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자
안자(晏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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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500년 |
안영을 역사책에서는 안자(晏子)라고 부른다. 자는 평중(平仲)이며 춘추시대 제나라 이유(지금의 산동성 밀현) 출신이다. 태어난 해는 알 수 없고, 기원전 500년에 죽었다. 제나라의 명문가 출신으로 아버지 안약(晏弱)이 죽은 뒤 아버지의 직위를 이어 경(卿)이 되어, 영공·장공·경공을 거치면서 관직이 상국(相國, 수상에 해당)에까지 이르렀다. 그는 관중 이후 제나라가 배출한 걸출한 재상의 한 사람으로 무려 57년 동안 제나라를 위해 충성을 다했다.
목차
안자의 생애
제나라가 걸출한 재상
제나라의 명문가 출신으로 아버지 안약(晏弱)이 죽은 뒤 아버지의 직위를 이어 경(卿)이 되어, 영공·장공·경공을 거치면서 관직이 상국(相國, 수상에 해당)에까지 이르렀다. 그는 관중 이후 제나라가 배출한 걸출한 재상의 한 사람으로 무려 57년 동안 제나라를 위해 충성을 다했다. 그의 정치적 입장은 인의(仁義)로 나라를 다스리고 평화로 외교한다는 '인의치국(仁義治國), 화평외교(和平外交)'로 요약될 수 있다. 그는 백성들을 자기 몸처럼 아꼈고, 근검절약 하는 생활에 힘썼다. 박학다식했으며 논쟁에도 능숙했다. 아부를 모르는 강직한 성품으로 늘 국군의 면전에서 어진 정치를 펴고 형벌을 줄이며 세금을 가볍게 하라고 바른 소리를 했다.
뛰어난 정치가·외교가·문학가, 안자
오자서는 오나라에 도착한 이후 공자광(公子光)을 보좌하였다. 광은 원래 왕이 되었어야 되는 사람이었는데, 이복 동생 요에게 왕위를 빼앗긴 상태였다. 오자서는 이 사실을 알고 광의 쿠데타에 협력하여 BC 515년 공자광은 오나라의 왕위를 탈취하여 오왕 합려가 되고 오자서를 재상에 임명했다.
BC 506년 오나라 왕 합려(闔閭, 즉 공자광)는 손무(孫武: ≪손자병법≫의 저자)를 대장, 오자서를 부장으로 삼고 6만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초나라를 공격하였다. 오자서와 손무는 군대를 이끌고 회수(淮水) 유역에서 한수(漢水)로 들어가 5전 전승을 거두고 초나라의 수도 영(郢: 지금의 강릉<江陵>)을 함락시켰다.
이때 초나라는 평왕은 이미 죽고 소왕(昭王)이 왕위에 있었다. 오자서는 직접 초나라 왕실을 점령하여 평왕의 묘를 파헤치고 평왕의 시체를 300번이나 채찍질하여 결국 원한을 갚았다.
사기 오자서열전에 따르면 이 사건으로 예전의 친구였던, 신포서(申包胥)가 오자서의 행동을 지적하며, “일찍이 평왕의 신하로서 왕을 섬겼던 그대가 지금 그 시신을 욕되게 하였으니, 이보다 더 천리(天理)에 어긋난 일이 또 있겠는가?” 하며 너무 가혹하다고 비난했지만, 오자서는 “나의 해는 저물고 갈 길은 머니, 도리에 어긋난 일을 할 수밖에 없었다(吾日莫途遠,吾故倒行而逆施之。)”고 하였다고 한다. ‘날은 저물고 갈 길은 멀다’, 즉 '할 일은 많은데 시간은 없다'는 뜻의 사자성어 일모도원(日暮途遠)은 여기에서 비롯한 것이다. 초나라를 격파한 공으로 그는 신(申: 지금의 황포강<黃浦江> 하류 일대)에 봉해졌으며, 이로 인해 그를 신서(申胥)라고도 한다.
안자의 최후
BC 496년 강대해진 오나라는 패권 야욕으로, 월나라를 치기 위해 군사를 일으키지만, 월왕 구천의 참모 범려와 지혜 대결에서 패하고, 오군은 월나라에 대패하게 된다. 이 때의 상처로 합려는 사망하게 된다. 합려의 뒤를 이어 왕위를 계승한 아들 부차(夫差)는 오자서를 상국(相國)에, 대부 백비(伯噽)를 태재(太宰)에 임명하였다.
2년 후 오나라 왕 부차는 절치부심 끝에 월나라 왕 구천을 부초(夫椒)에서 격파하고 회계산(會稽山)으로 몰아넣었다. 이때 오자서는 지금 구천을 죽이지 않으면 후회할 날이 올 것이라고 부차에게 강력하게 건의하였으나, 부차는 그의 말을 끝내 듣지 않고 구천을 용서해주었다. 당시 월나라에서는 구천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백비에게는 많은 뇌물을 써서 부차를 설득토록 하고, 부차에게는 많은 미인들을 바쳐 그의 환심을 사두었었다.
여기에서 바로 월나라 미인 서시(西施)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오자서는 이러한 월나라의 계책을 간파하고 누차 부차에게 충고를 하였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던 것이다. 오자서는 부차의 무능으로 오나라가 위기에 빠질 것임을 예감하고 제(齊)나라에 사신으로 갔을 때 그의 두 아들을 제나라의 친척 포목(飽牧)과 유명(維明)의 집에 맡겨두고 왔다. BC 484년 부차는 제후의 패주(覇主)를 차지하기 위해 제나라를 공격하였다.
오자서는 다시 그것을 반대하고 월나라가 가장 위험한 적이라고 경고하였지만 그로 인해 오히려 부차의 반감만 사고 말았다. 이때를 틈타 백비 등이 오자서가 제나라와 결탁하였다고 모함하자, 부차는 그들의 참언을 믿고 오자서에게 속루(屬鏤)의 검을 주어 자결을 명했다. 오자서는 자결하기 전에 비분에 찬 어조로 다음과 같이 부차에게 말하였다.
“ "그 옛날 선왕들께는 대대손손 보좌를 해온 훌륭한 신하들이 있었기 때문에 난제에 부딪혀도 그 득실을 잘 헤아려서 큰 위험에 빠지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지금 왕께서는 어진 신하의 충직한 간언을 버리고, 우매한 간신배들을 가까이하여 국정을 전횡하시니, 신하와 백성들은 대왕의 뜻에 따르지 않게 될 것입니다. 이는 바로 대왕을 파멸의 길로 이끄는 원인이 될 것입니다."
” — 오자서열전
그리고는 다시 그의 부하들에게 "내 눈을 도려내어 수도 고소성(姑蘇城: 지금의 강소성 소주) 동문에 걸어두라! 월나라 군대가 입성하는 꼴을 똑똑히 봐 주겠다."고 말하였다. 이 말을 듣고 부차는 크게 분노하며 오자서의 시신을 찢어 전당강(錢塘江)에 던져 버리라고 명했다. BC 473년 마침내 월나라의 공격에 크게 패한 부차는 자결하면서, "오자서를 만날 낯이 없구나!"라고 하면서 죽었다고 한다.≪한서(漢書)≫「예문지(藝文志)」에는 오자서의 병서인 ≪오자서(伍子胥)≫ 10편이 있다고 하였으나 지금 전하지는 않고 있다. 오자서의 고향 임리현(臨利縣)에는 "오상사(伍相祠)"와 "오자서묘(伍子胥廟)", "오자서수부(伍子胥帥府)" 등의 건물을 지어 그의 업적을 기리고 있다.
안자춘추
이야기와 교훈이 내재된, 안자춘추
안자춘추(晏子春秋)는 중국 춘추시대 제나라 안자의 언행을 모아 후세의 사람이 기록하여 편찬한 책으로써, 후세의 사람이 그의 일화를 모아 문답식으로 편찬한 것이다. 현행4부 총간본 등에는 내편 간 상하, 문 상하, 잡 상하의 6편으로 이루어져있으며 외편은 2편으로 되어있다. 모두 여덟편의 215장으로 이루어져있으며 이야기형식의 글이다. 즉 안자춘추는 딱딱한 언어로 이루어진 다른 유가의 경전들과 달리 안자춘추에는 이야기와 교훈이 내재되어 있으며, 주변 사건들에 대한 명쾌한 해결방법이 제시되어 있다. 그 때문에 안자의 사상에 대한 부제를 분류할 때, 질서 유지와 경을 근간으로하는 유가의 반열에 넣기도하고, 검약과 박애를 근본으로 하는 묵가의 반열에 넣기도 한다. 안자의 기발하고 번뜩이는 재치는 그 바탕이 선하고 긍정적인 데다가 인간적이고 나아가 주객 누구도 상처받지 않도록 양쪽 모두를 배려하고 인정한다. 기지와 해학이 또한 가득 담겨 있으며, 드라마처럼 기대하게 될 상쾌한 고전이다.
“ "景公所愛馬死欲誅圉人 晏子諫(경공소애마사욕주어인 안자간) 경공이 아끼던 말이 죽자 그 말 관리자를 죽이려 하자, 안자가 간하다."
” — 안자춘추 내편간상 中
경공이 어인을 시켜 자기의 사랑하는 말을 돌보도록 임무를 맡겼다. 그런데 그 말이 갑자기 병들어 죽고 말았다. 경공은 노하여 칼을 가져와 그 자를 해체 하라고 하였다. 이때 안자가 저지하며 말하길 옛날 요순시대에 사람의 사지를 해체할 때 몸의 어느 부분부터 하였습니까? 경공이 끔찍하다는 듯이 안자에게 말하길 과인이 그런 일을 처음 저지르는 사람이 되겠군요. 드디어 그 일은 철회되고 말았다. 경공은 옥에 가두라는 명령을 하고 안자가 다시 나서서 말하길 말지기는 자신이 지은 죄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죽는 것이니 청컨대 제가 임금을 위해서 따져드리겠습니다. 그리하여 그로 하여금 스스로 그 죄를 알게 한 후에 옥에 가두십시오. 경공이 허락하였다. 안자가 말하길 너의 죄는 세 가지이다. 임금이 너로 하여금 말을 기르도록 명하였는데 너는 이를 죽게하였다. 이것이 첫째 죽을 죄이다. 또 가장 아끼는 말을 죽게 하였으니 두 번째 죽을죄이다. 그리고 임금으로 하여금 그까짓 말 한 마리의 이유로 사람을 죽일 뻔하도록 하게 하였다. 백성들은 이를 듣고 반드시 우리 임금을 원망할 것이며, 제후들이 들으면, 틀림없이 우리 나라를 가벼이 보게 될 것이다. 너 하나가 임금의 말 한 마리를 죽임으로 인하여, 임금으로 하여금 백성에게는 원한이 쌓이고 이웃 나라에게는 나라의 위세가 약해지게 하였으니, 이것이 죽음에 해당하는 세 번째 죄이다. 경공은 위연히 탄식하며 이렇게 말하였다. 선생께서는 풀어주시오! 선생께서는 풀어주시오! 제발 나의 인을 손상시키지 말아주시오! 라며 이야기는 끝이난다.
안자춘추의 저자
『안자춘추』 8권 215장을 저술했다고 전해지고 있으나 사실은 후세 사람이 그의 이름을 빌린 것이고, 대체로 안영과 동시대 사람들이 그의 말과 행동을 기록한 것을 바탕으로 후대에 다시 정리하여 책으로 엮은 것이 아닌가 한다. 하지만 이 책은 안영의 기본 사상을 충분히 반영하고 있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관련 고사성어
귤화위지
동병상련(同病相憐) : ‘같을 동, 병 병, 서로 상, 불쌍할 련.’
'같은 병을 가진 사람끼리 서로를 가엾게 여긴다.'라는 뜻이다. 오자서의 아버지는 간신 비무기(費無忌)의 모함으로 인해 억울하게 죽었는데, 백비 역시 마찬가지로 그렇게 아버지를 잃었기에 자신과 처지가 비슷한 백비에게 오자서는 동정감을 느낀다. 오자서는 초나라를 벗어나 오나라로 도망쳐 온 백비를 합려에게 소개해 대부 벼슬을 받게 한다.
“ “[하상가]라는 노래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같은 병을 앓으니 서로 불쌍히 여기고 같은 걱정이 있으니 서로 구해 주네. 놀라서 나는 새들은 서로 모여서 날아가고 여울 밑의 물도 함께 모여 흐르네.’ 우리는 똑같은 아픔을 가지고 있으니 서로 도와야 합니다.”
” — 오자서曰
갈이천정
굴묘편시(掘墓鞭屍) : ‘팔 굴, 무덤 묘, 채찍 편, 주검 시.’
'무덤을 파헤치고 주검에 채찍질을 하다.' 라는 뜻으로, 통쾌한 복수나 지나친 행동을 일컫는 말이다. 오자서의 아버지와 형은 초나라 평왕에 의해 역적으로 몰려 죽임을 당하게 되었고, 후에 평왕이 죽은 뒤 오자서는 초나라를 찾아가 그의 무덤을 파헤치고 주검을 심하게 훼손시켰다. .≪史記(사기)≫ 伍子胥列傳(오자서열전)에도, “이에 楚平王(초평왕)의 무덤을 파고 그의 시체를 꺼내 삼백 대를 내리친 뒤에야 그만두었다”라고 나와 있다.
이도삼살사
오월동주(吳越同舟) : ‘오나라 오, 월나라 월, 같을 동, 배 주.’
오와 월이 한 배를 타고 있다는 뜻이다. 오와 월은 오랜 원수 사이였지만 한 배에 타고 있는 한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는 서로 운명을 같이 하고 협력하게 된다.
“ “夫吳人與越人 相惡也 當其同舟而濟 遇風 其相救也 如左右手” “무릇 오나라 사람과 월나라 사람은 서로 미워하나, 그들이 같은 배를 타고 강을 건너는 상황에서 풍랑을 만난다면 서로 구제함이 오른손 왼손의 관계와 같을 것이다.”
” — 孫子(손자) 中
심복지환
심복지환 (心腹之患) : ‘마음 심, 배 복, 갈 지, 근심 환.’
‘가슴이나 배에 생긴 병’이란 뜻으로, 쉽게 물리치기 어려운 적 또는 쉽사리 고치기 어려운 고질을 뜻한다. 합려의 아들인 오나라 왕 부차는 월나라로 부터 뇌물을 받은 백비의 말에 따라 제나라를 공격하려 하자, 오자서는 월나라의 속셈에 넘어가지 말라며 부차에게 간언한다. 이때 월나라를 심복지환에 비유하며 빨리 공격해야 함을 주장한다. 하지만 부차는 이 말을 듣지 않았고, 결국 오나라는 월나라에 의해 멸망하게 된다.
“ “제나라를 공격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나 월나라는 우리에게 가슴이나 배에 생긴 병과 같은 존재입니다.(越在我, 心腹之疾也). 왕께서는 제나라를 공격할 것이 아니라 빨리 월나라를 멸하여 후환을 없애야 합니다.”
”
참고자료
1. 사마천 - 사기(史記) 66권 '오자서열전(伍子胥列傳)'
2. 고우영 - 십팔사략(十八史略) 2권 '춘추시대'
3. 공원국 - 통쾌한 반격의 기술 '오자서병법'
4. 조기형 - 한자성어 고전명언구 대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