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민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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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념

농민공이란 "농촌 호적임에도 도시로 들어와 일하며 지방(현지) 혹은 외지에서 비농업에 6개월 이상 노동한 노동자"를 의미한다. 즉, 농민의 신분으로 노동자의 일을 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다. 지방(현지)에서 일하는 농민공은 (本地农民工) 혹은 1세대 농민공이라고 부른다. 1세대 농민공은 1980년대 향진기업에 취업한 농민들이다. 1세대 농민공들은 离土不离乡( 땅을 떠나지만 고향을 떠나지는 않는다)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땅을 떠났기 때문에 농업에 종사하지 않지만 여전히 그 지방에서 일을 하였다. 하지만 1990년대 이르러 농민공들은 离土又离乡(땅도 떠나고 고향도 떠난다) 점차 자신의 고향을 떠나 외지에서 일을 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농민공들을 (外出农民工), 신세대 농민공이라고 부른다.

출현배경

호구등기조례[3](1958년 대약진운동), 농민의 발을 묶다

중국의 계획경제체제에서 중공업을 발전시키는 자금은 주로 농업에 의지하여 적립했고, 도시의 식량은 농촌에서 생산되었으며, 경공업을 발전시키는 원재료는 농촌에서 제공받았다. 이 시기의 "농업은 국민경제의 기초이다."라는 말은 위의 자금, 식량, 원래료의 부담을 농촌에 지게 했다는 말과 같다. 중국은 당시 농업국이었기 때문에 국가 공업화를 달성하려면 이렇게 할 수 밖에 없었다. 이처럼 국민경제의 기초가 흔들리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농민을 농촌을부터 떠나지 못하게 해야했다. 이를 위한 중요한 수단이 바로 호구등기조례였다. 이 호적제도는 농촌호구를 가진 농민은 농촌에 있어야하고, 도시호구를 가진 도시민은 도시에만 있게 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여 자유로운 이동을 막았다. 심지어 타지역의 친척집에서 하룻밤을 지내더라도 반드시 친척집 소재지 공안국 파출소에 가서 등록을 해야했다.

인민공사의 해체, 느슨해진 "철제 울타리"

농촌에서 인민공사의 해체 이후 호별영농제를 통한 가족 단위 농업생산 책임제가 확립되고, 계획경제체제에서 시장경제체제로 바뀌자, 농민과 농촌, 농업에 큰 변화가 생겼다. 이 제도는 농민들의 적극성을 전례없이 고조시켜서 식량 총생산량이 대폭 제고되었다. 향상된 생산력은 잉여노동력을 발생시켰고 농민 모두를 농촌에 묶어둘 필요성 또한 없어지게 해주었다. 인민공사의 해체는 농민들을 비교적 자유롭게 해주었다. 이전에는 집체에 매여서 토지를 떠날 수가 없었다. 그러나 현재 농민들은 계약에 따라 책임지고 경작하는 밭의 일(責任田)을 끝내고 나면 남는 시간을 자유롭게 쓸수 있게 되었다. 현지에서 다른 일에 종사할 수 있고 또 돈을 벌기 위해 고향을 떠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여기서 분명히 해두어야할 부분은 비록 이동이 비교적 자유로워지기는 했지만 호적제도가 완전히 바뀐 것은 아니기 때문에 농민 호적을 가진 사람이 도시에 갔다고 해서 완전한 도시민이 되는 것은 아니다.

개혁개방, 시장화·국제화는 인구 대이동을 야기한다

근대 경제의 성장을 견인하는 것은 제조업을 비롯한 공업등의 비농업이다. 공업화가 진행되는 동안 도시화 수준을 나타내는 도시인구 비율도 상승한다. 잉여 인구가 많고 생산성이나 수입 수준이 낮은 농촌에서 소득 수준이 높은 도시로 노동력이 이동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에 더해 계획경제 시기 이전에도 도농간의 격차는 컸으나 개혁개방 이후 더욱 확대된 격차는 많은 돈을 벌고 싶어하는 농민들이 더욱 도시로 가고 싶게 하는 이유가 되었다. 이와 더불어 중국의 동남연해지역은 비옥한 토지가 많은 반면 중서부 지역은 거칠고 메마른 땅이 많아 자연조건 또한 현저하게 다르고 개혁개방이후 정책적 요인으로 인해 두 지역간의 사회,경제적 불균형은 더 악화되었는데, 연해지역은 비교적 많은 특혜조건을 누렸으며 이를 바탕으로 사회경제 발전이 매우 빠르게 진행되어 지역간의 소득격차를 더욱 확대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도농간 및 동남연해와 중서부지역간 불균형발전 및 소득격차의 확대는 중서부내륙 빈곤지역의 광대한 농촌노동력들이 농업에 종사하려는 적극성에 영향을 미치게 되어 농민공들의 도시유입이 더욱 확대되었다.

신세대농민공

시간이 지나면서 처음 도시로 진입한 1세대 농민공은 점차 농촌으로 되돌아가고 그 자리를 신세대 농민공이 채우게 되었다. 1세대 농민공이 시간이 지나 나이가 들고 기업들은 나이가 든 노동력을 원하지 않게 되면서, 일자리를 구할 수 없는 농민공은 농촌으로 되돌아가게 된다. 또한 1세대 농민공들이 도시에서 일을 할 때에 각종 장벽으로 도시에 융화되지 못하였는데, 취업업종의 제한으로 그들이 취업할 수 있는 업종은 건축업, 환경미화, 방직업 등 작업환경이 열악한 업종으로 한정되어 있었고 이들 업종은 체력과 민첩성을 요하는 분야이기 때문에 기업들은 나이가 많은 농민공의 채용을 꺼리고 젊은 청년노동력을 선호하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세대교체가 진행되었다. 뿐만 아니라 도시와 농촌의 경제적 격차의 지속적인 확대나 대도시를 중심으로 한 도시문화생활의 발달, 신세대 농민공의 도시진입을 지원하는 정책적 요인 등에 의해서도 신세대 농민공의 도시유입이 증가하기도 하였다. 신세대 농민공 성장 시기의 경제적 변화는 민영기업과 외자기업의 발달의 관계가 깊다. 민영기업과 외자기업은 1990년대 중반부터 도시로 몰려드는 농민공을 흡수하였고 2000년 들어 WTO의 가입 등 민영기업과 외자기업 발전에 유리한 조건이 조성되면서 신세대 농민공의 주요 취업지가 되었다. 민영기업은 국유기업과 달리 고용의 유연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필요할 때 수시로 노동자를 채용할 수 있고 또 기업이 어려울 때에는 쉽게 노동자를 해고할 수 있기 때문에 해고 시 도시노동자보다 용이한 농민공을 선호하였다. 민영기업의 성장은 신세대 농민공에게 더 많은 취업기회를 제공하였고 신세대 농민공은 염가의 노동력을 제공하고 기업은 그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함으로써 서로가 공동 발전할 수 있는 배경이 마련된 것이다. 신세대 농민공 대부분이 농업 생산 활동의 경험과 기술이 없다는 것 또한 신세대 농민공 등장의 배경이 된다. 60%의 신세대 농민공은 기본적인 농업생산지식과 기술이 없으며, 그 중 24%는 농업생활의 경험이 전혀 없다. 이로 인해 경제가 침체하여 취업이 어려워지더라도 농촌으로 되돌아가는 경우가 드물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로 많은 노동집약적 기업들은 농민공을 해고하였는데 당시 해고된 농민공의 숫자가 2000만명에 이른다. 이는 전체 농민공 중 거의 10%에 이르는 수치인데 신세대 농민공은 농촌으로 가지 않고 도시에서 배회하였고, 고향으로 돌아간 신세대 농민공들도 얼마 지나지 않아 도시로 되돌아왔다.

농민공이 겪는 문제

농민공의 취업문제

농민공에 대한 취업차별

베이징, 상하이 등의 대도시에서는 농민공에 대한 엄격한 취업 제한이 행해졌다. 노동행정기관에서는 농민공에게 개방하지 않는 업종이나 직종에 관한 명문화된 규정을 내돌렸고 또 각 지방정부는 관내 기업 등의 구인활동에 간접적으로 개입하려고 하였다. 특히 국유기업개혁 과정에서 대량의 실업자가 발생하자 1990년대 후반부에는 비농업 호적 인구들을 보호하려는 취업정책이 많이 시행되었다. 다음 제시된 상하이시의 도표를 보면, 상하이 시민의 화이트칼라 비율이 높아지면서 생긴 블루칼라의 빈자리를 농민공들이 채우고 있는 상황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이 지나치고 노골적이게 되자 많은 비판을 받고 「베이징시외래인원관리조례」와 같은 정책이 2005년 3월 시 인민대표대회에서 폐지되었다. 그러나 도시민을 우선시하는 관행은 대도시를 중심으로 유지되고 있어서 취업경쟁에서 여전히 농민공은 평등한 기회를 제공받지 못하고 있다. 그 결과 농민공들은 자신의 의지와 능력과는 관계없이 선호하지 않는 3D와 같은 직종에 취업하는 경우가 많다.

농민공의 저임금

농민공의 급여는 2003년을 기준으로 크게 상승했다. 그러나 다음 그래프에서 보는 것처럼 도시민 급여 대비 농민공의 급여는 시간이 갈수록 떨어졌다. 만약 농민공이 가지고 있는 인적자본(학교 교육 연수, 현직 근속 연수 등)이 다르다면 양자 간의 임금 격차가 있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그러나 임금격차가 있는 이유를 인적자본에서만 찾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왜냐하면 심지어 국유 대기업조차도 해당 도시의 시민이 농민공보다 임금을 40% 정도 더 받을 수 있도록 제도화 되어있었기 때문이다. 개인의 능력이나 일할 의욕을 불문하고 농민공이란 이유만으로 진입이 불가능한 고임금의 직종이 미리 설정되어 있는 한 양자 간의 임금 격차가 인적자본의 차이에서 기인한다고 말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농민공의 생활과 사회보장 문제

농민공의 생활

농민공은 도시에서 사용되는 단순 노동력에 불과하고, 그들 중에는 보통의 가정생활이 가능하지 않은 자가 많다. 그들은 2000년 이래 기혼자 비율이 상승하고 자녀를 가진 자도 늘고 있다. 그런데 이들은 회사 내에서 집단생활을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동일한 도시에 일자리를 가지고 있는 젊은 부부라도 함께 살지 못하고 어린 자녀나 부모를 모시고 가정을 꾸릴 수 없는 농민공이 대다수이다. 아이들과 같이 생활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문제가 있다. 학교교육 문제뿐만 아니라 공중위생 면에서 농민공의 자녀들이 나쁜 환경에 처해 있기 때문이다. 상하이 시를 예를 들어보면, 도시민의 자녀들 99%가 법정 예방접종을 받고 있지만 농민공의 자녀들은 겨우 65% 정도에 머물고 있다. 이렇게 된 가장 큰 이유는 농민공 부부들의 노동 시간이 너무 길어 자녀들을 돌볼 시간이 없기 때문이다.

농민공에 대한 사회보장

농민공들은 체재지의 호적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그 지역 원주민들이 누리는 실업, 의료, 산재, 연금 등의 사회복지를 누리지 못하고 있다. 2003년 사스(SARS) 소동으로 도시에 살면서도 도시민 호적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농민공들이 시 당국의 관리를 제대로 받지 못하자 그들의 공포가 일거에 표면화되었다. 이 일을 계기로 농민공을 위한 사회보장제도(종합보장제도)가 서둘러 정비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자영업이나 영세한 상업·서비스업에서는 원래 보험료의 징수와 관리가 어렵고, 대규모 기업가운데서도 보험료가 부담스러워 농민공들을 위한 보험 가입을 고의로 기피하는 기업이 많다. 농민공들 또한 적극적으로 보험에 가입할 의사를 가지고 있지 않다. 의료나 산재는 그렇다 치더라도 수십 년 후에나 받을 수 있는 연금을 위해적은 월급에서 보험료를 떼어 납부한다는 것이 매우 부담되기 때문이다. 국가안전생산감독총국에 따르면 매년 70만 명의 노동자가 산재로 상해를 입는데 그중의 대다수가 농민공이라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합보장제도에 가입한 농민공이 얼마 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큰 문제이다.

농민공들은 흔히 이런 이야기를 입에 담는다.

산재로 죽어버리면 그것은 다행이다. 그러나 상해로 그친다면 충분한 보상을 받을 수 없어 결과적으로 가족들에게 커다란 부담을 지우고 평생 빈곤에 빠져버린다.

농민공의 임시부부 문제

형성 배경

호구제도에 따라 신분은 농민이지만 도시로 이주하여 노동하며 살아가는 농민공들은 도시호구 소지자에게만 허용되는 각종 사회적 울타리로부터 배제되어 있다. 미혼 형태의 농민공보다 가정을 이루고 있는 농민공은 그 처지가 더욱 곤란하다. 자녀가 없는 경우 배우자와 함께 도시로 이주해 일자리를 얻어 생활할 수 있으나, 자녀가 있는 경우에는 달라진다. 아이들을 보살피기 위해 노인들에게 맡기기도 하지만, 보통 부부가 떨어져 한 사람은 양육을, 한 사람은 도시로 나가 생계유지를 담당하는 경우가 대다수이다.도시로 이동해 일자리를 얻으면 농촌에 있는 가정에 수입을 가져다 줄 수 있지만, 부부관계는 장기간의 별거로 인해 멀어질 수 밖에 없다. 이로 인해 분리된 부부는 각자 정신적 고독과 적만, 생리적 성욕, 생활방식의 변화로 안정적인 삶에서 점차 멀어진다.

정의

위와 같은 현실에서 등장한 것이 '임시부부(临时夫妻)' 현상이다. 임시부부는 농촌에 근거지를 두고 외지로 나와 일하는 남녀, 혹은 농촌에 남겨진 남녀가 조건이 맞는 또 다른 이성과 파트너를 맺어 생활하는 특수한 결합 형태이다. 이 임시부부의 가장 큰 특징은 법률상 부부관계는 그대로 유지하되, 본래 가정을 깨트리지 않는다는 상호간 협의 하에 서로의 새로운 파트너를 인정해 준다는 것이다. 장기 별거로 인해 혼자가 되는 농민공의 수는 증가하여 임시부부의 수도 자연스럽게 증가하고 있다.

문제점 및 해결방안

임시부부를 맺은 두 구성원은 함께 생활하고, 서로 돌봐주며 감정생활과 성수요의 빈틈을 메운다. 그러다 다시 본래 부부가 결합할 때는 자동적으로 해체한다는 원칙을 규정하고 있으나, 원칙의 준수 여부를 떠나 그 자체가 비윤리적 행동에 가까운 일종의 "회색 결혼"이라는 지적을 받는다. 현실에서의 성적 욕구, 고독, 생활상 불편함이라는 진공지대를 채워줄 수 있으나 윤리도덕에 대양성, 복잡성과 현실성 문제 발생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기형적 사회 현상이기에 그 해결책을 촉구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유동인구 유입지역인 도시는 가정을 단위로 농민들이 이전할 수 있도록 사회적 밑천을 제공하고, 유출지역인 농촌의 하급정부는 최소 부부쌍방이 함께 이주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구체적 해결 방향으로는 먼저, 이주한 농민공의 재결합을 위해서 도시의 공장, 기업은 사택 제공에 있어 최소한 부부한쌍이 생활할 수 있는 조건-침구, 주방, 보안-을 지원해야한다.

농민공의 자녀교육 문제

농민공의 출관기간이 장기화됨에 따라 자녀가 부모와 동행하는 것도 급증했다. 2000년 인구센서스에 의하면 14세 미만의 유동인구가 1980만 명에 달했고 그중 74%가 농업 호적을 가진 자였다. 그중 의무교육을 받아야 할 연령(6~14세)의 아동이 800만 명으로 추계되었다. 그러나 이 많은 수의 아이들 중 제도상의 제약 때문에 공립학교에 들어갈 수 없는 경우가 많다. 이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농민공의 높은 자녀교육열을 바탕으로 농민공 출신의 젊은 교사가 중심이 되어 민공학교를 세웠다. 하지만 교실을 비롯하여 많은 것들이 부족했고 교원 자격을 갖추지 못한 교사도 많았다. 이에 1998년 3월에 국가교육위원회와 공안부는 「유동 아동의 취학에 관한 잠정 변법」법을 제정하여 호적이 없더라도 고향에 보호자가 없는 등의 요건을 충족할 경우 체재지 공립학교에 재적비를 내고 입학할 수 있게 했고 또 필요에 따라 사영 민공학교 설립을 가능하게 했다. 하지만 시행세칙에 따라 여러 대도시의 공립학교 재적비가 농민공의 수입에 비해 고액으로 책정되었고 민공학교의 시설과 교원에 대해서는 엄격한 자격심사가 행해지기도 했다. 이에 따라 일부 장사에 성공한 농민공들은 도시지역의 공립학교에 보낼 수 있었지만 상당수의 농민공들은 자녀를 변변치 못한 민공학교에 보내야만 했다. 하지만 이들 민공학교 중에는 법정요건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곳이 많아 마음을 졸이며 운영되는 곳이 많다.

사회적 갈등

폭스콘 사건

폭스콘 사건

폭스콘 사건이란 대만의 전자기기 기업인 폭스콘(Hon Hai Precision Industry Co. 鴻海精密工業股份有限公司)에서 2010년부터 2013년까지 21명의 20대 농민공들이 연쇄적으로 자살한 사건이다. 애플의 하청업체로 유명한 폭스콘은 눈부신 성장세로 전자기기 위탁생산 업계의 정상에 오른 기업이다. 그러나 2010년 정저우 공장에서 일하던 노동자가 옥상에서 투신자살 한 이후 잇따른 연쇄 자살로 폭스콘의 근무 환경에 대한 문제가 제기되었다.

중국 폭스콘 공장은 매우 긴 노동시간과 높은 노동 강도의 근무 환경에 처해있었다. 노동자들은 한 달에 약 900위안(한화 약 16~17만원)의 저임금을 받고 일 하였으며, 지저분한 기숙사와 음식 등 매우 열악한 대우를 받았다. 자살한 근로자들은 평소 기숙사 룸메이트들과 이야기를 나눌 시간도 거의 없을 정도로 삭막한 환경에서 근로하였다고 한다.

연이은 노동자들의 자살사건 이후 폭스콘 측은 재발 방지 대책으로 노래방을 설치하거나 사내 록밴드 조직 및 심리상담 핫라인을 개설하는 등 몇가지 조치를 취했으나 그다지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고 평가된다. 일정 수준의 임금 인상을 실시하기도 하였지만 중국 농민공들은 여전히 착취적인 노동환경에서 근로하고 있으며, 야근을 하지 않고는 생계를 뒷받침할 수 없는 수준의 돈을 벌고 있다.

2014년 영국의 공영방송인 BBC에서는 위장취업을 통하여 중국 폭스콘 공장의 실상을 전하였다. 취재결과에 따르면 폭스콘 공장에서는 여전히 12시간씩 근무를 하며 졸음과 격무에 시달리고 있으며, 위장취업한 기자가 휴가를 요청하자 계속 거절을 당하며 18일 연속 근무를 하였고 또 다른 기자는 16시간 연속 근무를 하였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폭스콘과 폭스콘의 원청기업인 애플은 근무여건의 열악함을 인지하고 있으며 자체 감사를 통한 고발건에 대해서 조사하고 교육을 통하여 계속 근무여건을 개선하고 있는 중이라고 밝혔지만 노동 착취 행위에 대한 비판을 면할 수는 없었다.

시사점

중국 전문가들은 폭스콘에서 일어난 노동자들의 연쇄 자살을 그 동안 곪아오던 고름이 터진 것이라고 말한다. 대부분의 농민공들은 도시 노동자들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저임금을 받고 열악한 생산 현장에서 일 해왔다. 그러나 최근에는 농민공들이 점차 인식 변화를 겪으며 중국의 낮은 임금, 안정되지 않은 취업구조, 열악한 작업환경과 중국 사회의 부정부패 현상에 불만을 갖게 되었다. 1980년대 이후에 태어난 ‘신세대 농민공’들은 대부분 중등 수준 이상의 교육을 받았으며 공장의 노동조건을 바꾸는데 훨씬 적극적으로 행동한다. 이들은 자신들에게 지급되는 임금과 복지에 비해 더 높은 생산성을 원하는 기업경영자들과 대치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최근 중국 생산 현장에서 노동자들의 집단행동이 빈발하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집단시위

6·6사건(차오저우시 집단시위사건)

광둥성(廣東省) 차오저우시(潮州市) 구강진(古巷鎭)은 중국 위생도자기류 제1의도시이다. 이곳에서 2011년 6월 6일 약 200여명의 시위대가 도로에서 집단시위를 벌였다. 먼저 사건 피해상황을 보면, 15대의 차량이 손상을 입었고 3대의 차량이 파괴되었고 1대의 차량이 화재를 입었다. 18명의 사람이 다쳤는데 그 중에 15명은 외지에서 온 농민공이었으며 3명은 본지 도시민이었다. 이 사건으로 인해 9명이 체포되었으며 이들은 1심에서 2년에서 3년9개월을 선고받았다. 이 사건의 전개과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2011년 6월 1일 쓰촨성(四川省)에서 온 19세 신세대 농민공인 슝한쟝(熊漢江)은 체불된 임금을 받기 위해 자신이 다니는 화이(華意)도자기공장의 사장을 찾아갔다. 슝한쟝이 임금체불을 항의하자 사장은 사람을 시켜 그의 손과 발을 칼로 베어서 큰 상처를 입혔다. 6월 5일 사건의 주동자인 사장을 포함하여 3명이 경찰에 체포되었다. 6월 6일 저녁, 이 소식을 들은 슝한쟝의 친척과 동향인 등 약 200명은 분노하여 구강진의 진(鎭)정부청사 앞에서 관련자의 엄중한 처벌을 주장하며 시위를 벌였고 그 과정 중에 도시민과 충돌이 벌어졌다. 당일 저녁 10시 경찰은 시위대의 해산을 권고하였고 10시30분 시위대는 해산되었다.

6·11사건(증청시 집단시위사건)

배경

광둥성 증청시(增城市)는 성 산하 현급시이며, 광저우시(廣州市)가 관리하는 곳이다. 집단시위사건이 일어난 증청시 신탕진(新塘鎭)은 ‘청바지의 고향(牛仔之鄉)’이라 불리는 곳이다. 매년 8-10억 벌의 청바지를 생산하며, 전 세계 청바지 3벌 중 1벌이 이곳에서 생산된다. 신탕진은 청바지 생산에 필요한 방직, 염색, 직조, 봉제 등의 산업이 클러스터를 형성하고 있으며, 10만 명 이상의 노동자가 관련 산업에 종사하고 있다. 이곳 노동자 대부분이 쓰촨성(四川省), 후난성(湖南省),허난성(河南省) 등지에서 온 농민공이다. 이곳도 다른 발달된 연해지역과 마찬가지로 경제발전과 함께 대량의 농민공이 유입되었다. 농민공이 유입되자 신탕진에는 여러 가지 변화가 출현하였다. 농민공은 대부분 저소득과 저소비의 특징을 보이기 때문에 수요에 따라 각종 저렴한 생활서비스가 출현하였다. 신탕진정부는 재정과 인력의 한계로 늘어나는 상점과 노점상에 대해 제대로 된 관리를 할 수 없었다. 신탕진 당위원회 서기인 류관여우(劉觀祐)에 따르면, 경찰력은 호적인구에 따라 배치되기 때문에 호적인구에 버금가는 농민공이 살고 있는 신탕진은 경찰력이 부족하였다. 특히 사건이 벌어진 신탕진 따둔촌(大敦村)은 호적인구는 7,000여 명인데 비해 외래인구는 7만 명에 이른다. 따라서 치안유지와 공공관리를 위해 부득이 자치방범대를 조직하였다고 밝혔다.

농민공의 증가는 도시의 공공서비스체계에도 적지 않은 타격을 주었다. 농민공이 도시의 도서관, 영화관, 공원 등을 이용하자 도시민들은 농민공의 공공서비스 이용에 불만을 가지게 되었다. 신세대 농민공도 청바지산업이 침체되기 시작하자 해고를 당하는 경우가 빈번하여 생활이 불안정하였다. 게다가 환경보호정책의 강화, 산업정책의 변화로 청바지산업의 미래가 불확실해지자 신세대 농민공은 심리적 압박감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던 가운데 같은 처지의 신세대 농민공이 도시 자치방범대원로부터 부당한 대우와 구타로 사망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1,000여 명의 농민공이 참가하는 집단시위가 발생하게 된 것이다.

사건 전개 과정

6월 10일 21시 쓰촨성에서 온 신세대 농민공 부부(부인은 20세였고 남편은 28세)가 불법으로 거리에서 청바지를 팔다가 자치방범대원에게 적발되었다. 벌금을 두고 자치방범대원과 부부 사이에 몸싸움이 벌어졌고 그 와중에 부인이 땅에 쓰러졌다. 당시 부인은 임산부였다. 목격자에 따르면, 자치방범대원은 노점을 그만두고 떠날 것을 권고하였다고 발표하였으나 누구도 그 소리를 듣지 못했다. 임산부가 쓰러지자 보고 있던 관중들이 동요하기 시작하였고 경찰과 따둔촌 정부 관계자의 화해에도 불구하고 주위에 모인 백여 명의 농민공은 도착한 앰브런스를 막고 거칠게 항의하기 시작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인터넷, 웨이보(微博), QQ 등을 통해 임산부와 남편이 구타로 사망했다는 유언비어가 퍼졌고, 일부 사람들이 돌을 던지고 유리병을 던지며 시위형태로 발전하였다. 시위는 11일 저녁까지 계속되었고 시위대는 1,000여 명으로 불어났다. 6·11사건의 피해상황을 보면, 출동한 경찰에게 돌과 유리병을 던지며 격렬하게 반응하는 가운데 차량과 은행현금지급기 등이 파괴되었고, 몇몇은 따둔파출소에 방화를 하기도 하였다. 목격자에 따르면, 이때 시위에 참여한 사람들 대부분이 20대 농민공이였으며 20-30명이 조직적으로 다니며 시위를 벌였다. 이 사건으로 체포된 사람을 보더라도 신세대 농민공이 대부분이다. 총 체포된 19명 중 1명을 제외한 18명이 외지에서 온 농민공이였다. 이에 정부는 2700명의 무장군인과 장갑차를 투입하여 계엄령을 선포하였으며, 시위를 진압하고 시위 주동자를 체포하였다. 12일 정부관계자는 시위가 진압되었음을 발표하였다.

사건 전개과정 중에 자치방범대의 과도한 농민공 관리가 속속 드러났다. 자치방범대의 조직목적은 외래인구로부터 도시민을 보호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도시민의 보호보다 수익에 더 열을 올리고 있었다. 신탕진은 ‘청바지의 고향’답게 크고 작은 청바지 공장이 만여 개나 있다. 그 중에는 농민공이 경영하는 곳도 있다. 자치방범대는 이들에게 관리비 명목으로 치안비와 위생비 등을 요구하였다. 그리고 따둔촌에서 자동차나 오토바이를 몰려면 광둥성 번호판 외에 따둔촌 번호판을 50위안 주고 또 달아야 한다. 이것도 따둔촌 본지인의 보증이 있어야 가능하다. 자치방범대는 수시로 거리에서 단속을 하여 만약 따둔촌 번호판이 없으면 차량을 압류한다. 차량을 압류당하면 200위안을 지불해야 차량을 돌려받을 수 있다. 몇 년 전 따둔촌에서 청바지 공장을 경영하던 한 농민공의 아들이 따둔촌 번호판이 없는 오토바이를 몰고 가다 치안방범대원에게 발각되었다. 자치방범대원은 몇 개의 도로를 추격하여 그 농민공 아들을 구타로 숨지게 하였다. 소식에 따르면, 40-50만 위안을 보상했다고 전해지나 정확한 결과는 알 수 없다. 자치방범대의 존재는 농민공 입장에서 보면 불만의 대상이었다. 6월 10일 자신과 같은 처지의 신세대 농민공이 그것도 임산부가 자치방범대원과의 몸싸움 과정 중에 쓰러지고 사망했다는 소식은 이들을 자극하기에 충분하였다.

농민공은 어디로 가야 하는가(원톄쥔, <백년의 급진>)

농민공 문제는 본질적으로 농민의 문제이다. 농민공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들이 받고 있는 차별 대우만 신경 써서 그 부분만을 개선하려고 하면, 숲은 보지 못하고 나무만 보는 것과 같다. 원톄쥔도 농민공들이 도시에 와서 받고 있는 차별적인 대우에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는 당장의 차별 문제를 떠나서 농민공들을 도시에 정착시키는 것이 결국 그들을 무산계급으로 만들 뿐이라고 보고 있다. 도시에서 소자산계급이 될 가능성을 현실적으로 매우 낮게 보는 것이다. 그래서 농민공의 도시민화가 농민공들 자신에게도 중국 경제에도 나쁜 일이라고 본다. 중국은 기본적으로 농업 국가이다. 지금은 G2국가로 성장하면서 세계의 공장이라는 별명도 얻었지만 중국은 아직 대다수가 농민인 국가이다. 농민들이 중국에서 가지고 있는 의미는 매우 크다. 우선 그들이 중국을 먹여 살리고 있다는 데 의미가 있다. 중국은 식량을 수입에 의존하지 않는다. 중국은 내적으로 식량문제를 해결할 능력을 가진 국가이다. 또한 농촌은 '세계 경제의 후방 병참기지 역할'을 하고 있다는 데에도 그 의미를 찾을 수가 있다. 예를 들어, 미국 발 금융위기로 인해 세계 경제가 마비되고 세계의 공장인 중국에서 생산되는 엄청난 양의 물품이 수출되지 못하고 있을 때 중국 정부는 수출 상품에 부여하던 13% 세금 혜택을 농민에게 돌렸다. 가전하향(家電下鄕:농촌 주민이 가전제품을 사면 보조금을 주는 제도), 이구환신(以舊換新:중고 가전제품을 새 제품으로 교체할 때 정부가 판매가의 10%를 보조해 주는 제도) 정책을 실시했다. 이런 정책으로 중국은 세계 경제 위기 속에서도 성장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런데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은 어떻게 저 정책들이 성공할 수 있었는가 하는 것이다. 2005년부터 시행된 신농촌 건설 정책으로 농촌에 깔았던 도로·상수도·전화·컴퓨터·인터넷 다섯 통로가 정책의 성공을 도왔다. 농촌이 마비된 수출을 소화할 수 있도록 만드는 인프라가 됐던 것이다. 그가 보는 중국의 도농 이원구조는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심각하게 불합리한 구조가 아니라고 한다. 향촌사회는 산업자본 위기의 연착륙의 매개체라고 한다. 그래서 만약 급진적인 도시화를 지속되어 향촌사회가 파괴된다면, 또 다시 경제 위기가 닥쳤을 때 중국은 더 이상 연착륙을 가능하게 해주는 발판을 찾을 수 없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향촌사회를 지키기 위해서는 방대한 농민층이 소자산가로서 지위를 유지할 수 있어야 한다. 과거 대약진 시기에는 농민들에게 희생을 강요하며 농촌에 남아있으라고 한 것이라면 신농촌건설은 도시에 굳이 나가지 않더라도 그에 상응하는 경제적 자유를 누릴 수 있도록 하여 향촌사회가 파괴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농민들이 농촌에서 언제는 농사를 지을 수 있도록 토지 사유화는 절대로 이루어져서는 안 되며, 성진화(城鎭化) 작업을 통해 농촌과 긴밀히 연계된 진급의 중소도시를 발전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관련 작품

세계

감독 : 지아장커[1]

세계의 명승지 모형으로 가득 찬 베이징의 세계공원에서 댄서로 일하는 따오(자오타오)와 경비로 일하는 연인 따이셩(첸타이셍)이 <세계>의 중심이 되어 그들과 관련을 맺고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함께 펼쳐진다. 이 영화는 여러가지 상징적인 의미를 통해 농민공의 삶을, 특히 그들의 애환을 중심으로, 보여주고 있다.

즐거운 인생

저자 : 쟈핑와[2]

쟈핑와는 파랑새 같은 희망을 찾아 도시로 모여든, 가난하고 갈 곳 없는 사람들이 몸을 누이는 '미완성 숙소'라는 곳을 배경으로 한 이야기를 통해 현대 중국사회가 안고 있는 모순을 예리하게 파헤친다. 화려한 성장 이면에 경제 격차로 인해 일그러진 중국의 뒷모습을 날카롭게 그린 작품이다.

참고문헌

  • 박장재, 「중국 농민공의 발생배경과 그 영향」,中国研究,vol.26,2000,pp.19~25
  • 윤종석, “중국의 농민공과 체제전환 : 사회적 유동과 시민화 사이에서”, 『국제노동브리프』2014, 2월호, pp.100~109
  • 얀샨핑, 『중국의 도시화와 농민공』, 한울 아카데미, 2009
  • 양지성, 『현대중국의 사회계층』, 연암서가, 2013
  • 원톄쥔, 『백년의 급진』, 돌베개, 2013
  • 중앙일보, "중국 농촌은 세계 경제의 후방 병참기지, '거품 조금씩 제거해 시스템 붕괴를 막아야'", 2014, http://blog.joins.com/media/folderlistslide.asp?uid=xiaokang&folder=10&list_id=133697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