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이론"의 두 판 사이의 차이
(→송대 이후 중국의 사상 - 구양수와 석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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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민족성과 화이론을 논할 때 가장 중요한 두 사상가는 석개와 구양수이다. 석개(石介)는 저작으로 중국론(中國論)을 집필하였는데, 이는 현재 볼 수 있는 옛 중국의 문헌 가운데 “중국”만을 제목으로 삼은 유명한 문장이다. 다른 한 편의 글이 바로 구양수(歐陽脩)의 정통론(正統論)인데, 그의 글은 당시 지식인들 사이에서 뜨거운 감자의 역할을 했다. 이외에도 푸러청은 저서인 <당대 이민족 관념의 변화>에서 송대의 화이 관념이 시간이 지날수록 더 강해졌음을 지적했다. 천팡밍의 경우, 송대의 전통론을 논하면서, 송나라 이전에는 “정통에 대한 현실적 논쟁만 있었을 뿐, 정통 이론의 출현은 없었다”고 지적했다. 마지막으로 천쉐린은 <구양수의 전통론에 대한 새로운 해석>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 중국의 민족성과 화이론을 논할 때 가장 중요한 두 사상가는 석개와 구양수이다. 석개(石介)는 저작으로 중국론(中國論)을 집필하였는데, 이는 현재 볼 수 있는 옛 중국의 문헌 가운데 “중국”만을 제목으로 삼은 유명한 문장이다. 다른 한 편의 글이 바로 구양수(歐陽脩)의 정통론(正統論)인데, 그의 글은 당시 지식인들 사이에서 뜨거운 감자의 역할을 했다. 이외에도 푸러청은 저서인 <당대 이민족 관념의 변화>에서 송대의 화이 관념이 시간이 지날수록 더 강해졌음을 지적했다. 천팡밍의 경우, 송대의 전통론을 논하면서, 송나라 이전에는 “정통에 대한 현실적 논쟁만 있었을 뿐, 정통 이론의 출현은 없었다”고 지적했다. 마지막으로 천쉐린은 <구양수의 전통론에 대한 새로운 해석>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 ||
− | 구양수가 <정통론>을 저술했던 네 가지 배경에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데, 그중 첫 번째는 “송나라와 이전 왕조 사이의 정통성 계승 문제”이고, 두번째는 “춘추학 부흥의 영향”이며, 세 번째는 “선대 역사를 편찬하면서 마주친 문제”이고, 네 번째는 “북송 외교의 좌절에 대한 반응”이다. | + | 구양수가 <정통론>을 저술했던 네 가지 배경에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데, 그중 첫 번째는 “송나라와 이전 왕조 사이의 정통성 계승 문제”이고, 두번째는 “춘추학 부흥의 영향”이며, 세 번째는 “선대 역사를 편찬하면서 마주친 문제”이고, 네 번째는 “북송 외교의 좌절에 대한 반응”이다. |
이를 종합하자면, 정통성의 문제는 한 국가의 존재의 문제이며 어떠한 정치적 합법성을 갖는지, 그리고 어떻게 타인과 자신의 역사를 기술할 것인지에 대한 문제인 것이다. 이는 결국 ‘상대방’이 없었거나, 혹은 ‘상대방’이 자기 국가의 존재 의미에 대한 의문을 갖도록 할 만큼 강하지 않았다면 논의되지 않았을 문제이다. 이러한 논의는 당시의 시대 상황을 반영한다. 당시 중국은 서북에는 서요(西辽)<ref>요나라가 망한 후 1132년 중앙 아시아에 세워진 나라</ref>와 서하(西夏)<ref>오르도스, 감숙성, 산시성에 걸치는 지역에 티베트계 탕구트인이 세운 나라</ref>, 동북에는 금(金)<ref>1115년에 세워져 1234년에 멸망한 여진족이 동아시아 중국 북부에 세운 나라</ref>, 남쪽에는 대리국(大理國)<ref>938년 중국의 윈난 지방에서 단사평이 세운 나라로, 1253년 몽골의 침략으로 멸망함</ref>와 교지(交趾)<ref>베트남 북부 지역의 옛 이름</ref>등 다양한 적으로부터 위협받고 있었다. 이러한 주변 강대국들의 등장과 현실에서의 위협은 옛 중국에서 상당 기간 동안 유지되어 왔던 민족, 국가, 그리고 천하의 조공체제와 화이(華夷)관념에 심각한 변화를 유도했다. 이러한 시대 상황의 변화는 중국인으로 하여금 ‘상대’에 대한 의식을 통해 생성된 자아중심의 배타적인 민족주의를 탄생시켰고, 구양수의 정통론과 석개의 중국론은 이 대표적인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 이를 종합하자면, 정통성의 문제는 한 국가의 존재의 문제이며 어떠한 정치적 합법성을 갖는지, 그리고 어떻게 타인과 자신의 역사를 기술할 것인지에 대한 문제인 것이다. 이는 결국 ‘상대방’이 없었거나, 혹은 ‘상대방’이 자기 국가의 존재 의미에 대한 의문을 갖도록 할 만큼 강하지 않았다면 논의되지 않았을 문제이다. 이러한 논의는 당시의 시대 상황을 반영한다. 당시 중국은 서북에는 서요(西辽)<ref>요나라가 망한 후 1132년 중앙 아시아에 세워진 나라</ref>와 서하(西夏)<ref>오르도스, 감숙성, 산시성에 걸치는 지역에 티베트계 탕구트인이 세운 나라</ref>, 동북에는 금(金)<ref>1115년에 세워져 1234년에 멸망한 여진족이 동아시아 중국 북부에 세운 나라</ref>, 남쪽에는 대리국(大理國)<ref>938년 중국의 윈난 지방에서 단사평이 세운 나라로, 1253년 몽골의 침략으로 멸망함</ref>와 교지(交趾)<ref>베트남 북부 지역의 옛 이름</ref>등 다양한 적으로부터 위협받고 있었다. 이러한 주변 강대국들의 등장과 현실에서의 위협은 옛 중국에서 상당 기간 동안 유지되어 왔던 민족, 국가, 그리고 천하의 조공체제와 화이(華夷)관념에 심각한 변화를 유도했다. 이러한 시대 상황의 변화는 중국인으로 하여금 ‘상대’에 대한 의식을 통해 생성된 자아중심의 배타적인 민족주의를 탄생시켰고, 구양수의 정통론과 석개의 중국론은 이 대표적인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 ||
==사이'四夷' 와 아'亞'== | ==사이'四夷' 와 아'亞'== |
2022년 12월 23일 (금) 02:03 판
목차
화이론의 개념
華夷論. 전통적인 중원의 중국인들과 사이로 대표되는 각 소수민족들 간의 관계에 대한 유가적 견해를 말한다.[1]본 문서에서는 송나라 이전, 중국의 전통적인 화이론과 송대 이후 이것이 변형되어 가는 과정에 대해 서술할 것이다. 중화를 존중하고 오랑캐를 물리친다는 뜻의 조선의 대외정책에 골자가 된 사상인 '화이론'과는 한자는 같지만 다른 내용이니 혼돈이 없길 바란다.
민족의 경계와 국가, 그리고 화이론
모든 국가는 국가의 기원과 정통에 대한 서사가 있다. 국가라는 집단은 경계를 가진다. 국가는 안과 밖을 구분하는 가장 강력한 울타리로 작용한다. 한편, 이러한 집단의 경계를 나누는 작업은 결코 쉽지 않다. 물질적인 것으로 나눈다고 나누어지지 않기 때문에 오늘날 국가들은 물질적인 국경과 더불어 사상적인 잣대로 이를 표현한다. 고대 중국의 경우도 마찬가지인데, 특히 고대의 경우 오늘날과는 달리 명확한 국경의 경계가 존재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이러한 사상적인 경계가 더욱 중요했다. 이러한 맥락에서 고대 중국부터 명, 청 교체기 그리고 나아가 오늘날까지도 영향을 미치고 있는 사상이 바로 화이론이라 할 수 있다. 화이론이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은 송대이지만, 이는 송대, 그 중에서도 북송 시기에 이르러서 이러한 논의가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는 뜻이지, 그 이전에는 논의가 없었다는 것은 아니다.[2]
송대 이전 중국의 사상 - 정통론 -
전근대시기에 건국과 통치를 정당화하는 방식은 우선 서주에서 확립된 천명(天命)과 덕을 둘러싼 관념으로 정리할 수 있다.[3] 상나라에서 천명의 개념은 특정 통치 집단을 무조건적으로 지지하는 것이었다. 이는 상나라 사회의 신권적 특징과 연결 지어 해석할 수 있는데, 당시 지도자의 정통성을 보장하는 것은 자연에 대한 비이성적인 해석과 제사였다. 한편, 상-주 교체기에 이르러, 상나라를 멸망시킨 주나라는 이와 대비되는 새로운 개념의 천(天)을 제시하였다. 바로 천명은 특정 통치 집단을 무조건적으로 지지하기 보다는, 덕이 있는 자(有德者)에게 수탁된다는 것이다. 이는 천명을 그 활동 범위는 합리적인 측면에 제한시키고, 신비적 분위기에서 벗어나 인간의 합리적 행위를 보장하는 최후의 근거로 인식했음을 의미한다. 유가 역시 이러한 사상에 동의하였는데, 그 근거는 다음과 같은 구절에서 찾을 수 있다.
天何言哉? 四時行焉, 百物生焉, 天何言哉 하늘이 어찌 말을 하더냐? 사시가 운행이 되고 온갖 사물이 자라는데, 하늘이 무슨 말을 하더냐?[4]
송대 이후 중국의 사상 - 구양수와 석개 -
중국의 민족성과 화이론을 논할 때 가장 중요한 두 사상가는 석개와 구양수이다. 석개(石介)는 저작으로 중국론(中國論)을 집필하였는데, 이는 현재 볼 수 있는 옛 중국의 문헌 가운데 “중국”만을 제목으로 삼은 유명한 문장이다. 다른 한 편의 글이 바로 구양수(歐陽脩)의 정통론(正統論)인데, 그의 글은 당시 지식인들 사이에서 뜨거운 감자의 역할을 했다. 이외에도 푸러청은 저서인 <당대 이민족 관념의 변화>에서 송대의 화이 관념이 시간이 지날수록 더 강해졌음을 지적했다. 천팡밍의 경우, 송대의 전통론을 논하면서, 송나라 이전에는 “정통에 대한 현실적 논쟁만 있었을 뿐, 정통 이론의 출현은 없었다”고 지적했다. 마지막으로 천쉐린은 <구양수의 전통론에 대한 새로운 해석>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구양수가 <정통론>을 저술했던 네 가지 배경에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데, 그중 첫 번째는 “송나라와 이전 왕조 사이의 정통성 계승 문제”이고, 두번째는 “춘추학 부흥의 영향”이며, 세 번째는 “선대 역사를 편찬하면서 마주친 문제”이고, 네 번째는 “북송 외교의 좌절에 대한 반응”이다.
이를 종합하자면, 정통성의 문제는 한 국가의 존재의 문제이며 어떠한 정치적 합법성을 갖는지, 그리고 어떻게 타인과 자신의 역사를 기술할 것인지에 대한 문제인 것이다. 이는 결국 ‘상대방’이 없었거나, 혹은 ‘상대방’이 자기 국가의 존재 의미에 대한 의문을 갖도록 할 만큼 강하지 않았다면 논의되지 않았을 문제이다. 이러한 논의는 당시의 시대 상황을 반영한다. 당시 중국은 서북에는 서요(西辽)[5]와 서하(西夏)[6], 동북에는 금(金)[7], 남쪽에는 대리국(大理國)[8]와 교지(交趾)[9]등 다양한 적으로부터 위협받고 있었다. 이러한 주변 강대국들의 등장과 현실에서의 위협은 옛 중국에서 상당 기간 동안 유지되어 왔던 민족, 국가, 그리고 천하의 조공체제와 화이(華夷)관념에 심각한 변화를 유도했다. 이러한 시대 상황의 변화는 중국인으로 하여금 ‘상대’에 대한 의식을 통해 생성된 자아중심의 배타적인 민족주의를 탄생시켰고, 구양수의 정통론과 석개의 중국론은 이 대표적인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사이'四夷' 와 아'亞'
- ↑ 출처: 바이두 지식백과. 다음 링크 참조 https://baike.baidu.com/item/%E5%8D%8E%E5%A4%B7%E8%AE%BA/62345986?fr=aladdin
- ↑ 손애리, 구양수의 ‘정통론’읽기, 동양사회사상학회, 2022, p.3-4.
- ↑ 손애리, 구양수의 ‘정통론’읽기, 동양사회사상학회, 2022, p.6.
- ↑ 논어, 양화편 中
- ↑ 요나라가 망한 후 1132년 중앙 아시아에 세워진 나라
- ↑ 오르도스, 감숙성, 산시성에 걸치는 지역에 티베트계 탕구트인이 세운 나라
- ↑ 1115년에 세워져 1234년에 멸망한 여진족이 동아시아 중국 북부에 세운 나라
- ↑ 938년 중국의 윈난 지방에서 단사평이 세운 나라로, 1253년 몽골의 침략으로 멸망함
- ↑ 베트남 북부 지역의 옛 이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