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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1) 송 무제 === | |
동진사회가 정치적 혼란과 사회적 혼란으로 인해 막을 내리자 군인 출신이었던 유유는 무력을 기반으로 자신이 황제가 되어 송을 건국한다. 이렇게 하여 북의 북위와 남의 송이 서로 대치하는 남북조시대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송 무제 유유는 중앙 재정을 확립하고 중앙 권력을 강화하려는 정책을 펼쳤다. 먼저 유유는 북쪽에서 남하한 유우민들을 포함하여 모든 주민을 현재 거주하는 지역의 호적에 등록시키는 토단정책을 시행하였다. 이는 동진 시대에 호적의 문란과 불공평한 세역의 폐단이 국가 재정과 정치, 사회적으로도 영향을 끼친 것을 시정하기 위한 정책이었다. 이로써 왕조의 세수가 증가하고 북쪽에서 온 유우민도 강남의 주민이 되는 결과를 가져와 중앙권력의 강화에 도움이 되었지만, 그 시행이 철저하지는 못해 큰 도움이 되지는 못했다. 유유는 또한 군부의 지배권을 귀족의 손에서 황제를 정점으로 하는 황족이나 무인들에게 옮겨, 결과적으로 귀족이 군사 지배권을 상실하게 됨으로써 황제의 권력을 강화하고자 노력했다. | 동진사회가 정치적 혼란과 사회적 혼란으로 인해 막을 내리자 군인 출신이었던 유유는 무력을 기반으로 자신이 황제가 되어 송을 건국한다. 이렇게 하여 북의 북위와 남의 송이 서로 대치하는 남북조시대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송 무제 유유는 중앙 재정을 확립하고 중앙 권력을 강화하려는 정책을 펼쳤다. 먼저 유유는 북쪽에서 남하한 유우민들을 포함하여 모든 주민을 현재 거주하는 지역의 호적에 등록시키는 토단정책을 시행하였다. 이는 동진 시대에 호적의 문란과 불공평한 세역의 폐단이 국가 재정과 정치, 사회적으로도 영향을 끼친 것을 시정하기 위한 정책이었다. 이로써 왕조의 세수가 증가하고 북쪽에서 온 유우민도 강남의 주민이 되는 결과를 가져와 중앙권력의 강화에 도움이 되었지만, 그 시행이 철저하지는 못해 큰 도움이 되지는 못했다. 유유는 또한 군부의 지배권을 귀족의 손에서 황제를 정점으로 하는 황족이나 무인들에게 옮겨, 결과적으로 귀족이 군사 지배권을 상실하게 됨으로써 황제의 권력을 강화하고자 노력했다. | ||
− | + | === (2) 송 문제, 원가의 치를 이루다. === | |
송무제 유유가 창업 3년만에 죽고, 송 문제 유의융이 집권했다. 송 문제 집권 당시, 문벌 출신들의 귀족이 주요 직에 진출하면서 귀족 우위의 정치적 안정기가 이루어지고, 그 문치의 기풍은 일세를 풍미하게 되었는데, 이것을 '원가의 치'라고 부른다. 문제는 귀족 문화를 옹호하고 문벌귀족을 존중하려는 자세를 취하면서도, 실무형 한문 출신의 능리적 인물을 등용하고 황족을 통해 지방 군권을 장악함으로써 정치적 안정을 지속했다. 하지만 북위가 강성한 세력을 바탕으로 화북지역의 통일을 이룩하고있을 때, 문제가 북벌을 감행했다. 그러나 북벌군은 도처에서 패배하고 오히려 북위의 태무제는 남하하려는 기세를 보였다. 이 때부터 문제가 이룩했던 원가의 정치는 점점 기울어지게 되었다. | 송무제 유유가 창업 3년만에 죽고, 송 문제 유의융이 집권했다. 송 문제 집권 당시, 문벌 출신들의 귀족이 주요 직에 진출하면서 귀족 우위의 정치적 안정기가 이루어지고, 그 문치의 기풍은 일세를 풍미하게 되었는데, 이것을 '원가의 치'라고 부른다. 문제는 귀족 문화를 옹호하고 문벌귀족을 존중하려는 자세를 취하면서도, 실무형 한문 출신의 능리적 인물을 등용하고 황족을 통해 지방 군권을 장악함으로써 정치적 안정을 지속했다. 하지만 북위가 강성한 세력을 바탕으로 화북지역의 통일을 이룩하고있을 때, 문제가 북벌을 감행했다. 그러나 북벌군은 도처에서 패배하고 오히려 북위의 태무제는 남하하려는 기세를 보였다. 이 때부터 문제가 이룩했던 원가의 정치는 점점 기울어지게 되었다. | ||
− | + | === (3) 송의 쇠퇴 === | |
송 문제가 북벌의 실패 등으로 힘을 잃고 황태자 유소의 의해 살해되자, 유소의 군대를 격파하고 문제의 셋째 아들 유준인 효문제가 즉위한다. 효문제는 황제 중심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급진적인 중앙집권 정책을 펼쳤다. 또한 재고라는 황제의 사적 금고를 만들어 특별과세를 하고 지방 장관의 헌납을 받았다. 이로 인해 지방 장관들은 그 아래에 있는 농민들을 수탈하면서 백성들은 조세 이외의 부담이 심각해졌고, 생활이 피폐해졌으며 나아가 지방 관아의 정상적인 운영을 방해하였다. 효문제에 이어 효무제가 즉위하여 사적 재정을 확보하면서 직접적으로 국가 재정을 장악하려고 시도하면서 발생한 백성들에 대한 횡포는 사회의 반발을 일으켰다. | 송 문제가 북벌의 실패 등으로 힘을 잃고 황태자 유소의 의해 살해되자, 유소의 군대를 격파하고 문제의 셋째 아들 유준인 효문제가 즉위한다. 효문제는 황제 중심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급진적인 중앙집권 정책을 펼쳤다. 또한 재고라는 황제의 사적 금고를 만들어 특별과세를 하고 지방 장관의 헌납을 받았다. 이로 인해 지방 장관들은 그 아래에 있는 농민들을 수탈하면서 백성들은 조세 이외의 부담이 심각해졌고, 생활이 피폐해졌으며 나아가 지방 관아의 정상적인 운영을 방해하였다. 효문제에 이어 효무제가 즉위하여 사적 재정을 확보하면서 직접적으로 국가 재정을 장악하려고 시도하면서 발생한 백성들에 대한 횡포는 사회의 반발을 일으켰다. | ||
송 시대는 문벌귀족 중심의 사회로, 한문 서민 출신은 능력이 있다 하더라도 고위직에 오르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이것을 바탕으로 문벌귀족은 고위 고관을 차지하면서 정작 정치 실무에는 무관심했으며 황제권한 또한 제한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문 한인 출신 관료들은 남조 문벌 체제에서 배척당하고 소외당했으며 이 체제를 타파하기를 염원했다. 이 때 효무제의 셋째 아들인 유자훈이 반란을 일으키면서 문벌귀족사회를 타파하려는 지방 호족들과 한인들이 참여했고, 이 반란은 전국적으로 확대되었다. 하지만 결국 이 반란은 명제 유욱에 의해 평정되었고, 그가 정권을 장악했다. 그는 효무제의 아들들을 모조리 살해했으며, 그 이후에도 수많은 귀족들과 정권을 잡은 황제가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피비린내 나는 살육을 펼치면서 마지막 황제인 순제 때, 제나라의 소도성에 의해 송은 망하게 된다. | 송 시대는 문벌귀족 중심의 사회로, 한문 서민 출신은 능력이 있다 하더라도 고위직에 오르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이것을 바탕으로 문벌귀족은 고위 고관을 차지하면서 정작 정치 실무에는 무관심했으며 황제권한 또한 제한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문 한인 출신 관료들은 남조 문벌 체제에서 배척당하고 소외당했으며 이 체제를 타파하기를 염원했다. 이 때 효무제의 셋째 아들인 유자훈이 반란을 일으키면서 문벌귀족사회를 타파하려는 지방 호족들과 한인들이 참여했고, 이 반란은 전국적으로 확대되었다. 하지만 결국 이 반란은 명제 유욱에 의해 평정되었고, 그가 정권을 장악했다. 그는 효무제의 아들들을 모조리 살해했으며, 그 이후에도 수많은 귀족들과 정권을 잡은 황제가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피비린내 나는 살육을 펼치면서 마지막 황제인 순제 때, 제나라의 소도성에 의해 송은 망하게 된다. |
2016년 5월 10일 (화) 22:47 판
남조의 시작, 송
(1) 송 무제
동진사회가 정치적 혼란과 사회적 혼란으로 인해 막을 내리자 군인 출신이었던 유유는 무력을 기반으로 자신이 황제가 되어 송을 건국한다. 이렇게 하여 북의 북위와 남의 송이 서로 대치하는 남북조시대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송 무제 유유는 중앙 재정을 확립하고 중앙 권력을 강화하려는 정책을 펼쳤다. 먼저 유유는 북쪽에서 남하한 유우민들을 포함하여 모든 주민을 현재 거주하는 지역의 호적에 등록시키는 토단정책을 시행하였다. 이는 동진 시대에 호적의 문란과 불공평한 세역의 폐단이 국가 재정과 정치, 사회적으로도 영향을 끼친 것을 시정하기 위한 정책이었다. 이로써 왕조의 세수가 증가하고 북쪽에서 온 유우민도 강남의 주민이 되는 결과를 가져와 중앙권력의 강화에 도움이 되었지만, 그 시행이 철저하지는 못해 큰 도움이 되지는 못했다. 유유는 또한 군부의 지배권을 귀족의 손에서 황제를 정점으로 하는 황족이나 무인들에게 옮겨, 결과적으로 귀족이 군사 지배권을 상실하게 됨으로써 황제의 권력을 강화하고자 노력했다.
(2) 송 문제, 원가의 치를 이루다.
송무제 유유가 창업 3년만에 죽고, 송 문제 유의융이 집권했다. 송 문제 집권 당시, 문벌 출신들의 귀족이 주요 직에 진출하면서 귀족 우위의 정치적 안정기가 이루어지고, 그 문치의 기풍은 일세를 풍미하게 되었는데, 이것을 '원가의 치'라고 부른다. 문제는 귀족 문화를 옹호하고 문벌귀족을 존중하려는 자세를 취하면서도, 실무형 한문 출신의 능리적 인물을 등용하고 황족을 통해 지방 군권을 장악함으로써 정치적 안정을 지속했다. 하지만 북위가 강성한 세력을 바탕으로 화북지역의 통일을 이룩하고있을 때, 문제가 북벌을 감행했다. 그러나 북벌군은 도처에서 패배하고 오히려 북위의 태무제는 남하하려는 기세를 보였다. 이 때부터 문제가 이룩했던 원가의 정치는 점점 기울어지게 되었다.
(3) 송의 쇠퇴
송 문제가 북벌의 실패 등으로 힘을 잃고 황태자 유소의 의해 살해되자, 유소의 군대를 격파하고 문제의 셋째 아들 유준인 효문제가 즉위한다. 효문제는 황제 중심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급진적인 중앙집권 정책을 펼쳤다. 또한 재고라는 황제의 사적 금고를 만들어 특별과세를 하고 지방 장관의 헌납을 받았다. 이로 인해 지방 장관들은 그 아래에 있는 농민들을 수탈하면서 백성들은 조세 이외의 부담이 심각해졌고, 생활이 피폐해졌으며 나아가 지방 관아의 정상적인 운영을 방해하였다. 효문제에 이어 효무제가 즉위하여 사적 재정을 확보하면서 직접적으로 국가 재정을 장악하려고 시도하면서 발생한 백성들에 대한 횡포는 사회의 반발을 일으켰다. 송 시대는 문벌귀족 중심의 사회로, 한문 서민 출신은 능력이 있다 하더라도 고위직에 오르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이것을 바탕으로 문벌귀족은 고위 고관을 차지하면서 정작 정치 실무에는 무관심했으며 황제권한 또한 제한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문 한인 출신 관료들은 남조 문벌 체제에서 배척당하고 소외당했으며 이 체제를 타파하기를 염원했다. 이 때 효무제의 셋째 아들인 유자훈이 반란을 일으키면서 문벌귀족사회를 타파하려는 지방 호족들과 한인들이 참여했고, 이 반란은 전국적으로 확대되었다. 하지만 결국 이 반란은 명제 유욱에 의해 평정되었고, 그가 정권을 장악했다. 그는 효무제의 아들들을 모조리 살해했으며, 그 이후에도 수많은 귀족들과 정권을 잡은 황제가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피비린내 나는 살육을 펼치면서 마지막 황제인 순제 때, 제나라의 소도성에 의해 송은 망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