할 수 있도록 해주는 교육방법을 주장하였고, 상호계발, 직관교학 등의 방법을 제시하였다. 그는 당시 봉건사회 학교의 기계적인 암기수업을 반대하고, 교사가 학생에대해 시행하는 잔혹한 체벌에 반대하였다. 이러한 교학방법은 현대의 교육심리학과 학습심리학의 원리에 부합하는 것으로서 그 의미가 크다고 하겠다.
여성교육
그는 일찍이 여자의 전목은 건강에 해롭다고 주장하면서 전족을 없앨 것을 주장하였다. 이것은 장유위의 여성해방사상의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인구의 반을 차지하는 여자교육문제에 대해 아주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수천년애의 남존여비의 관념을 타파할 것을 주장하면서 여학을 제창하였다. 그는 “중국에는 2백조의 여자가 있는데 한학교도 여자를 가르치지 않는다. 이에 따라 배우지 못하는 사람이 그 반이 된다.”고 하였다. 후에 그는 <대동서>에서 진일보해서 남녀평등에 관한 자신의 견해를 밝히고 있다. 그는 여자도 독립권이있고, 일체가 남자와 동등하다고 주장하였다. 강유위의 이런 사상이 잘 표출괴어 너나타난 것이 교사문제와 관련하여 여자의 지위를 중시한 경우이다. 그는 “육영원”과 “소학원”의 교사는 전부 여자교사로 채워야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렇게 주장한 이유는 유아 혹은 초등 간계의 교육에서는 여자의 특서이 남자보다 아동의 교육에 유리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사범교육
그는 사범학교는 고학의 뿌리라고 여겼다. 그는 사범학교를 잘 운영해서 좋은 교사가 많이 배출되어 나와야 소학을 보급할 수 있다고 보았다. 한편 강유위는 서방국가의 실업학교의 발달을 보고, 실업교육의 역할을 찬양하였다. 그가 보기에 서방에는 수사학당, 철로학당, 전보학당 등 실업 발달에 필요한 학문 학교를 설치하여 가르치고 있었다. 따라서 강유위는 중국의 현실을 고려한 실업학교의 설치를 주장하였다.
평가
중국은 분명히 변화를 요구하였고 황제지배국가가 아닌 민주공화국을 꿈꾸는 기대의 변화에 그의 대동사상은 더 이상 환영받지 못하였다. 그러나 청말 지식인들에 중국 정치 개혁의 필요성을 주지하였던 선구적 역할을 분명 그가 해냈다. 그가 꿈꾸는 정치적 이상은 전통과 서수사상을 조화롭게 이끌어내는 중국적 정치 모형을 그리고자 하였다.
참고자료
한국교육개발원. (2010). KD98-25-01-01 근대 중국 유신운동파의 교육적 관심사와 특징 분석 - 康有爲, 渠啓超, 嚴復의 교육사상을 중심으로. [KEDI] 한국교육, (), 0-0.
金俊. (2017). 근대 동아시아 유가(儒家) 지식인의 이상향과 공동체 인식. 아세아연구, 60(3), 37-63.
이영란, 고재휘. (2012). 변법파 캉유웨이(康有爲)와 혁명파 쑨원(孫文)의 사상 비교연구. 한국동북아논총, (63), 209-2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