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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보시라이]]는 기존의 사회주의적 가치인 ‘분배’를 강조하며, 이를 바탕으로 한 ‘[[충칭모델]]’을 설계했던 정치가로, 든든한 정치적 출신배경과 가난한 중국 인민들의 호응을 바탕으로 한때 당 내부에서 [[시진핑]]에 버금갈만한 위치에 올랐던 중국 공산당의 차세대 권력자 중 한 명이었다. 하지만 2012년, 중국공산당 18차 [[전국대표대회]]가 열리기 전에 보시라이와 그의 측근은 심각한 비리와 부패를 저지른 혐의로 체포된다. 보시라이의 아버지 보이보가 공산당의 개국공신이라는 점과 그의 튼튼한 정치적 입지 때문인지 최악의 판결은 피할 수 있을 것으로 예측하는 사람들이 많았으나, [[후진타오]] 전 주석에 대한 도청 시도가 발각되는 등 그가 저지른 범죄행위와 비리에 관한 심각성 근거 삼아 무기징역에 처하게 된다. 일각에서는 보시라이가 실각한 근본적인 원인은 그가 저지른 부정부패가 아니라, 과거 [[문화대혁명]] 시기의 선전가와 기치를 장려하였기 때문이라고 본다. 사회주의 시기의 가치를 앞세워 지역 서민의 민심을 얻는 일렬의 행동들이, 보시라이의 정적들에게는 중국 공산당의 지도 체제를 무너뜨리려는 위협적인 시도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라는 것이 이들의 해석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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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부패척결의 대상 범위와 그 숫자가 기타 정권 시절에 비해 매우 증가하였다. [[시진핑]]이 총서기에 취임한 이후 약 2년간 낙마 된 장차관급 고위직 간부의 숫자는 68명으로, 한 해에 34명의 장차관급 간부가 반부패 운동을 계기로 낙마 되었다. [[후진타오]] 시기에 연평균 낙마한 고위급 간부가 2.3명이라는 점과 비교하면, 시진핑 주석이 정권을 잡고 나서 기존 정권과 비교하면 해마다 약 15배 정도의 부정부패 사범들이 검거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 반부패 조사의 범위가 여러 지방과 기관까지 골고루 퍼져있다는 점 역시 후진타오 정권과는 매우 다른 부분이다. 과거 고위 관료에 대한 당 중앙의 반부패 조사는 당정 기관 및 인대, 그리고 [[전국인민정치협상회의]] 인사와 같이 그 범위가 한정돼 있었으나, 시진핑 정부의 반부패 조사는 지방 정부와 국유기업, 해방군, 매체, 대학연구기관 등으로 확대되어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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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 부정부패를 척결하는 데 있어서 끝까지 추궁하며, 척결의 과정에 상한선이 없다는 점이 특징이다. 이전 정권들의 반부패 조사는 대부분 정부(正部)급 이하의 간부들만을 대상으로 진행되었으며 부국(副國) 급 간부가 처벌받는 사례가 극히 드물었던 반면에, 시진핑 정권에서 반부패로 처벌받은 [[저우융캉]], 쉬차이허우, 쑤롱, [[링지화]] 등의 인물들은 모두 부국 급 간부들이었다. 이러한 대규모 그리고 상한선을 두지 않는 반부패 척결운동은 [[장쩌민]]과 [[후진타오]] 정권에서는 일찍이 없었던 일이었다. 특히 과거엔 정치국 [[상무위원]]이 부패 사건에 연루되어도 실제 주변 인물만 조사를 받았으나, 시진핑 정권이 ‘호랑이급 부패 사범’이라 언급한 저우융캉의 경우 전 정치국 상무위원임에도 불구하고, 본인과 본인의 가족 및 측근을 포함한 10여 명의 인원들이 일거에 낙마 되었다. | ||
+ | 시진핑 주석이 총서기가 되고 나서 반부패 운동은 2년 동안 진행되었으며, 2015년도 [[양회]]에서 다시 한 번 주요 안건으로 선정되면서 더 탄력을 받아 이어나가고 있다. 이러한 고강도 반부패 운동과 고위간부의 낙마 사태는 적어도 [[시진핑]] 집권 전반기(2017년)까지 이어나갈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전망한다. |
2016년 6월 22일 (수) 16:03 판
개요
부정부패에 대한 중국 공산당의 척결 의지는 일찍이 90년대 장쩌민 정권부터 존재하였다. 장쩌민 정부는 부패척결을 사회주의 건설에서 가장 필수적으로 달성돼야 할 과업 중 하나로 삼았으며, 그 본보기로 1998년에 베이징시 당서기이자 정치국 위원 천시퉁이 부정부패의 죄로 16년형을 선고받기도 하였다. 이러한 고위층 간부의 부정부패 사건을 경험하면서, 중국 공산당의 중앙기율검사위는 부패안건을 전문적으로 전담하는 ‘반부패공작조율 소조’를 2002년도에 조직하게 된다.
이렇듯 부정부패 척결에 관한 움직임은 90년대부터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지만, 본 항목이 포괄하는 반부패 운동의 범위는 2012년, 전 충칭시위원회 서기 보시라이가 부정부패와 도덕적 타락을 원인으로 몰락한 시점부터 시진핑 주석이 정권을 잡으면서 반부패 정책이 가속화되었던 2015년도까지의 시기를 뜻한다.
2010년대 '반부패 정책'의 전개
보시라이는 기존의 사회주의적 가치인 ‘분배’를 강조하며, 이를 바탕으로 한 ‘충칭모델’을 설계했던 정치가로, 든든한 정치적 출신배경과 가난한 중국 인민들의 호응을 바탕으로 한때 당 내부에서 시진핑에 버금갈만한 위치에 올랐던 중국 공산당의 차세대 권력자 중 한 명이었다. 하지만 2012년, 중국공산당 18차 전국대표대회가 열리기 전에 보시라이와 그의 측근은 심각한 비리와 부패를 저지른 혐의로 체포된다. 보시라이의 아버지 보이보가 공산당의 개국공신이라는 점과 그의 튼튼한 정치적 입지 때문인지 최악의 판결은 피할 수 있을 것으로 예측하는 사람들이 많았으나, 후진타오 전 주석에 대한 도청 시도가 발각되는 등 그가 저지른 범죄행위와 비리에 관한 심각성 근거 삼아 무기징역에 처하게 된다. 일각에서는 보시라이가 실각한 근본적인 원인은 그가 저지른 부정부패가 아니라, 과거 문화대혁명 시기의 선전가와 기치를 장려하였기 때문이라고 본다. 사회주의 시기의 가치를 앞세워 지역 서민의 민심을 얻는 일렬의 행동들이, 보시라이의 정적들에게는 중국 공산당의 지도 체제를 무너뜨리려는 위협적인 시도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라는 것이 이들의 해석이다.
실각에 관한 실질적인 원인이 무엇이든 간에 보시라이의 실각 그리고 시진핑 주석이 당의 총서기가 된 18대 전국대표대회를 기점으로 중국의 반부패 정책의 움직임은 크게 4가지의 변화를 맞이하게 된다.
1. 부패척결의 대상 범위와 그 숫자가 기타 정권 시절에 비해 매우 증가하였다. 시진핑이 총서기에 취임한 이후 약 2년간 낙마 된 장차관급 고위직 간부의 숫자는 68명으로, 한 해에 34명의 장차관급 간부가 반부패 운동을 계기로 낙마 되었다. 후진타오 시기에 연평균 낙마한 고위급 간부가 2.3명이라는 점과 비교하면, 시진핑 주석이 정권을 잡고 나서 기존 정권과 비교하면 해마다 약 15배 정도의 부정부패 사범들이 검거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 반부패 조사의 범위가 여러 지방과 기관까지 골고루 퍼져있다는 점 역시 후진타오 정권과는 매우 다른 부분이다. 과거 고위 관료에 대한 당 중앙의 반부패 조사는 당정 기관 및 인대, 그리고 전국인민정치협상회의 인사와 같이 그 범위가 한정돼 있었으나, 시진핑 정부의 반부패 조사는 지방 정부와 국유기업, 해방군, 매체, 대학연구기관 등으로 확대되어있다.
2. 부정부패를 척결하는 데 있어서 끝까지 추궁하며, 척결의 과정에 상한선이 없다는 점이 특징이다. 이전 정권들의 반부패 조사는 대부분 정부(正部)급 이하의 간부들만을 대상으로 진행되었으며 부국(副國) 급 간부가 처벌받는 사례가 극히 드물었던 반면에, 시진핑 정권에서 반부패로 처벌받은 저우융캉, 쉬차이허우, 쑤롱, 링지화 등의 인물들은 모두 부국 급 간부들이었다. 이러한 대규모 그리고 상한선을 두지 않는 반부패 척결운동은 장쩌민과 후진타오 정권에서는 일찍이 없었던 일이었다. 특히 과거엔 정치국 상무위원이 부패 사건에 연루되어도 실제 주변 인물만 조사를 받았으나, 시진핑 정권이 ‘호랑이급 부패 사범’이라 언급한 저우융캉의 경우 전 정치국 상무위원임에도 불구하고, 본인과 본인의 가족 및 측근을 포함한 10여 명의 인원들이 일거에 낙마 되었다. 시진핑 주석이 총서기가 되고 나서 반부패 운동은 2년 동안 진행되었으며, 2015년도 양회에서 다시 한 번 주요 안건으로 선정되면서 더 탄력을 받아 이어나가고 있다. 이러한 고강도 반부패 운동과 고위간부의 낙마 사태는 적어도 시진핑 집권 전반기(2017년)까지 이어나갈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전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