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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화제방(百花齊放)이란 온갖 꽃이 만발하여 수많은 학설이 자유롭게 토론하며 발전하는 모습을 말하며, 백가쟁명(百家爭鳴) 또한 수많은 학자나 학파가 자유롭게 자신들의 사상을 내세우는 것을 말한다. 이 말은 중국 역사상 사회적, 정치적으로 가장 혼란스러웠던 춘추전국시대때 등장한 제자백가들이 서로 토론하고 발전해나가는 과정에서 나온 말로써 1950년대 마오쩌둥에 의해서 중국사회에 다시 등장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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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화제방(百花齊放)이란 온갖 꽃이 만발하여 수많은 학설이 자유롭게 토론하며 발전하는 모습을 말하며, 백가쟁명(百家爭鳴) 또한 수많은 학자나 학파가 자유롭게 자신들의 사상을 내세우는 것을 말한다. 이 말은 중국 역사상 사회적, 정치적으로 가장 혼란스러웠던 춘추전국시대때 등장한 제자백가들이 서로 토론하고 발전해나가는 과정에서 나온 말로써 1950년대 [[마오쩌둥]]에 의해서 중국사회에 다시 등장하게 된다.
  
 
==백화운동의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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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화운동의 전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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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한적 자유의 백화운동===
 
===제한적 자유의 백화운동===
1956년 5월 2일 마오쩌둥은 최고국무회의에서 "백화제방, 백가쟁명"을 언급하였다. 사실 마오쩌둥이 "백화제방, 백가쟁명"을 다시 부활시킨 이유는 지식인들에게 사상적, 정치적 자유를 부여하려는 의도보다는 지식인들의 비판을 통해 관료주의로 물든 당의 활력을 회복시키려는데 그 목적이 있었다. 그리고 중앙위원회 선전부장 루딩이(陸定一)는 5월 26일 베이징에서 개최된 연설에서 지식인들에게 독립적인 사고의 자유, 논쟁의 자유, 창작과 비평의 자유, 자기의 의견을 발표·견지·유보할 수 있는 자유를 선언했다. 하지만 그가 제시한 자유는 작품의 사회적·정치적 내용까지 자유롭게 결정할 수 있는 진정한 의미의 자유는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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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6년 5월 2일 마오쩌둥은 최고국무회의에서 "백화제방, 백가쟁명"을 언급하였다. 사실 마오쩌둥이 "백화제방, 백가쟁명"을 다시 부활시킨 이유는 지식인들에게 사상적, 정치적 자유를 부여하려는 의도보다는 지식인들의 비판을 통해 관료주의로 물든 당의 활력을 회복시키려는데 그 목적이 있었다. 그리고 중앙위원회 선전부장 [[루딩이(陸定一)]]는 5월 26일 베이징에서 개최된 연설에서 지식인들에게 독립적인 사고의 자유, 논쟁의 자유, 창작과 비평의 자유, 자기의 의견을 발표·견지·유보할 수 있는 자유를 선언했다. 하지만 그가 제시한 자유는 작품의 사회적·정치적 내용까지 자유롭게 결정할 수 있는 진정한 의미의 자유는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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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지식인들은 마오쩌둥의 입장에서 가장 개조되어야 할 필요가 있는 계층이었다. 그래서 해방직후부터 지식인들은 당의 노선을 따르도록 끊임없는 사상개조를 받았고, 개조되지 않는 지식인들은 신랄한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따라서 비판의 대상이었던 지식인들에게 당을 비판하라는 마오쩌둥의 선언은 지식인들의 마음을 쉽게 열리 없었다. 또한 당 기관과 고위관료는 처음부터 백화운동에 반대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상 업무에서 당 관료들은 지식인들에게 노골적으로 적대감을 표현하였다. 따라서 백화운동 초기의 지식인들의 당 비판은 지식인들의 소극적인 태도 때문에 크게 빛을 발하지 못하였다.
 
사실 지식인들은 마오쩌둥의 입장에서 가장 개조되어야 할 필요가 있는 계층이었다. 그래서 해방직후부터 지식인들은 당의 노선을 따르도록 끊임없는 사상개조를 받았고, 개조되지 않는 지식인들은 신랄한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따라서 비판의 대상이었던 지식인들에게 당을 비판하라는 마오쩌둥의 선언은 지식인들의 마음을 쉽게 열리 없었다. 또한 당 기관과 고위관료는 처음부터 백화운동에 반대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상 업무에서 당 관료들은 지식인들에게 노골적으로 적대감을 표현하였다. 따라서 백화운동 초기의 지식인들의 당 비판은 지식인들의 소극적인 태도 때문에 크게 빛을 발하지 못하였다.

2016년 6월 25일 (토) 00:04 판

백화제방 백가쟁명의 어원

백화제방(百花齊放)이란 온갖 꽃이 만발하여 수많은 학설이 자유롭게 토론하며 발전하는 모습을 말하며, 백가쟁명(百家爭鳴) 또한 수많은 학자나 학파가 자유롭게 자신들의 사상을 내세우는 것을 말한다. 이 말은 중국 역사상 사회적, 정치적으로 가장 혼란스러웠던 춘추전국시대때 등장한 제자백가들이 서로 토론하고 발전해나가는 과정에서 나온 말로써 1950년대 마오쩌둥에 의해서 중국사회에 다시 등장하게 된다.

백화운동의 배경

소련의 기술적 경제적 원조를 기반으로 한 제1차 5개년계획이 성공적으로 진행되면서 중국공산당 지도자들은 중국이 거의 사회주의 국가가 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해가고 있었다. 도시와 농촌 모두에서 사유재산이 폐지되고, 국가에 의한 생산수단의 통제가 이루어진다는 것은 마르크스-레닌주의의 기준으로 볼 때 분명한 사회주의 사회로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사회주의 사회로의 이행 과정은 마오쩌둥의 관점에서 볼 때 여러 가지 문제점들을 안고 있었다. 제1차 5개년계획기간 동안 대규모 공업을 급속히 발전시키고 효율적으로 통제하려면 고도로 전문화된 분업체계가 필요하였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새로운 정치, 경제 엘리트가 출현하게 되었고, 국가와 당 조직구조가 혁명적 조직구조에서 관료적 지배구조로 바뀌게 된 것이다. 즉, 사회로부터 점점 더 멀어지는 관료국가기구의 성장이 마오쩌둥의 입장에서는 진정한 사회주의 국가로의 이행에 반하는 것이었다. 또한 이렇게 보수적이고 관료화 된 당 지도부와 당 기구는 마오쩌둥이 주장한 급진적 사회경제정책에 점점 더 반발하기 시작하였다. 여기서 마오쩌둥은 점점 보수화되고 관료주의로 퇴행하는 당의 혁명 정신을 부활시키는 방법으로 당 외부에서 당을 비판하도록 하였고, 그 임무를 인텔리겐치아인 지식인들에게 맡겼다.

백화운동의 전개

제한적 자유의 백화운동

1956년 5월 2일 마오쩌둥은 최고국무회의에서 "백화제방, 백가쟁명"을 언급하였다. 사실 마오쩌둥이 "백화제방, 백가쟁명"을 다시 부활시킨 이유는 지식인들에게 사상적, 정치적 자유를 부여하려는 의도보다는 지식인들의 비판을 통해 관료주의로 물든 당의 활력을 회복시키려는데 그 목적이 있었다. 그리고 중앙위원회 선전부장 루딩이(陸定一)는 5월 26일 베이징에서 개최된 연설에서 지식인들에게 독립적인 사고의 자유, 논쟁의 자유, 창작과 비평의 자유, 자기의 의견을 발표·견지·유보할 수 있는 자유를 선언했다. 하지만 그가 제시한 자유는 작품의 사회적·정치적 내용까지 자유롭게 결정할 수 있는 진정한 의미의 자유는 아니었다.

지식인

사실 지식인들은 마오쩌둥의 입장에서 가장 개조되어야 할 필요가 있는 계층이었다. 그래서 해방직후부터 지식인들은 당의 노선을 따르도록 끊임없는 사상개조를 받았고, 개조되지 않는 지식인들은 신랄한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따라서 비판의 대상이었던 지식인들에게 당을 비판하라는 마오쩌둥의 선언은 지식인들의 마음을 쉽게 열리 없었다. 또한 당 기관과 고위관료는 처음부터 백화운동에 반대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상 업무에서 당 관료들은 지식인들에게 노골적으로 적대감을 표현하였다. 따라서 백화운동 초기의 지식인들의 당 비판은 지식인들의 소극적인 태도 때문에 크게 빛을 발하지 못하였다.

마오쩌둥의 연설과 백화운동의 확산

마오쩌둥은 1957년 2월 연설에서 이제 더 이상 계급투쟁은 없다고 선언하면서 지식인들에게 보다 적극적인 당에 대한 비판을 촉구하였다. 하지만 정치적으로 이미 적대화 되어 있는 지식인들은 마오쩌둥의 요구에 거의 움직이지 않았고, 이에 마오쩌둥은 중앙위원회에 백화운동을 공식적으로 승인할 것을 촉구하였다. 그리고 당 관료들과 간부들에게 지식인들의 자유로운 의사표시에 간섭하지 말라는 명령이 하달되자 소극적이었던 지식인들의 의사표시는 점점 더 대담해졌고 당과 고위 관료들에 대한 비판의 수위가 더 높아졌다. 처음에는 온건하고 사소했던 비판의 내용들이 나중에는 당원 개개인에 대한 책임추궁 뿐만 아니라 당 제도 까지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대학생들은 더욱 투쟁적으로 그들의 의견을 표시하였다. 학생들은 대학교 사무실을 점거하고, 정부와 당의 건물을 공격하고 또한 당 관료를 인질로 잡았다. 마오쩌둥이 지식인들에게 요구한 것은 사회주의 체제 안에서의 당과 고위 당원들에게 만연해 있는 관료주의의 모습을 비판해달라는 것이지, 당의 체제 자체를 비판하라는 것은 아니었다.

백화운동의 결말 - 반우파투쟁

마오쩌둥이 지식인들에게 요구한 것은 사회주의 체제 안에서의 당과 고위 당원들에게 만연해 있는 관료주의의 모습을 비판해달라는 것이지, 당의 체제 자체를 비판하라는 것은 아니었다. 결국 1957년 6월 8일 『인민일보』에서 지식인들의 신랄한 비판을 듣고 있던 당 기관은 사회주의 체제 자체를 비판한 지식인들을 ‘우파’로 규정하면서 ‘우파’가 사회주의와 공산당을 공격하기 위해 자유를 남용하고 있다고 선포하였다. 마오쩌둥도 “향화와 독초”를 구별할 필요성을 강조하는 글을 게재하며 백화운동의 종말과 함께 우파 척결을 위한 반우파투쟁의 시작을 예고하였다.

백화운동을 바라보는 관점

마오쩌둥은 “백화제방, 백가쟁명”이라는 구호 아래 지식인들을 비판의 장에 끌어들였다. 하지만 결국 마오쩌둥은 자신이 끌어들인 지식인들을 ‘우파’로 규정하며 오히려 그들을 다시 비판하고 탄압하였다. 이 과정을 두고 마오쩌둥이 중국 사회에 남아있는 ‘우파분자’들을 척결하기 위해 일부로 백화운동을 실시하였는지, 아니면 마오쩌둥 본인도 지식인들의 비판의 수위를 예상하지 못하여 결국 백화운동의 종말을 고하였는지의 마오쩌둥의 의도에 대한 관점이 있다. 하지만 마오쩌둥이 어떤 의도를 가지고 있었는지는 아직 정확하게 밝혀진 것이 없고 또한 확인하기 매우 어려운 문제로 남아있다.

참고문헌

모리스 마이스너, "마오의 중국과 그 이후1" , 『이산』, 2010 리 즈수이, "모택동의 사생활1" , 『고려원』, 1995 해리슨 E 솔즈베리, “새로운 황제들”, 『다섯수레』, 1993 송한용, "지식인 저항운동으로서의 鳴放運動" , 전남대학교 5.18연구소 , 특집논문 , 200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