쑹칭링(송경령)
쑹칭링(간체:宋慶齡,정체:宋慶齡 송경령)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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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93.1.27 청나라 장쑤성(江苏省) 상하이(上海) |
사망 |
1981.5.29 중화인민공화국 베이징 |
민족 | 한족(汉族) |
별칭 | 인민을 사랑한 여인 |
관련 활동 | 1959 중화인민공화국 부주석 |
개요
중국의 혁명가,정치인. 1930년대 중국의 인권보장 및 국민당 일당독재 비판에 힘썼으며 이후 중화인민공화국 창설에 노력하였다. 이로 얻은 별명이 '중국의 잔다르크', '인민을 사랑한 여인'
생애
송칭링은 1893년 1월 27일, 감리교 목사 출신의 무역업자인 아버지 찰리 쑹, 쑹자수의 3남 3녀 중 차녀로 상하이에서 태어난다.
청나라 광둥 성 광저우에서 잠시 유년기를 보낸 적이 있는 그녀는 아버지의 지원을 받아 1907년 15살에 동생 송미령과 미국 유학을 떠났고, 1913년 미국 조지아 웨슬리언 여자대학교 영문학과를 졸업하고, 그 해 가을 일본으로 건너갔다.
이후 1914년 쑨원의 비서로서 쑨원의 연설문이나 원고를 영어로 번역하는데 노력했다. 비서로 일하며 중국 혁명에 대해 같이 노력하던 중 두 사람은 가까워졌다. 비록 그의 아버지인 찰리 쑹은 쑨원과 친구 사이로 결혼을 반대음에도, 쑹칭링은 뜻을 굽히지 않고 1915년 10월 25일 쑨원과 결혼하였다.
1922년 6월 16일 새벽, 진형명은 손문의 북벌과 혁명에 반대하여 쿠데타를 일으켰다. 송경령은 같이 탈출하기를 제안하는 손문에게 "중국을 위해 나는 없어도 되지만 손문 당신이 없어서는 안된다"고 말하며 손문을 혼자 탈출하게 했다.
이후, 송칭링은 쑨원과 상해에서 공산당원 이대조등 공산당 대표와 레닌파 특사와 수차례 교류하며 수차례 국공합작에 대해 상의했다. 1924년 1월 20일, 몇몇의 공산단원이 참가한 제1 회 전국대표대회가 광저우에서 열렸다. 쑨원이 제정한 “러시아와의 연맹, 공산당과의 연맹, 그리고 부조농공(농민과 공업자를 돕는다)”라는 삼대 정책이 통과되었으며, 이로서 제1 차 국공합작이 실현되었다.
1925년 3월 12일 손중산이 베이징에서 간암으로 서거하기 전, 송경령은 그의 병상을 밤낮없이 지켰다. 손중산 서거 후, 송경령은 계속해서 손중산의 삼대정책을 지켜가고자 했으며, 손중산의 혁명원칙을 지키지 않는 새력과 부단히 투쟁하며, 공산당과 긴밀히 연합하여 북벌을 진행했다.
1926년 1월, 국민당 제2 차 전국대표대회에서 국민당중앙집행위원회 위원에 당선되었다. 하지만 1927년 상반기, 국민당 내 우파세력은 쑨원의 혁명원칙을 배반하고 3대정책에 반대하며, 그 해 4월 12일 공산당원과 애국진보인사를 무참히 학살하였다. 이에 송경령은 매우 분개하며 결연히<《为抗议违反孙中山革命原则和政策的声明(손중산의 혁명원칙과 정책에 반하는 세력에게 항의 성명)》을 발표했다. 또한 이런 국민당에 결별과 잠정적 은퇴를 선언하였다.
1927년 9월 송경령은 모스크바에서 ‘중국 목전의 형세’, ‘부녀와 혁명’,’청년과 혁명’등을 발표하면서 쑨원의 ‘3대정책’을 강조했다. 1928년 독일에서 국제반제대동맹(国际反帝大同盟)을 설립한 뒤 부회장에 선임되었다. 마침내 1932년 12월 18일 상하이에서 채원배, 루쉰, 양행보 등과 함께 중국민권보장동맹을 조직하고 송경령은 주석에 취임한다.
이후, 중국 공산당에 가담하여 1951년부터 부녀 연합회 명예 회장, 1954년 중·소 협회장, 인민 대표 대회 상임 위원회 부회장 등을 역임하고, 1959년 중화인민공화국의 국가 부주석이 되었다. 부인 평화 운동을 추진했으며, 스탈린 평화상을 수상하였다. 대립각을 세웠던 정적 장제스의 부인이 되었던 친동생 쑹메이링과는 죽을 때까지 재회하지 못하였고 백혈병으로 영면한다.
주요 업적
년도 | 작품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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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년 9월 15일 ~ 1959년 4월 18일 |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부위원장 |
1968년 10월 31일 ~ 1972년2월 24일 | 중화인민공화국 주석 대행 |
1976년 1월 17일 ~ 1981년 5월 29일 | 중화인민공화국 주석 대행 |
1975년 1월 17일 ~ 1981년 5월 29일 |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부위원장 |
1981년 5월 16일 ~ 1981년 5월 28일 | 중화인민공화국의 명예주석 |
평가
일반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말하기를 숭칭링은 중화인민공화국의 여성주의자 였다고 한다.
- "송경령은 중국현대사에서 국민당 좌파로서 중국민족의 독입과 해방을 위해 중국인의 민주와 자유를 위해,중국 여성의 해방을 위해 내전을 반대하고 새로운 중국을 건설하기 위해 어깨를 나란히 하고 중국 현명의 무대에서 반세기가 넘게 함께 의지하고 싸우며 노력해온 여성으로 중국인의 가슴속에 빛나는 별처럼 새겨져 있다."[1].라고 평가된다.
- "송경령은 내면의 순수성과 강직성을 지닌 이상주의자로 세속적 권력투쟁의 완중에서 대중편에 서서 혁명원칙을 순수하게 고집해 나간 인물이었다."."[2]. 라고 평가된다.
- "강인한 심지,원칙의견지,주의깊은온화함,높은용기,표면에 나서지 않는 겸손함,두드러진 여성적 아름다움 등이 혼연일체가 되어 매우 보기 드문 품격을 이루었다"."[3].라고 평가된다.
- 그녀는 무엇보다도 자신을 위하여 안일을 구하지 않았으며,자신을 위하여안일을 구하지 않았으며,자신이 선택한 흔들리는 역사의 정점에 서서 그 흐름에 대처하였다."."[4].라고 평가된다.
인물 관련 유적
송경령고거
송경령고거(上海宋庆龄故居,sòng qìng líng gù jū)는 중국의 혁명적 민주주의자 손문(孫文, 쑨원)의 부인이자 정치가였던 송경령(宋慶齡, 쑹칭링)이 살았던 곳으로서 중국 고대 건축예술 및 중국 근현대사 관광지이다. 손문이 죽고 난 뒤 중화인민공화국의 부주석을 지낸 송경령은 베이징으로 이사를 하기 전, 1948년에 이곳으로 왔다. 유백색의 3층 건물로 이루어진 이곳은 1920년대 초기에 지어진 곳으로, 원래는 그리스 선박 주인의 단독 주택이었다가 국민당 정부에 의해 중앙위탁부에서 관리하게 되었다. 훗날 장개석이 이곳을 송경령에게 양도해 주었다. 송경령은 이곳에서 15년간 거주했으며 현재는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곳은 송경령 생전의 생활 모습을 원래 상태로 잘 보존하고 있으며 깨끗한 관리를 위해 내부를 구경할 때에는 관광객들의 신발에 덮개를 묶고 다니게 해 놓았다. br>
인물 관련 작품
년도 | 작품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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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 | 영화 송가황조 《宋家皇朝》 |
참고자료
1) 이양자,『송경령과 하향응손문유지 (孫文遺志) 의 계승과 여성운동을 중심으로』, 중국사학회 <중국사연구>3권, 1998
2) 이양자, 『송경령과 기독교 사상』, 동의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인간과 문화연구 4권,1999 3) 이스라엘 엡스타인,『20세기 중국을빛낸 위대한여성 송경령』,도서출판한울,2000
4) 구성희,『송경령과 송미령의리더십,숙명리더십연구』 1권,2005
각주
외부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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