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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무제는 중국 역사상 처음으로 연호를 제정하였다. 이전까지 중국에는 연호가 없고 즉위년을 기준으로 연대를 계산하였다. [[諸侯]]國도 자신의 즉위년을 기준으로 연대를 계산할 수 있었다. 연호를 제정해 사용하는 것은 황제의 권위를 높일뿐더러 연호가 한의 권력을 인정하는 주변국가에서도 사용됨으로써 한을 중심으로 하는 문화권을 형성하는 데 공헌하였다.<br>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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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역법의 개정== | ||
+ | 왕조가 바뀌면 역법이 바뀌는 수명개제(受命改制)의 전통에 따라 역법개정은 한 초의 오랜 숙원이었다. 무제는 [[공손홍]], [[사마천]] 과 민간의 治歷者 20여인, 그리고 일부 방사들을 참여시켜 太初歷을 만들었다. (태초력은 태음력과 태양력을 합친 것이다.) 달력을 만드는 것은 황제의 특권이었고, 황제가 내려준 달력을 사용하는 것은 황제의 주권과 통치를 인정하는 것이었다. 한의 주변국은 황제의 달력을 하사받아 사용하였으며, 이것을 정삭(正朔)이라고 하였다. <ref>이춘식, <중국고대사의 전개>, 신서원, 1986, p267-268</re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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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5월 15일 (일) 05:17 판
재위기간 B.C.141-B.C.87
무제는 경제 사후 16세의 나이에 황제로 등극하였다. 54년 동안 황제의 자리에 있으면서 황제를 중심으로 하는 중앙집권적 관료제도를 이루었고 유가사상을 국학으로 채택하여 제국을 통치하는데 이용하였다. 적극적인 군사정책을 펴 흉노를 사북으로 몰아내고 장건을 서역으로 파견하여 실크로드의 길을 열었다. 흉노뿐만 아니라 동, 서, 남의 주변 민족을 정복하여 진시황 이래 가장 넓은 영토를 장악하였다. 무리한 군사 정책으로 문제와 경제의 치세동안 쌓았던 재정이 고갈되어가자 염철전매와 같은 재정정책을 펴기도 하였다.
연호의 제정
무제는 중국 역사상 처음으로 연호를 제정하였다. 이전까지 중국에는 연호가 없고 즉위년을 기준으로 연대를 계산하였다. 諸侯國도 자신의 즉위년을 기준으로 연대를 계산할 수 있었다. 연호를 제정해 사용하는 것은 황제의 권위를 높일뿐더러 연호가 한의 권력을 인정하는 주변국가에서도 사용됨으로써 한을 중심으로 하는 문화권을 형성하는 데 공헌하였다.
역법의 개정
왕조가 바뀌면 역법이 바뀌는 수명개제(受命改制)의 전통에 따라 역법개정은 한 초의 오랜 숙원이었다. 무제는 공손홍, 사마천 과 민간의 治歷者 20여인, 그리고 일부 방사들을 참여시켜 太初歷을 만들었다. (태초력은 태음력과 태양력을 합친 것이다.) 달력을 만드는 것은 황제의 특권이었고, 황제가 내려준 달력을 사용하는 것은 황제의 주권과 통치를 인정하는 것이었다. 한의 주변국은 황제의 달력을 하사받아 사용하였으며, 이것을 정삭(正朔)이라고 하였다. [1]
자사 설치
내조 운영
- ↑ 이춘식, <중국고대사의 전개>, 신서원, 1986, p267-26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