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간신앙"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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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국의 민간신앙은 | + | 중국인들은 종교적 편견없는 합리적인 민족이었으나 영혼이나 신은 어디에나 있으며, 평소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도 실재하는 것이라 생각 해왔다. |
+ | <br>중국의 민간신앙은 유불도가 적절히 융합된 형태의 절충적 형태였다. 초자연세계의 존재들인 민간신앙은 다신교적이다. 민간신앙을 믿는 사람들이 상상하는 영혼의 세계는 인간계의 사회구성을 반영하고 있다. 신, 귀, 조상은 초자연적인 존재의 기본 유형이다.신의 유형은 관료적인 신들과 현자적인 신 등 인식할수 있는 것이과 없는 모든 것에 신이 있었다. 이 신들은 인간의 혼백으로 전능하지는 않았다. 유학자인 주희까지도 인간의 혼백에 대해 논할 정도로 중국사회에 민간신앙에 대한 믿음은 깊었다. | ||
+ | <br>그들은 사후세계를 대비하여 많은 신들에게도 로비를 했다. 장례의식을 행하면 무서운 벌을 피할 수 있다고 믿었다. 늘 실용적인 중국인은 영혼세계에서도 그와 같이 빠져나갈 방법을 찾았던 것 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제사를 지내줄 아들이 필요했다. 아들에겐 그 부모의 혼을 돌보는 것이 절대적인 의무였다. 제사를 지내지 않으면 부모는 귀가 되는 비극을 맞이할 것이다. 제사를 받지 못하던가 비정상적인 죽음을 당하면 귀가 되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어떻게든 제사를 받을 수 있게 하도록 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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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등장배경 === | ||
+ | 민간신앙은 한족이 화북 평원에서 밖으로 뻗어나가면서 만난 무수한 지역 종교의 신과 의식도 흡수했다. 그 이후 수세기 동안 도교와 불교로부터 신학이론과 신들을 받아들이면서 민간신앙의 내용은 더욱 풍부해졌다. | ||
+ | <br>그러나 대략 2세기부터 10세기까지 중국의 민간신앙은 유교와 마찬가지로 불교와 도교의 그늘에 가려 있었다. 이 두 종교는 주기적으로 왕조의 보호를 받으며 서민 사이에서 많은 신자를 끌어들였다. 특히 불교의 영향은 광범위하게 미쳐서 당 왕조 대부분의 시기 중국은 바로 불교국이었고, 사원은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 강력한 힘을 과시하며 중국인의 종교 감정에 심대한 영향을 주었다. | ||
<br> 9세기부터 12세기까지 도교와 불교는 모두 쇠퇴기에 들어갔다. 그후 몽고지배 시기에 원조(元朝)의 황제가 도교의 도사에게 조언을 구하기도 했지만, 종교로서 도교는 서민들을 떠나고 있었다. 불교 역시 활력을 크게 잃었다. 불교의 교파 중에서 철학적인 사색보다도 종교적 수행을 강조하는 두 종파 -선(禪)과 정토(淨土)- 만이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명·청 시대에 와서는 이들마저도 교리 상으로 타락하고 제도적으로 쇠약해졌다. 도교와 불교가 쇠퇴함에 따라 유교와 토착신앙이 힘있게 재기했다. | <br> 9세기부터 12세기까지 도교와 불교는 모두 쇠퇴기에 들어갔다. 그후 몽고지배 시기에 원조(元朝)의 황제가 도교의 도사에게 조언을 구하기도 했지만, 종교로서 도교는 서민들을 떠나고 있었다. 불교 역시 활력을 크게 잃었다. 불교의 교파 중에서 철학적인 사색보다도 종교적 수행을 강조하는 두 종파 -선(禪)과 정토(淨土)- 만이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명·청 시대에 와서는 이들마저도 교리 상으로 타락하고 제도적으로 쇠약해졌다. 도교와 불교가 쇠퇴함에 따라 유교와 토착신앙이 힘있게 재기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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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간신앙 종류 == | == 민간신앙 종류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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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5월 25일 (수) 22:53 판
중국의 민간신앙
중국인들은 종교적 편견없는 합리적인 민족이었으나 영혼이나 신은 어디에나 있으며, 평소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도 실재하는 것이라 생각 해왔다.
중국의 민간신앙은 유불도가 적절히 융합된 형태의 절충적 형태였다. 초자연세계의 존재들인 민간신앙은 다신교적이다. 민간신앙을 믿는 사람들이 상상하는 영혼의 세계는 인간계의 사회구성을 반영하고 있다. 신, 귀, 조상은 초자연적인 존재의 기본 유형이다.신의 유형은 관료적인 신들과 현자적인 신 등 인식할수 있는 것이과 없는 모든 것에 신이 있었다. 이 신들은 인간의 혼백으로 전능하지는 않았다. 유학자인 주희까지도 인간의 혼백에 대해 논할 정도로 중국사회에 민간신앙에 대한 믿음은 깊었다.
그들은 사후세계를 대비하여 많은 신들에게도 로비를 했다. 장례의식을 행하면 무서운 벌을 피할 수 있다고 믿었다. 늘 실용적인 중국인은 영혼세계에서도 그와 같이 빠져나갈 방법을 찾았던 것 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제사를 지내줄 아들이 필요했다. 아들에겐 그 부모의 혼을 돌보는 것이 절대적인 의무였다. 제사를 지내지 않으면 부모는 귀가 되는 비극을 맞이할 것이다. 제사를 받지 못하던가 비정상적인 죽음을 당하면 귀가 되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어떻게든 제사를 받을 수 있게 하도록 했다.
등장배경
민간신앙은 한족이 화북 평원에서 밖으로 뻗어나가면서 만난 무수한 지역 종교의 신과 의식도 흡수했다. 그 이후 수세기 동안 도교와 불교로부터 신학이론과 신들을 받아들이면서 민간신앙의 내용은 더욱 풍부해졌다.
그러나 대략 2세기부터 10세기까지 중국의 민간신앙은 유교와 마찬가지로 불교와 도교의 그늘에 가려 있었다. 이 두 종교는 주기적으로 왕조의 보호를 받으며 서민 사이에서 많은 신자를 끌어들였다. 특히 불교의 영향은 광범위하게 미쳐서 당 왕조 대부분의 시기 중국은 바로 불교국이었고, 사원은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 강력한 힘을 과시하며 중국인의 종교 감정에 심대한 영향을 주었다.
9세기부터 12세기까지 도교와 불교는 모두 쇠퇴기에 들어갔다. 그후 몽고지배 시기에 원조(元朝)의 황제가 도교의 도사에게 조언을 구하기도 했지만, 종교로서 도교는 서민들을 떠나고 있었다. 불교 역시 활력을 크게 잃었다. 불교의 교파 중에서 철학적인 사색보다도 종교적 수행을 강조하는 두 종파 -선(禪)과 정토(淨土)- 만이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명·청 시대에 와서는 이들마저도 교리 상으로 타락하고 제도적으로 쇠약해졌다. 도교와 불교가 쇠퇴함에 따라 유교와 토착신앙이 힘있게 재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