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계초
양계초(량치차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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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73년 2월 23일 광동성(广东省) |
사망 |
1929년 1월 19일 |
생존시기 | 청말~민국시기 |
주요 작품 | 신민론, 청대학술개론 |
관련 활동 | 정치, 계혁, 혁명, 문학 |
개요
시기 구분 | 1873~1895 | 1895~1898 | 1898~1902 | 1902~1912 | 1912~1917 | 1917~19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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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사건 | 성장 및 캉유웨이와 만남 | 변법유신 선전 | 실패 후 망명 | 일본에서 입헌군주 주장 | 중화민국 설립 후 진보당 이사 역임, 원세개 복벽 반대 | 은퇴 후 학술 연구 매진 |
사상 | 성장 | 변법유신 선전 반혁명-개혁주의 및 만한 공존 (反열강이 우선이다) |
1901년까지 만주족에게 적대적이지 않았으나 그 후 파괴적 배만혁명을 주장 [部民-객체인]에서 벗어나 [國民-주체인]으로 거듭나 구국자강을 이뤄야한다 중국민의 계몽을 위해선 모든 것을 파괴해야 한다 |
배만혁명 포기, 입헌군주 주장 大민족주의 (한족과 소수민족의 통합) 반만감정은 이해하나, 立國이 더욱 중요. 중국은 아직 국민이 성숙하지 않아 공화제가 아닌 입헌군주가 필요 |
신해혁명 발발 후 전력으로 혁명을 막고 입헌군주를 지지했으나, 공화정 수립 후에는 체념함 중화민국 설립 후 초기에는 원세개를 지원했으나, 복벽 시도 후 반원운동 전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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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1873년 출생. 광둥 신회(신후이) 사람. 1884년부터 과거를 준비하였고, 1889년에 1차 합격했으나 1890년 會試(복시; 2차 시험)에서 떨어지고 귀경 도중 『영환지략』을 읽고 세계 각국에 대한 지식을 습득했다. 1891년 캉유웨이의 만목초당에 입학해서 유교 경전이나 역사를 공부하였다.
1895년 시모노세키 조약 체결 이후 캉유웨이 등을 중심으로 과거 응시생들을 모아 공거상서(과거 응시생들의 정치 개혁서)를 초안했다. 또, 만국공보의 주필이 되어 변법유신을 선전하고, 캉유웨이의 강학회에 참여했다. 아울러, 영국 선교사 티모시 리처드의 중국어 비서직도 담당하였다. 상하이에서 중국 최초의 근대식 일간지인 『시무보』를 발간하고 「변법통의」를 발표하고 주필로서 명성을 떨쳤다. 1897년 진보잠의 초빙을 받아 장사 시무학당의 총교습을 맡은 후 변법유신을 적극적으로 선전했다. 1898년 7월 백일유신이 선포된 후 광서제의 명을 받고 경사대학당과 역서국의 사무를 주관했다.
1898년 9월 무술정변 실패 후 일본으로 망명했다. 1898년 12월 일본에서 『청의보』를 발간하고 1900년 당재상 등이 주도한 자립군기의(우한에서의 거병)가 일어났을 때 귀국했으나 거병이 실패한 후 다시 일본으로 돌아왔다. 1902년 『신민호보』를 발간하고 『신민설』 등을 발표했다.
1903년 미국보황회의 초청을 받아 8개월 간 미국 각 도시를 방문하고 다시 일본으로 돌아간 후 『신대륙유기』를 저술했다. 1905년 11월 동맹회가 『민보』를 동경에서 발간해 『신민호보』와 논전하게 되었고, 이후 혁명당과 보황당의 논전이 갈수록 치열해졌다. 1907년 10월 동경에 정간사를 건립하여 군주입헌 실행을 주장했다.
1912년 중화민국이 건립된 이후 귀국해 민주당 당수가 되었고 곧이어 민주당과 공화당을 합친 진보당의 이사가 되었다. 1913년 웅희령 내각의 사법총장이 되었다. 1915년 원세개가 황제가 되려고 추진하자 제자 등과 함께 무력으로 원세개에 반대하는 운동을 전개했다. 1916년 원세개 사망 후 진보당의 지파인 연구계의 당수가 되었다. 1917년 장훈, 캉유웨이 등 보황당이 군사를 이끌고 북경에 입성해서 푸이를 복위시키려는 것을 반대함으로써 캉유웨이와 량치차오의 사제 관계는 파열되었다. 1917년 돤치루이 내각의 재정총장이 되었다. 그해 11월 돤치루이 내각이 붕괴하자 사직하고 정계에서 은퇴했다.
1918년 파리강화회의 대표단 고문 자격으로 유럽을 여행하고 1920년 귀국 후 전통문화 연구에 전념했다. 1923년 칭화대학에서 학술연구에 매진했다. 1929년 병사했다.
사상변천
참고자료
김택중, 「청말 양계초의 사상변천」, 서울여자대학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