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왕퇴백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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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 goeun (토론 | 기여)님의 2018년 11월 30일 (금) 17:25 판 (글을 쓰는 소재로서 비단의 장단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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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호남성(湖南省) 장사시(長沙市)에 동쪽 교외에 위치한 마왕퇴(馬王堆) 3호묘에서 발굴된 백서(帛書). 백서란 비단(겸백鎌帛)에 쓰인 서책을 뜻하며, 마왕퇴에서는 의약, 천문, 군사, 사상 등 다양한 분야를 아우르는 대량의 백서가 발굴되었다. 그 시기는 진말(秦末)에서 전한(前漢) 사이의 것으로 추정되며, 당시의 학술 실태 및 글씨체를 확인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라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마왕퇴

마왕퇴 한묘(漢墓)라고도 하며, 1호와 2호, 3호 총 3개의 묘로 구성되어 있다. 마왕퇴(馬王堆)란 ‘마왕(馬王)의 무덤(塚)’이라는 뜻으로, 10세기 중반 그곳을 다스렸던 마은(馬殷)의 무덤이라고 전해지면서 붙은 이름인이다. 그런데 발굴 결과 실제로 10세기보다도 훨씬 오래전인 한대(漢代)의 유적임이 밝혀졌다. 1971년 말 병원 건설 공사를 하다가 동쪽 무덤까지 영향이 미치자 갑작스럽게 1972년 1월부터 4월에 걸쳐 호남성박물관에서 발굴 조사를 진행했다. 이때 1호 한묘가 발굴되었다. 1973년 11월부터 12월에는 1호 묘 남쪽에 인접한 3호묘를, 1973년 12월부터 1974년 1월에는 서쪽 무덤에 해당하는 2호 묘를 발굴 조사하였다. 마앙퇴 한묘 세 기를 발굴 조사한 결과 1호 묘에서는 ‘대후가’와 ‘대후가승’이라고 적힌 명문 및 봉니가, 2호묘에서는 ‘이창’ ‘대후지인’ ‘장사승상’이라는 인장이, 3호 묘에서는 ‘십이년이월 을사삭무진’이라는 묘장 연대를 표시한 목독 등이 출토되었다. 이것이 결정적인 단서가 되어 2호 묘주는 장사의 승상으로 초대 대후에 임명된 이창, 3호 묘주는 이창의 아들로 2대 대후인 이희의 형제, 그리고 1호 묘의 부인은 이창의 부인인 것으로 판명되었다.

1호묘

1호 묘에서는 간독, 직물, 칠기, 죽목기, 도기, 악기 등 1000점이 넘는 귀중한 부장품과 2000여년이 넘었음에도 전혀 부패하지 않고 보존이 잘 된 부인의 미라가 4중으로 된 관에 안치된 채 발겨되었다. 주검 이외에도 보존 상태가 매우 좋은 부장품 다수 발견. 그 중 관에 덮여 있던 백화(帛畵), T자형의 베. 피장자 대후부인(軑候夫人)을 중심으로 천상과 지하의 신화적인 세계가 그려져 있음. 이와 같은 백화가 3호묘에서도 발견되었는데, 피장자의 혼을 하늘로 올려 보내어 안락한 곳에 도달하도록 비는 의미. 여기에 그려진 여러 신상(神像)이나 도상(圖像)은 한대(漢代) 초기의 종교, 예술, 민속 연구에 매우 중요한 자료.

2호묘

2호 묘는 도굴을 많이 당한 탓에‘이창’ ‘대후지인’ ‘장사승상’이라 적힌 3개의 인장 외에는 중요한 출토품이 없었으나

3호묘

3호 묘에서는 간독, 병기, 악기, 칠기, 직물 등 1호 묘에 필적하는 1000점 이상의 귀중한 부장품이 출토되었따. 그 중에서도 ‘백서’라 불리는 비단(겸백鎌帛)에 쓰인 대량의 서책은 중국 고대 학술사 연구에 유례가 없던 매우 귀중한 발견이었다. 간독, 병기, 악기, 칠기, 직물 등 1호 묘에 필적하는 1000점 이상의 귀중한 부장품이 출토되었다. 그 중 백서는 관 동쪽에 놓인 세로 60cm, 가로 30cm, 높이 20cm의 장방형 옻칠 상자 속에서 발견되었다. 상자 내부는 다섯 부분으로 나뉘어 그중 한 구획에 백서가 접힌 상태로 담겨 있었다. 또 다른 구획에 담긴 두 개의 두루마리 목간 밑에서도 길고 가는 목편에 감긴 상태로 백서가 발견되었다. 개어 접힌 백서는 세로 길이 48cm 정도의 가장자리 부분이 찢어져 파손되었고, 나무에 감긴 백서는 세로 길이 24cm 정도로 접착 때문에 꽤 파손된 상태였으나, 복원과 정리 및 해독 작업을 거쳐 그 내용이 밝혀졌다. 백서는 대부분 너비 48cm의 천이고 장방형으로 접어 갠 모양으로 발견. 오랫동안 천이 포개진 부분이 달라붙어 있었기 때문에 그 부분을 복원해서 확인한 결과, 28종류의 문헌이 들어있었으며, 그중 거의 대부분은 종래에는 전혀 존재를 알 수 없었던 문헌이었음. 조각이 나 있는 것이 많아 알려지지 않은 문헌은 책 이름을 모르는 것도 많으며, 현재는 적혀 있는 내용에 따라 가서명(假書名)을 붙여놓았다.

백서가 쓰여진 연대는 황제의 실명에 사용된 한자를 피해 다른 글자를 쓰고[避諱], 또한 그 끝획을 생략하는 중국의 독자적인 습관[缺筆]로 추정하면 노자 갑본과 천문기상잡점에는 한고조 유방(漢高祖 劉邦)의 실명 ‘邦’이 그대로 적혀 있으므로 고조가 황제가 되기 전의 것으로 짐작된다. 또한 노자 을본과 전국종횡가서에는 ‘邦’은 피했으나 다음의 혜제(惠帝: 劉盈)와 문제(文帝: 劉恒)의 실명 ‘盈’과 ‘恒’이 그대로 적혀 있으므로 고조 재위중의 것이라고 짐작된다. 앞의 것이 소전과 예서의 중간 글씨체로 적혔고, 뒤의 것이 예서로 적힌 것도 쓰여진 연대의 차이 때문일 것이다.

마왕퇴 백서 문헌 목록

1. 육예류六藝類, 유가 경전과 관련된 문헌

(1)『주역周易』(『육십사괘六十四卦』, 『계사繫辭』, 『요要』, 『무화繆和』, 『소력昭力』, 『이삼자二三子』, 『역지의易之義』)
(2) 『춘추사어春秋事語』
(3) 『전국종횡가서戰國縱橫家書』
(4) 『상복도喪服圖』

2. 제자류諸子類, 제자백가와 관련된 문헌

(5) 『노자老子』(갑본), 권후고일서사종卷後古佚書四種(『오행五行』, 『구주九主』, 『명군名君』, 『덕성德星』)
(6) 『구주도九主圖』
(7) 『노자老子』(을본), 권전고일서사종卷前古佚書四種(경법經法, 십육경十六經, 칭稱, 도원道原)

3 병서류兵書類, 군사와 관련된 문헌

(8) 『형덕刑德』(갑편·을편)
(9) 『형덕刑』 (병편)

4. 수술류數術類, 점술과 관련된 문헌

(10) 『오성점五星占』
(11) 『천문기상잡점天文氣像雜占』
(12) 『식법式法』(옛 이름 『전서음양오행篆書陰陽五行』)
(13) 『예서음양오행隸書陰陽五行』
(14) 『목인점木人占』
(15) 『부정符淨』
(16) 『신도神圖』
(17) 『축성도築城圖』
(18) 『원침도園寢圖』
(19) 『상마경』

5. 방술류(方術類), 의술과 관련된 문헌

(20) 『오십이병방五十二病方』, 권전고일서사종卷前古佚書四種(『족비십일맥구경足臂十一脈灸經』, 『음양십일맥구경陰陽十一脈灸經』(갑본), 『맥법脈法』, 『음양맥사후陰陽脈死侯』)
(21) 『태산서胎產書』
(22) 『양생방養生方』
(23) 『잡요방雜療方』
(24) 『도인도導引圖』, 권전고일서이종卷前古佚書二種(『각곡식기편却穀氣篇』, 『음양십일맥구경陰陽十一脈灸經』(을본))

6. 그 외 (지도)

 (25) 『장사국남부도長沙國南部圖』
(26) 『주군도駐軍圖』

대표적인 문헌 및 의의

백서 『노자(老子)』
노자의 고사본(古寫本)의 발견, 한대(漢代) 초기의 시대 배경과 연관. 노자가 말씀한 사상은 우주 창조에 앞서 존재한 근원적인 진리인 도를 구명하여 그것에 따라 생기는 것을 요점으로 하며 현실 정치에서는 ‘무위자연’의 자세를 강조, 한의 초기는 진말의 동란이 수습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모든 것에 소극적인 경향이 강하며 ‘무위로써 다스린다’라는 노자의 사상이 지배 계급 사이에 널리 유행. 사람과 지식을 움직여 갖가지를 하는 만큼 오히려 혼란하며 마침내 파멸에 이르므로 자연 그대로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있는 것이 거꾸로 대성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하는 시대상과 맞아 떨어짐. 갑본(甲本)과 을본(乙本) 2종류. 갑본은 노자 뒤에 알려지지 않은 문헌 1종이 붙어 있으며, 글자 수는 모두 464행에 1만 3000자 정도, 소전에서 예서로 옮아가는 과도기의 서체가 사용되고 있음. 이를 학자에 따라 초전(草篆:흘린 전서)이라 부르기도 한다. 을본의 경우 ‘황제사경(黃帝四經)’이라 이르는 문헌의 뒤에 적혀 있으며, 글자 수는 모두 152행에 1만 6000자 남짓, 글씨체는 예서.현재의 노자는 상편인 도경(道經), 하편이 덕경(德經) 2편으로 나뉘어져 있어 노자도덕경이라고도 함. 마왕퇴에서 나온 백서 노자도 역시 상하 2편으로 나뉘어져 있으나, 반대로 상편이 덕경, 하편이 도경으로 되어 있어 현재의 책과는 구성이 다르다. 또한 상하 각 편 속에도 장의 순서가 현재의 책과 다른 곳도 있으며 문장에도 차이가 있다. 현재의 노자는 후한 말기에서 삼국시대에 걸쳐 정리된 것으로 추측되는데, 마왕퇴의 노자는 그보다 수백년 이른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사본이므로 그만큼 원형에 가까워 노자 연구에 매우 큰 도움이 된다.
백서 『전국책(戰國策)』
마왕퇴본 전국책이라고도 한다. 전국책은 전국시대 말기 유세가(遊說家)로서 활약한 소진(蘇秦)의 활동을 기록한 것이다. 소진이 제자백가 가운데 종횡가(縱橫家)로 불리므로 『전국종횡가서(戰國縱橫家書)』라 이름 붙여짐. 전체 27장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그 중 8장은 사기, 10장은 전한(前漢) 말기에 유향(劉向)이 군웅할거 시대의 이야기를 정리해 편집한 전국책에 같은 이야기가 실려 있고 문장도 거의 같다.

글씨체는 노자 갑본의 글씨체보다는 좀 더 예서에 가까움. 사마천이나 유향이 책을 저술할 때 참고했을 것으로 추측되는 기록물. 사기나 전국책의 잘못을 바로잡을 수 있는 근거. 현재에 전해지는 역사서의 잘못을 바로잡을 수 있는 귀중한 자료.


백서 『주역(周易)』

마왕퇴 3호묘에서 발견 당시 조각나 있었으며, 글자수는 모두 2만 천자 정도, 64가지 괘의 어우르기를 해설한 부분인 「괘사(卦辭)」, 「계사전(繫辭傳)」 등이 수록되어 있다. 괘사는 주역의 중심부분이며, 백서 속 괘사의 문장이 현재의 주역에서 보이는 것과 꽤 다르다. 지금의 주역 괘사 속에 들어 있는 십익(十翼) 중 상전(象傳)이나 문언전(文言傳) 등의 내용이 백서에는 없으며, 계사전의 경우 현재의 문장과 다름이 있으며, 현재의 책에는 없는 내용이 수록되어 있기도 하다. 마왕퇴의 백서 주역은 지금까지 알려진 주역의 어느 것과도 다른데, 그것은 아마도 현재의 주역이 성립되었던 단계를 나타내는 것으로 볼 수 있어 유학사상사나 문헌학 연구상으로 매우 귀중한 자료라 할 수 있다.

백서 『주역(周易)』

마왕퇴 3호묘에서 발견 당시 조각나 있었으며, 글자수는 모두 2만 천자 정도, 64가지 괘의 어우르기를 해설한 부분인 「괘사(卦辭)」, 「계사전(繫辭傳)」 등이 수록되어 있다. 괘사는 주역의 중심부분이며, 백서 속 괘사의 문장이 현재의 주역에서 보이는 것과 꽤 다르다. 지금의 주역 괘사 속에 들어 있는 십익(十翼) 중 상전(象傳)이나 문언전(文言傳) 등의 내용이 백서에는 없으며, 계사전의 경우 현재의 문장과 다름이 있으며, 현재의 책에는 없는 내용이 수록되어 있기도 하다. 마왕퇴의 백서 주역은 지금까지 알려진 주역의 어느 것과도 다른데, 그것은 아마도 현재의 주역이 성립되었던 단계를 나타내는 것으로 볼 수 있어 유학사상사나 문헌학 연구상으로 매우 귀중한 자료라 할 수 있다.

백서 고지도

마왕퇴 3호묘에서 발견된 비단에 쓰인 2장의 고지도 중 1장은 장사국남부지형도(長沙國南部地形圖)로 지금의 호남성 남부의 소수(瀟水) 유역을 그린 것이고, 다른 한 장은 주군도(駐軍圖)라 불리는 군용지도. 함께 무덤에 매장되었을 때에는 접힌 채로 옷상자 속에 들어 있었으나, 발견 당시에는 조각으로 되어 있었다. 복원한 결과 지형도는 본래 사방 96cm, 주군도는 길이 98cm, 너비 78cm인 비단에 그려졌음을 알 수 있다. 지도는 현재 그리는 방법과는 거꾸로 남쪽을 위로 하고 있으며, 주군도는 지형도에 그려진 범위 가운데 동남부에 해당하는, 현재의 호남성 강화(江華)의 타강(拖江) 유역의 산맥과 물 흐름, 총 9개 부대의 군대배치와 수비영역을 표시하고 있다. 지도에서 산맥은 검은 줄, 물 흐름은 푸른 줄로 표시했으며, 중요한 산과 강에는 그 이름이 적혀 있는데, 글자를 적은 방향이 일정하지 않은 것은 지도를 둘러싼 주위의 각 방향에서 검토하기 편리하도록 한 것으로 추정된다.

글을 쓰는 소재로서 비단의 장단점

죽간이나 목간, 돌 등과 비교했을 때, 가볍고 말거나 접을 수 있어 부피가 늘어나지 않기 때문에 문서의 보관과 휴대 또는 수송에 매우 용이함.문서에 따라 크기나 너비를 보다 자유롭게 정할 수 있다. 베틀의 가로 너비에 따라 가장 큰 베의 너비가 정해지는데, 그 너비 이내에서 필요한 만큼 마음대로 잘라 쓰거나, 필요하면 이어 붙이거나 기워 붙여서 사용하는 것도 어렵지 않다. 특히 지도나 그림을 그릴 때에는 너비에 제약이 있는 죽간이나 목간보다도 훨씬 편리한 소재였다. 또한 먹의 흡수력도 대나무나 나무보다 훨씬 좋다.
결점은 쓴 글자의 고쳐쓰기가 안되며, 비단은 값비싼 귀중품이였기 때문에 선뜻 사용할 수 없었다. 따라서 실제로 비단에 쓴 것은 매우 중요한 서적이나 문서에 한하며 정본(定本)을 작성할 때에나 썼을 것이다. 그리고 초고 단계에서는 고쳐쓰기를자유롭게 할 수 있는 목간이나 죽간이 대신 사용되었을 것이다. (실제 글자는 죽간, 그림은 겸백鎌帛 소재가 보다 적합)

참고문헌

단행본

아츠지 데츠지, 김언종·박재양 역, 『漢字의 역사』, 학민사, 1999.

후쿠타 데쓰유키 저, 김경호·하영미 역, 『문자의 발견 역사를 흔들다』, 너머북스, 2016.


학술논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