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산혁명
날짜 | 2014.09.27~2014.12.15 |
장소 | 홍콩 |
원인 | 2014년 홍콩 선거 개혁 |
목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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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세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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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개요
2014년 9월 27일을 기점으로 시작된 홍콩의 민주화 운동이자 시민 불복종 운동이다. 2014년 8월 중국 전국인민대표대회가 발표한 2017년 홍콩행정장관 선거계획에 대한 홍콩 시민들의 반발이 그 시발점이다.
초기에는 홍콩사회 지식인 계층과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으나 후에 중, 고등학생들과 일반 시민들까지 참여하여 홍콩 사회의 전체적인 시위로 확대되었다. 시위 과정에서 홍콩 경찰들이 최루탄과 살수액으로 시위에 나선 시민들을 진압하려 하였으나,
시민들이 지참하고 나온 우산으로 이를 막아내는 모습이 매스컴에 의해 조명되면서 '우산 혁명(Umbrella Revolution)'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우산혁명의 배경
1984년 덩샤오핑은 마가렛 대처 전 영국 총리와 홍콩 반환 문제에 관한 논의의 결과로 하나의 국가적 테두리 안에서 두 가지 체제를 인정하는 일국양제를 제안한다. 홍콩이 중국에 반환된 1997년을 기점으로 적어도 50년 동안은 본토와는 다른 별개의 체제를 인정하겠다는 것이 일국양제(一國兩制)의 기본 골자였다. 반환 초기, 중국 공산당은 홍콩의 자치권을 어느 정도 보장해주는 자세를 취했으나 서서히 친중파를 홍콩에 심으면서 내정간섭을 시도하였다.
중국 공산당의 홍콩에 대한 내정간섭은 <홍콩 기본법 제45조>를 통해 더욱 쉬워졌는데, 이는 홍콩의 실질적인 수반인 행정장관을 선거인단을 통한 간선제를 통해 선출하는 방식으로써 친중파 인사를 심기 매우 편한 구조였다. 홍콩의 야당 세력인 '민주파'는 이러한 비민주적 간선제에 지속적으로 반발하면서 직선제를 요구하였으며, 결과적으로 2017년부터 직접선거를 통한 홍콩의 행정장관선출을 약속받았다.
허나 중국 공산당이 제시한 직선제는 우선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과반수 이상의 지지를 얻은 2~3명의 후보를 선정하고, 홍콩 구민은 이 2~3명의 후보들 가운데 한명을 투표로 뽑아야함으로, 비록 직선제의 탈을 썻으나 결과적으로 친중파 인사를 홍콩 구민들에게 강제할 수 밖에 없는 시스템이었다. 이러한 선거 방식은 홍콩의 방송국 TVB에서 개최하는 미인대회 선발 방식과 상당히 유사하여, 이를 연관지어 중국 공산당의 조삼모사를 풍자하기도 했다.
'미인대회식 직접선거,퍽이나 고맙다'
'일국양제'라는 허울 아래 중국 중앙정부의 꼭두각시가 된다는 것을 직시한 홍콩 구민들은 강하게 반발심을 갖게 되었으며, 이러한 홍콩 사회의 불안과 격정은 우산 혁명을 통해서 분출되게 된다.
주요 혁명 세력
1. 사랑과 평화의 센트럴 점령(讓愛與和平佔領中環): 홍콩대학 법학부 교수 다이야오팅(戴耀廷), 홍콩중문대학 교수 천지앤민(陳健民), 침례회 목사 주야오밍(朱耀明)이 공동대표로 이끌었으며, 월가 점령 시위 구호를 답습하면서 비폭력 평화 시위를 주장하였다.
2. 홍콩 전상학생연회(香港專上學生聯會): 홍콩 최대의 대학생 조직으로 홍콩의 모든 대학이 연합한 대규모 학생 조직.
3. 학민사조(學民思潮): 학생운동가 황즈펑(黃之鋒)이 위원장이며, 학생도 시민의 의무를 다하여 적극적으로 사회 활동에 참여해야 함을 주장하였다. 우산 혁명 이전에도 중국 공산당에게 유리한 편향적 내용을 담고 있는 국민교육 과목 철회 시위를 조직한 적이 있다.
3 단체 모두 우산 혁명의 주요 세력이지만 조직적으로 연계되었다고 보기는 힘들며, 각각의 시민 계층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이루어졌다고 본다.
우산 혁명의 근본적 원인
경제적 수탈이 원인인가?
우산 혁명의 표면적인 원인은 홍콩 구민들의 민주적 선거권 요구로 볼 수 있으나, 일각에선 홍콩으로 유입되는 본토인구가 과잉되면서 자치구의 경제적 여건을 악화시킨 것이 이번 혁명의 주원인이라고 보는 시각도 존재한다. 2003년 사스로 인하여 어려워진 홍콩 경제를 회복시키기 위해 중국 중앙정부는 본토인의 홍콩 여행 규제를 완화했으나 이는 홍콩의 경제적 성장을 촉진함과 동시에 새로운 분열의 씨앗을 심었다.
본토인들이 홍콩에 대거 유입되면서 분유를 포함한 홍콩 사회의 기본적인 물자부족이 심각해졌으며, 본토인으로 인해 홍콩의 노동인구가 과열되면서 실업률 또한 높아질 수 밖에 없었다. 한때 지역 경제의 회복에 도움을 주었던 존재였던 본토인들이 2010년대에 들어서면서 역으로 지역 민생을 피폐하게 만드는 '메뚜기떼'에 비유 당하며 홍콩인들의 멸시를 받고 있다. 즉 '생존의 위협'이라는 근본적인 원인이 정치적인 갈등을 계기로 터져 나오게 되었다는 분석이다.
한가지 예로 똑같은 '일국양제'에 속한 마카오는 중국에 반환되면서 본토인들의 유입을 계기로 2000년대에 미국의 라스베가스를 제치고 세계적인 카지노 도시로 성장하였다. 2015년 중국 중앙정부의 반부패 정책으로 본토인의 유입이 줄어들었을 때 마카오의 카지노 수입이 눈에 띄게 하락하였는데, 이는 마카오 경제의 80%를 카지노 산업이 떠받치고 있으며 그 카지노 산업의 성행을 유지하는 가장 큰 원동력 중 하나가 바로 본토에서 유입되는 중국인들이기 때문이다. 홍콩과 달리 마카오 자치구가 중국 중앙정부와 별다른 마찰이 없는 이유는 이러한 경제적 혜택이 하나의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분리주의 혹은 반 본토 현상인가?
중국 본토인들에 대한 홍콩인들의 두려움과 적개심은 이미 97년 반환 당시부터 존재하고 있었다. 정치적으로는 중국 공산당이 홍콩의 민주주의 역사를 종식하고 공산주의로 물들일 것이라는 불안감과 경제적으로는 가난하고 시민의식이 낮은 본토 중국인들이 대거 유입되어 홍콩사회를 몰락시킬 것이라는 두려움이 공존하고 있었다. 이러한 반중 정서는 반환 당시 적잖은 홍콩인들이 캐나다를 포함한 서방국가로 도피하게끔 만든 계기가 되었다.
2000년대 사스(SARS) 창궐 이후, 본토인들의 홍콩 유입은 본격적으로 늘어나기 시작하였다. 이에 따라 본토인들의 무분별하게 생필품을 쓸어가면서 지역 민생이 악화되기도 하였으며, 시민의식이 낮은 본토인들이 홍콩 지역에서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는 등 홍콩인들의 반중 정서는 더욱더 심화되었으며, 과거의 영연방기를 꺼내 들고 분리주의를 외칠 정도로 반중 시위가 확산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분리주의와 반중 감정이 홍콩 사회의 지배적인 의견이라 보기엔 지나친 논리적 비약이며, 홍콩 사회가 맹목적으로 중국 본토를 거부하거나 혐오하고 있지는 않다고 보는 시각 역시 존재한다. 2000년도 중반, 사스(SARS)로 어려워진 홍콩 경제를 중국 중앙 정부의 도움으로 해결하면서 중국 정부에 대한 홍콩 사회의 신뢰도 역시 올라갔던 시기도 있었으며, 비록 중국 공산당의 친정부적 교육 정책은 거부하지만, 중국 본토와 본토인들에게 마음을 열고 배우고자 하는 이들의 수가 늘어나기도 하였다. '일국양제'의 프레임 아래에 자주권만 지켜진다면 홍콩인들은 중국을 조국으로 받아들일 의사가 있었다는 것이다.
민주주의에 대한 갈망인가?
홍콩이 국제적으로 가지고 있는 근대적 상징성과는 별개로, 이 지역의 직선제 역사와 그 뿌리는 그다지 깊지 않은 편이다. 영국이 통치하던 대부분의 기간 동안 홍콩 구민들은 본인들의 정부를 직접적으로 선출할 수 있는 권리 없이 지냈으며, 1990년대에 들어서 간신히 입법회(국회)의 일부분만 직선제로 선출하는 것이 가능하였다. 97년 중국 반환을 앞두고 영국 정부는 홍콩의 직선제 의석의 증가 및 선거 연령을 낮추는 개혁을 시도하였으나, 이는 본토 중앙 정부의 반발을 받았으며, 97년도에 홍콩이 중화인민공화국에 반환되면서 유명무실하게 되었다. 따라서 '본래 누리던 정치적 권리를 박탈당했다'는 홍콩인들의 기억과는 달리, 사실상 홍콩 구민들이 진정한 민주와 정치적 자유를 만끽한 기간은 극히 짧았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한 사회의 민주 역사가 꼭 해당 사회 시민들의 민주의식 수준을 나타낸다고 볼 수는 없다. 2013년을 기준으로 홍콩의 언론자유지수는 전 세계 58위이며 이는 같은 아시아권의 민주 국가들인 한국(51위) 그리고 일본(56위)과 큰 격차가 없다. 반면 홍콩사회의 부패인식지수는 전 세계 15위로 한국(46위)이나 일본(16위) 등의 아시아 민주국가들보다 더 높은 정치적 청렴도와 시민의식을 보인다.
기존에 사회정치이슈에 관심이 적었던 홍콩의 젊은 계층들이 2010년을 기점으로 적극적인 움직임을 보이는 것 역시 눈여겨볼 만한 변화이다. 홍콩의 젊은이들은 이미 '2006년도 부두 철거 반대운동'과 '2010년도 국민교육 과목 철회시위'등을 통해 대외적으로 본인들의 민주의식을 표출한 바 있다. 앞서 언급하였다시피, 홍콩 사회가 향유한 민주 역사가 짧다고 해서 홍콩 구민들의 민주의식이 낮은 것은 절대 아니며, 민주주의에 대한 홍콩 구민들의 요구 역시 평가절하할 수는 없을 것이다. 오히려 97년 홍콩 반환 전부터 홍콩 사회에 심겨 있던 민주주의의 DNA가 17년의 세월 동안 복합적인 사회적 문제들과 결합하면서 발아(發芽)하기 시작했다고 볼 수도 있다.
외부의 반응
중화인민공화국
2014년 10월 1일, 시진핑 국가 주석은 '신중국 건국 65주년 기념일'에서 일국양제를 지속해서 지지할 것이라고 언급하였으나, 이는 결국 중앙 정부가 결정한 선거 방식을 홍콩 구민들이 받아들일 것을 요구함과 동시에 서구식 민주주의 도입에 대한 비판 그리고 중국식 사회주의의 통합을 강조하는 것이라 해석된다.
결국 시위 한 달이 지나서 시진핑은 우산 혁명을 반란이라는 단어로 강경하게 대응할 것을 밝혔으나, 실질적으로 중국 중앙 정부가 공식적으로 사태에 개입하지는 못했다. 기존에 티베트와 신장웨이우얼 자치구에 대한시진핑 주석의 일관적인 강경 대응책을 생각해 본다면, 홍콩 사태에 대한 중앙 정부의 무력 대응에 관한 우려도 있었으나, 국제적 도시인 홍콩이 서방 세계에서 가지고 있는 상징성을 생각해본다면 역시 본토에서 실행했던 가혹한 탄압 정책을 그대로 실행하기엔 무리수였을 것이다.
비록 공식적인 개입은 없지만, 시위대에게 폭력을 가하는 단체가 등장하면서 이를 중국 정부가 보낸 요원들이 비밀리에 개입되었다는 추측 및 홍콩정부에 의해 사주받은 삼합회가 개입되었다는 설 등 여러 가지 의혹이 제기되었다. 한편으로 중국 정부는 인스타그램을 포함한 SNS 서비스를 추가로 차단하기도 하였으며, 본토 내부에서 시위에 관련한 외신 보도를 차단하면서 우산 혁명에 관한 여론이 확산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시도를 시행 하였다.
미국, 영국을 포함한 서방국가
미국과 영국은 우산 혁명에 대한 지지를 표명하였으나 중국 외교부장관 왕이(王毅)는 이를 외부의 불필요한 내정간섭이라고 받아쳤다.
9월 15일 영국 주재 중국 대사 류샤오밍은 영국이 홍콩을 통치하는 대부분의 기간 동안 주민선거를 도입하지 않았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영국 측의 우산 혁명에 관한 발언을 '가장 야비한 위선'이라 비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