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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당고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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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당고사건==
 
==1차 당고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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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한 말에 탁류파와 청류파의 대립이 발생했다. 중앙에서 청류파의 세론을 대표한 것은 태학생(太學生)이었다. 무제 때에 50명으로 시작한 태학생은 전한 말에 1천 명으로 증원되었고, 후한 질제 무렵에는 3만 명을 넘었다, 이 태학생과 지식인들이 연합하여 정치적 개혁을 요구하였으며, 당시 집권하고 있던 세력이 환관이었기 때문에 외척과 호족들도 태학생과 지식인들을 지원하였다. 태학생들은 태위(太尉) 진번(陳蕃)과 사예교위(司隷校尉) 이응(李膺)등을 영수로 했고, 환관에 반대하던 외척 두무(竇武)도 이들과 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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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관 측은 이응 등이 학생들과 함께 조정을 비난하고 풍속을 어지럽힌다는 이유로, 166년에 이응과 지지자 2백여 명을 체포했고 당파를 결성했다는 이유로 투옥했다. 다음 해 그들은 향리로 돌아와 종신 금고형에 쳐해졌는데, 이것이 제 1차 당고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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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당고사건==
 
==2차 당고사건==

2016년 5월 14일 (토) 22:48 판

1차 당고사건

후한 말에 탁류파와 청류파의 대립이 발생했다. 중앙에서 청류파의 세론을 대표한 것은 태학생(太學生)이었다. 무제 때에 50명으로 시작한 태학생은 전한 말에 1천 명으로 증원되었고, 후한 질제 무렵에는 3만 명을 넘었다, 이 태학생과 지식인들이 연합하여 정치적 개혁을 요구하였으며, 당시 집권하고 있던 세력이 환관이었기 때문에 외척과 호족들도 태학생과 지식인들을 지원하였다. 태학생들은 태위(太尉) 진번(陳蕃)과 사예교위(司隷校尉) 이응(李膺)등을 영수로 했고, 환관에 반대하던 외척 두무(竇武)도 이들과 통했다. 
환관 측은 이응 등이 학생들과 함께 조정을 비난하고 풍속을 어지럽힌다는 이유로, 166년에 이응과 지지자 2백여 명을 체포했고 당파를 결성했다는 이유로 투옥했다. 다음 해 그들은 향리로 돌아와 종신 금고형에 쳐해졌는데, 이것이 제 1차 당고사건이다.

2차 당고사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