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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6월 21일 (화) 17:57 판
사마천(司馬遷)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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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B.C 145? 하양夏陽 (중국 섬서성 한성漢城) |
사망 |
B.C 91?(추정년도) |
생존시기 | 중국 전한시기(한 무제 시기) |
주요 작품 | 사기(史記) |
관련 활동 | 역사 |
사마천(司馬遷)(B.C. 145? ~ B.C.91?)은 중국 고대 전한(前漢)시기 역사가이다. 그의 작품인 <<사기>>는 중국의 가장 오랜 시대의 장대한 역사기록으로 공자가 <<춘추>>를 저술한 뒤로 오랫동안 어느 누구도 손대지 못하였던 대사업의 결과물로 평가된다. 이의 저자인 사마천은 중국 역사학의 아버지로서의 지위를 인정받게 되었다.
목차
사마천의 집안내력
사마천의 집안내력은 전설 시대부터 몇 천 년에 걸친 가문의 전승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사마천은 그 스스로 몇 천 년에 걸친 가문의 전승을 언급하고 있다.
사마천의 집안이 사마(司馬)씨가 된 이후로 사관의 관장 업무가 조상 대대로 가업으로 자리 잡은 것에 대해 사마천 그 자신도 사관(史官)으로써 상당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음을 엿볼 수 있다.
사마천은 전설 시대 전욱제(顓頊帝)까지 자신의 가문을 소급(遡及)시켰는데 이것은 가문의 유구함을 내세우기 위한 것이다. 이와 함께 사마천은 사마씨 집안에서 배출된 인재들과 집안내력을 스스로 <<사기>>에서 소개하고 있다. *사마천의 집안내력 자세히 보기
생애
소년기~
사마천은 하양(夏陽)에서 출생했다. 다만 그 스스로는 출생지를 하양이라 하지 않고 용문(龍門)이라 하였다. 사마천의 총명함은 훌륭한 가정환경 속에서 더욱 발휘된다. 훌륭한 유년기 교육을 받으면서 10세에 고문을 줄줄 욀 정도가 되었다. 후에 태사령이 된 부친을 따라 장안에서 살게 되면서 배움의 영역이 넓어졌다. 또한 사마천은 동중서(董仲舒)에게 <<춘추>> 및 유가의 학문을 배우고 공안국(孔安國)으로부터 <<고문상서>>를 배웠다. 이 때의 교육은 훗날 사마천이 사기를 완성하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
사마담은 사마천의 장래를 무척 생각했다. 장차 사관을 맡을 관직에 종사하게끔 배양하는 데 주의를 기울인 것이다. 사마담은 <<사기>>를 사마천과 함께 완성하게 되기를 꿈꾸었다.
이후 사마담에 의해 시행된 스무 살 사마천의 여행은 방대한 사회적 지식을 얻게 했고 숨겨진 옛 이야기와 문서들을 찾게 해주었다. 사마천의 시야와 가슴은 넓어졌고 식견과 재능도 성장했고 사마천은 이 긴 여행을 통해 주관적 견해와 의식을 심화시켰다. 이 모든 것이 <<사기>>가 성공할 수 있는 중대한 조건으로 작용했다. *사마천의 여행 자세히 보기
낭중으로 벼슬에 나서다
20세 때 시작한 장도를 끝내고 몇 년 뒤 사마천은 낭중(郎中)이란 벼슬에 임명되어 본격적인 관직 생활에 발을 디딘다. 사마천은 낭중이 된 후 한 무제(武帝)를 모셨다. 낭중으로 입사한 사마천의 관직 생활에서 주목되는 사건은 무제와의 지방 순시였다. 무제는 기원전 113년부터 본격적인 지방 순시에 나서는데 사마천이 이 순시를 수행했다는 것은 사마천에 대한 무제의 신임이 어느 정도였는가를 짐작케 해준다. 사마천은 그 후 한 무제의 거의 모든 순시에 수행하여 민정을 살폈다. 지방 순시에서는 대개 제사 및 신선을 구하는 행위 등 각종 제사가 함께 이뤄졌는데 한 무제의 이런 행위를 함께 수행하며 지켜본 사마천은 훗날 <<사기>>를 저술하면서 「봉선서」라는 편을 따로 마련하여 역대 제왕들의 제사 행위의 실체를 비판적으로 기술하였다.
한편 기원전 112년 무제의 명령을 받고 사마천은 다시 무제를 수행하여 서쪽 지방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민정을 살폈으며 이어 이듬해 한 무제의 명령을 받고 서남이(오늘날의 사천성, 귀주성, 운남성에 해당하는 지역) 지방에 파견되어 실질적으로 지방을 관찰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이로써 민정과 민속을 깊이 이해하고 정보자료까지 파악하였다. 이러한 경험의 확대는 역사 서술에 대한 열정을 확고하게 다지도록 자극했고 사마천의 의식 수준과 현실에 대한 인식은 더욱 확대되고 심화되어간다.
태사령에 임명되다
원봉 3년(B.C. 108)은 사마천의 아버지 사마담이 세상을 뜬 지 3년째 되던 해이다. 원봉 3년 사마천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태사령(太史令)에 임명되었다. 38세의 나이로 태사령이 된 이후 사마천의 생활은 오로지 일뿐이었다. 조정에서의 직무에 충실한 한편, 아버지의 유훈에 따라 역사서 편찬을 위한 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그리고 전과 다름없이 무제를 수행하여 지방을 순시했고 기원전 104년 새로운 역법, 태초력을 개정하기도 했다.
<<무릉증서>>에 따르면 “사마담이 태사승(太史丞)에서 태사령이 되었다.”라는 대목이 있다. 태사승이란 직책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어 정확히 알 수 없지만 태사령 이전 단계로 그 직무는 태사령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으로 추측된다. 최근 연구에 따르면 사마담은 태사승으로 입사했고 그때 사마천의 나이는 일곱이라고 한다.
이릉의 화를 당하다
사마천은 낭중으로 출사하였을 때부터 자기의 일에 충실했다. 전심전력으로 관직의 일에 매진하여 한 무제의 총애를 받기를 추구했기 때문이다. 그런 중에 뜻밖의 일이 터졌다. 이릉의 일이 생긴 것이다. 이 사건으로 사마천은 부형의 참사를 당해 <<사기>> 저술이 중단될 위기에 처했다. 이릉의 화를 당한 것은 사마천의 입장에서 치명적이었다. 무엇보다 그는 지금까지 모든 것을 다시 생각했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고통스러운 고뇌와 선택을 강요받았고 수도 없이 자결을 생각했다. 사마천은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수치와 고통을 극복하고 인간과 제도와 세상과 역사에 대한 균형감을 체득했다. 이런 경험 이후로 그는 모든 사실을 근거 위에서 검토하며 부당한 권력을 비판하고 약자를 옹호했다. 칭찬받을 것은 칭찬했고 비난받아 마땅하면 비난했다. '이릉의 화'는 사마천의 인생을 바꾸고 <<사기>>의 서술 방향을 근본적으로 바꿔버린 사건이었다. 이로써 <<사기>>는 지배자의 역사서에서 민중의 역사서로 거듭났다.
사마천의 죽음
사마천의 죽음(약 B,C. 91? 추정)은 아직까지 논쟁거리로 남겨져 있다. 임안에게 보낸 답장 이후로 그의 행적은 모든 기록에서 사라졌다. 이 때문에 후대 학자들은 그의 탄생 연도 못지않게 열띠게 문제를 제기해왔고 그래서 그의 죽음은 또 하나의 수수께끼로 남았다.
정사 중에는 사마천이 죽은 해와 사인에 대한 기록이 없다. 그래서 많은 연구자들은 사마천이 <<사기>>를 완성한 뒤 별 탈 없이 생을 마쳤기 때문이라고도 말하고 사마천의 죽음이 분명치 않기 때문이라고도 주장한다. 이 때문에 사마천의 죽음과 그 연대에 대한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다.
업적
태초력
기원전 104년 사마천은 공손경(公孫卿), 호수(壺遂) 등과 글을 올려 역법 개정을 건의했다. 무제는 어사대부 아관(兒寬)에게 여러 박사들과 논의하도록 했고 아관(兒寬) 등도 모두 동의하여 구체적인 의견을 제출했다. 이에 무제는 공손경, 호수, 사마천 등에게 한나라 역법을 만드는 일을 논의케 했다.
새로운 역법의 이름은 태초력(太初曆)이었다. 이에 원봉 7년을 태초(太初) 원년(B.C. 104)으로 개원 하였다. 이때부터 시작된 태초력은 2천여 년이 지난 현재까지 줄곧 사용되고 있다.
사기
<<사기(史記)>>는 전설시대인 삼황오제(三皇五帝)부터 한(漢)나라 무제(武帝)에 이르는 3천여 년의 역사를 사마천이 일생에 거쳐 기록한 역사서이다. <보임안서(報任安書)>의 내용으로 보아 사기는 기원전 91년에 거의 완성된 것으로 보인다. 사마천은 사기를 완성시킴으로써 중국 3000년 역사를 한 편에 집중시켜 역사학의 발전에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참고문헌
- 사마천, <<사기열전 3>>, 김영수, 최인욱 역, 신원문화사, 2006 ISBN 978-8935-91351-0
- 양치엔쿤, <<사마천과 사기>>, 장세후 역, 연암서가, 2004, ISBN 978-89-94054-76-6 03990
- 김영수, <<역사의 등불 사마천, 피로 쓴 사기>>, 창해, 2006, ISBN 89-7919-738-1
- 노윤희, <사마천의 생애와 작품연구>, 성균관대학교 석사학위 논문,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