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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5월 11일 (수) 23:31 기준 최신판
송 이전의 고대 성시는 황궁이 있는 곳 또는 군사 요충지에 지나지 않았다. 정치 중심지로서 짜여진 생활 구역이 있었으며, 그 중심 기능은 늘 '성' 내부에 한정되어 있었다. 전쟁과 안전이란 이유 때문에 성곽은 되어 나성(羅城)과 그에 딸린 자성(子城)이 나타났고, 백성들은 자성의 밖, 나성의 안쪽 구역에서 '방시제(坊市制)'에 따라 살아가고 있었다. 거주를 의미하는 '방'과 무역을 뜻하는 '시'는 엄격하게 분리되어 있었으며, 성시의 상업적 기능과 물류 기능 및 민중의 거주 기능은 여전히 정치와 군사 기능에 부속된 신세였다. 진정한 의미의 성시, 즉 성과 시의 이중적 기능이 동시에 발휘된 것은 송대에 와서였다. <청명상하도>(淸明上下圖)는 번화한 변경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 번화의 핵심은 당나라 장안성 안에 있던 동서 시장의 번화와는 달랐다. 개봉의 성시 전체가 농염한 상업 분위기에 젖어 있었고, 그것은 성시의 진정한 활력소였다. '방시 제도'와 야간 통행 금지인 '소금(宵禁)제도'가 와해된 뒤 성시에서는 백성이 주인공이 되었고, 이렇게 해서 중국의 '시민(市民)'이 생겨났다. 정부는 성시를 '개봉부-도상(都廂)-상(廂)-방(坊)'으로 이루어진 네 단계의 구조로 나누어 관리했는데, 이는 오늘날의 '시-구-가도-거주 구역'에 해당한다.
출저 :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중국사 강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