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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원의 서부에 위치해 있어서 중원 사람들에게 야만인의 취급을 당했으나 기마민족들의 기마전술과 철기를 다루는 법을 일찍이 받아들여 통일의 기초를 다졌다. 하지만 진시황의 사후, 2세 황제에 이르러 각지에 반란이 일어나고 다음의 왕인 진왕 자영에 이르러 항우에 의해 멸망하게 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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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진나라는 BC221년 진시황에 의해 혼란스러운 춘추전국시대를 통일한다. 진시황은 중국에 한민족을 주체로 한 중앙 집권적인 통일 국가를 처음으로 성립시킨 셈이다. 진나라의 시황제는 황제(皇帝)라는 단어를 세계 최초로 만들어서 사용하였고, 왕이 죽은 뒤에 칭하는 시호를 폐지하고 자신을 시황제(始皇帝)로 하여 그 뒤는 이세, 삼세 황제로 부르게 하였다. 황제들만 사용할 수 있는 1인칭 단어인 짐(朕)이라는 단어도 만들어 내었다. | ||
+ | ===중앙 집권 제도의 확립=== | ||
+ | 연,조,제,위,한,초 6개의 국가를 통일한 이후, 어떻게 통일된 전국을 통치할 것인지에 대한 논의가 있었다. 당시 주나라의 모습을 따라 봉건제를 하자는 말이 있었지만 이사는 봉건제도로 전국을 통치하면 주나라 때와 같은 모습이 나타나니 모든 지방을 군과 현으로 편재하여 중앙에서 지방관을 파견하는 군현제를 주장했다. 이에 진시황은 전국을 36개의 군으로 나누고 나눠진 군은 몇 개의 현을 관할하였다. 군의 장관은 군수(郡守), 현의 장관은 현령(縣令)이었으며 이들은 황제가 임명하였다. 이러한 관료제의 확립으로 인해 중앙집권체제를 이루어 내었다. 하지만 당시 군수나 현령으로 임명받은 사람들은 전쟁 때 공을 세운 군인출신이 많았다. 이들은 민정에 익숙하지 못했고 법치에 따라 강압적으로 민중들을 통제했는데, 이는 이후 진나라가 몰락하는 계기가 되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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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춘추전국시대 당시 전국의 국가들은 각기 다른 문자를 쓰고 있었다. 지방마다 다른 글자의 통일은 통일국가에서 중앙집권적인 관료정치를 이루기 위해서는 빠질 수 없는 일이었다. 진시황은 다른 글자를 소전(小篆)과 예서(禮書)로 통일하였다. 소전은 비교적 복잡해서 돌에 새기는 비문이나 공식적인 묘비에서 사용되었고, 예서는 소전에 비해 단순한 형태로 일상생활에서 사용되었다. 진시황으로 인한 문자의 통일이 없었다면 중국의 문자는 다양한 모습의 한자가 지역마다 다르게 나타났을 것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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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5월 11일 (수) 10:12 판
개요
전국시대 전국 칠웅 중의 한 국가. BC221년 진시황에 의해 중국 대륙을 처음으로 통일하였다. 현재 중국의 영어 이름인 China의 어원이 되었다. 중국어의 발음은 Qin. 국가의 색은 검은색으로 황제의 의복과 관리들의 복장, 군복, 국기 등이 검은색이었다.
중원의 서부에 위치해 있어서 중원 사람들에게 야만인의 취급을 당했으나 기마민족들의 기마전술과 철기를 다루는 법을 일찍이 받아들여 통일의 기초를 다졌다. 하지만 진시황의 사후, 2세 황제에 이르러 각지에 반란이 일어나고 다음의 왕인 진왕 자영에 이르러 항우에 의해 멸망하게 된다.
통일 이후의 진나라의 정책
진나라는 BC221년 진시황에 의해 혼란스러운 춘추전국시대를 통일한다. 진시황은 중국에 한민족을 주체로 한 중앙 집권적인 통일 국가를 처음으로 성립시킨 셈이다. 진나라의 시황제는 황제(皇帝)라는 단어를 세계 최초로 만들어서 사용하였고, 왕이 죽은 뒤에 칭하는 시호를 폐지하고 자신을 시황제(始皇帝)로 하여 그 뒤는 이세, 삼세 황제로 부르게 하였다. 황제들만 사용할 수 있는 1인칭 단어인 짐(朕)이라는 단어도 만들어 내었다.
중앙 집권 제도의 확립
연,조,제,위,한,초 6개의 국가를 통일한 이후, 어떻게 통일된 전국을 통치할 것인지에 대한 논의가 있었다. 당시 주나라의 모습을 따라 봉건제를 하자는 말이 있었지만 이사는 봉건제도로 전국을 통치하면 주나라 때와 같은 모습이 나타나니 모든 지방을 군과 현으로 편재하여 중앙에서 지방관을 파견하는 군현제를 주장했다. 이에 진시황은 전국을 36개의 군으로 나누고 나눠진 군은 몇 개의 현을 관할하였다. 군의 장관은 군수(郡守), 현의 장관은 현령(縣令)이었으며 이들은 황제가 임명하였다. 이러한 관료제의 확립으로 인해 중앙집권체제를 이루어 내었다. 하지만 당시 군수나 현령으로 임명받은 사람들은 전쟁 때 공을 세운 군인출신이 많았다. 이들은 민정에 익숙하지 못했고 법치에 따라 강압적으로 민중들을 통제했는데, 이는 이후 진나라가 몰락하는 계기가 되었다.
문자의 통일
춘추전국시대 당시 전국의 국가들은 각기 다른 문자를 쓰고 있었다. 지방마다 다른 글자의 통일은 통일국가에서 중앙집권적인 관료정치를 이루기 위해서는 빠질 수 없는 일이었다. 진시황은 다른 글자를 소전(小篆)과 예서(禮書)로 통일하였다. 소전은 비교적 복잡해서 돌에 새기는 비문이나 공식적인 묘비에서 사용되었고, 예서는 소전에 비해 단순한 형태로 일상생활에서 사용되었다. 진시황으로 인한 문자의 통일이 없었다면 중국의 문자는 다양한 모습의 한자가 지역마다 다르게 나타났을 것이다.
도량형 통일
상앙의 개혁 시기에 진나라 내에서는 표준으로 통일이 되었다. 하지만 각 나라별로 도량형은 통일이 되지 않고 있었다. 당시 중국 국가들의 도로에는 마차의 바퀴자국이 나 있었는데, 다른 국가들의 마차가 넘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 나라별로 도로의 바퀴자국의 간격이 달랐다. 통일 이후 진시황은 마차의 간격을 통일시켜 전국에 걸쳐 도로망을 정비했다. 그리고 물리량을 측정하기 위한 표준단위인 도량형을 모두 일원화 시킨다. 이는 진나라의 경제 활동 발전에 기초가 된다.
사상통일
분서갱유. 사상의 통일. 법가 . 유가의 사람들은 이전의 제도를 근거로 비난을 하였는데. 의약, 점, 농업 이외의 책은 제외하고 모두 몰수해 태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