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갈량
제갈량(諸葛亮) | |
---|---|
| |
출생 |
181년 |
사망 |
234년 |
생존시기 | 삼국시대 |
관련 활동 | 정치 |
목차
개요
제갈량은 유명한 촉한의 전략가이다. 자는 공명(孔明)이고 시호는 충무 또는 무후이다. 낭야군 양도현에서 태어났다. 일찍 부모를 여의고, 자라서 형주의 양양 교외에 있는 융중에 초가를 짓고 청경우독(날이 개면 논밭을 갈고 비가 오면 글을 읽으며) 세월을 보냈다. 207년 유비가 삼고의 예를 갖추어 초빙하자 유비의 군사가 되었고, 208년 적벽대전에서 승리한 유비가 형주를 차지했을 때 군사중랑장으로 임명되었고, 214년 유비가 파촉 땅을 평정했을 때는 군사장군으로, 221년 촉한을 세웠을 때는 승상으로 임명되어 국정을 도맡았고, 유비가 죽은 뒤에는 유언에 따라 황제의 바로 아래 벼슬인 상국을 맡아 2대 유선을 보좌하여 나라를 경영했다. 227년 유선에게 출사표를 바치고 북벌에 나서, 네 차례 관중 땅에 치고 나갔지만, 234년 뜻을 이루지 못하고 오장원의 진중에서 죽었다.
생애
출생
181년 아버지 제갈규와 어머니 장씨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한나라 때 사례교위를 지냈으며 청렴하고 강직하기로 유명했던 제갈풍의 후손이었다. 188년 아버지가 죽자 온가족이 숙부 제갈현에게 의탁했다.
정치적인 측면
제갈량은 유씨의 촉한에 충성하고 성실했으며 몸을 돌보지 않고 죽을 때까지 최선을 다했다. 모든 권력이 그에게 주어져 있었지만 주상을 의심하거나 핍박하지 않았고 부하들을 시기하거나 편애하지 않았으며 자신을 엄격히 단속했다. 솔선수범하여 모든 일을 몸소 직접 행했고, 직언을 허심탄회하게 받아들였으며 부하들에게 부지런히 나의 결함을 치라고 명령했다. 평생토록 청렴하고 소박하게 생활했으며 개인의 부를 쌓는 데 관심이 없었다. 제갈량이 사람들과 함꼐 제정한 한과는 나라의 법도였다. 그는 지위가 아무리 높은 자라 해도 법을 엄하게 집행했으며, 사사로운 정에 얽매이지 않았다. 처벌에는 근거가 있었고, 형량에는 기준이 있었으며, 죄를 뉘우치면 용서해주었다. 또한 능력에 따라 사람들을 임용했으며 자격과 경력, 문벌에 구애받지 않았다. 부유한 귀족이든 천민이든지간에 상관하지 않고 능력에 따라 임용하고 일을 맡겼다. 또한 수하 사람들이 인재를 천거하도록 고무하여 한 시대의 인재들을 모두 다 썼으며 평가를 엄격히 하여 재능있고 우수한 자만 승진시켰다.
경제적인 측면
농사에 힘써 양곡을 많이 생산하도록 하고 농번기를 놓치지 않게 하고 부세를 줄이는 정책을 실시했으며 언관을 두어 언제를 쌓고 관개사업을 주관하게 했다. 사금중랑장이라는 부서를 두어 농기구와 병기 제작을 주관하게 했으며, 사염교위를 두어 소금 생산을 관리하게 했다. 또한 양잠과 비단 짜기를 권장하여 재정 수입을 늘렸고 화폐를 주조하여 물가를 안정시켰다.
군사적인 측면
법으로 군사를 다스려 군사 규율을 엄히 했다. 평상시에도 군사 훈련이 잘되어 있었고 무예가 숙련되어 있었으며 대오가 정연했다. 또한 오기ㅘ 손무의 병법을 발전시켰고 팔진도를 만들어 행군하거나 주둔할 떄 수시로 공격과 방어를 할 수 있게 했다.
외교적인 측면
오나라와 연합하여 조씨의 위나라와 맞섰으며, 시상에서 동맹을 체결하고 적벽을 불살라서 유비를 위험한 상태에서 벗어나 안전하게 만들어주었으며 이후 삼국 정립을 위한 토대를 마련했다. 그는 등지를 세번이나 오나라로 보내어 우호를 다졌으며 형주와 이릉의 채전에서 원기가 꺾였던 촉한의 형세를 안정시키고 변방을 굳게 지켜 백성을 편안하게 살게 했으며 남중의 난을 평정했다. 또한 비위를 여러 차례 오나라로 보내어 손권과 연합하여 조조와 맞서게 함으로써 북벌을 감행할 수 있었다.
민족적인 측면
남중 상류층의 반란을 평정한 후에 화친하고 안무하는 수단을 썼다. 소수민족의 상류층 중에서 촉한에 귀순하려는 자들을 지방관리로 등용했으며 민족의 관습을 존중하고 도움을 주어 소수민족과 촉한이 서로 평안하게 지내게 함으로써 그 지방의 사람과 물자를 나라와 군대에서 쓸 수 있게 했다.
제갈량에 대한 역사가들의 평가
중국의 역사학자 범문란은 중국통사간편에서 "그에게 남은 것은 다만 주관적 노력의 한 방면뿐이었다. 이 방면에서 그의 노력은 그 이상 할 수 없는 경지에 이르렀다."라고 하며 위나라를 멸망시키진 못했지만 제갈량이 최선을 다했다며 옹호하고 있다.
제갈량에 대한 다른 시각
제갈량은 문학적으로 각색되었고 사실 전쟁에서 이기기보다 지기를 자주 했다. 그 유명한 적벽대전도 사실 제갈량이 주도적인 역할을 하지 않았다. 적벽앞에서 제단을 새워놓고 동풍을 빌었다는 것도 사실은 역사적 근거가 없는 허구이다. 제갈량은 유비 생전에 전투에 직접 참여하기보다는 후방에서 주로 보급을 담당했다.
관련 사자성어
강노지말(强弩之末) - 「힘찬 활에서 튕겨나온 화살도 마지막에는 힘이 떨어져 비단(緋緞)조차 구멍을 뚫지 못한다」는 뜻으로,아무리 강(强)한 힘도 마지막에는 결국 쇠퇴(衰退)하고 만다는 의미(意味)이다. 제갈량이 적벽전에 앞서 손권을 안심시키기 위해서 사용한 사자성어이다.
삼고초려(三顧草廬) - 「오두막을 세 번 찾아간다」 중국 촉한의 임금 유비가 제갈량의 초옥을 세 번 찾아가 懇請(간청)하여 드디어 諸葛亮(제갈량)을 軍師(군사: 군대의 우두머리)로 맞아들인 일을 의미하는 사자성어이다.
군신수어(君臣水魚) - 「임금과 신하(臣下), 물과 물고기란 뜻으로, 떨어질 수 없는 친밀(親密)한 관계(關係)를 나타낸다」유비가 제갈량에게 군신의 정을 쏟자 관우와 장비는 이를 탐탁치 않게 여기는데 그 때 유비는 나에게 공명은 물고기에 물이 있는 것과 같다고 그들의 관계를 설명할 때 사용한 사자성어이다.
제갈량 관련 미디어
영화 적벽대전 1부, 2부(2008-2009), 오우삼
드라마 삼국지(2010), 가오시시
사마의 최후의 승자2
참고 자료
여명협, 『제갈량평전』, 지훈출판사, 2007
제갈량, 『와룡의 눈으로 세상을 읽다』, 신원문화사, 2006
조기형, 『한자성어•고사명언구사전』, 아담북스, 2011
중국어 위키피디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