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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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lqud78 (토론 | 기여)님의 2019년 6월 6일 (목) 16:27 판 (파리코뮨 원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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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보다란?

천보다(陳伯達: 1904~1989)는 중앙문혁소조의 일원이었다가 훗날 소조장까지 역임했으나 1970년 자아비판과 함께 숙청되었다. 천보다는 일찍이 1930년 후반에서 1940년 초 옌안 시절, ‘마르크스-레닌주의와 중국혁명의 결합으로서 마오쩌둥 사상’이라는 체계를 정식화해내고 이를 ‘마르크스주의의 중국화’라는 당내 공식노선으로 정립시키는 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해냈고, 옌안 정풍운동을 통해 당내 마오의 이론/이데올로기적 위치를 견고하게 만든 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이다. 천보다는 마오쩌둥의 '정치,이데올로기 비서'였을 정도로 마오쩌둥 사상에 있어 중요한 핵심인물이었다. 천보다는 하나의 확고한 기준에 따라 문화대혁명을 진행시키고자 했는데, 이것이 바로 '파리코뮨 원칙' 이다.그는 또한 『마오쩌뚱 선집』의 편집자고, 중화인민공화국 건국의 골간인 인민정치협상회의 공동강령과 헌법안을 작성한 인물이고, 문화대혁명 시기에 오면 문혁의 핵심 강령이라 할 수 있는 <문혁 16조>의 초안 또한 그의 작품이었다. 후에 서술하겠지만 덩샤오핑과 관계가 좋지 않은데, 덩샤오핑이 문화대혁명 시기 이후 오랜 기간 실권을 잡으면서 천보다는 조명받지 못하여 문화대혁명 시기 그의 비중이 컸던 것에 비하여 그에 대한 연구가 많지 않다.

천보다의 생애

천보다는 1904년 7월 29일 푸젠성 후이안 현에서 태어났다. 15세에 지메이 사범학교에 입학하였으나 학업을 다 마치지 못하고 17세에 고향에 돌아와 초등학교 교사일을 하였다. 1925년 '5.30 운동' 에 참여하였고, 1926년 광저우 중산대학에서 잠시 수학하였다. 같은 해에 '북벌'에 가담하여 푸젠성 지역의 '개혁적' 군벌인 장전의 휘하에 소속되었으며, 장전의 부대는 국민혁명군 제 1군 독립 제 4사단으로 편제되었고, 여기서 사단부 비서를 맡았다. 푸젠성의 반공테러가 심해짐에 따라 1927년 상하이로 피신하였다. 이 때 본격적으로 중국공산당에 입당하게 되었다. 당이 소련의 중산대학으로 파견하였고, 1927~1930년동안 이곳에서 수학했다. 이 시기에 '스파르타쿠스' 영화를 보고 감동하여, '파다'라는 필명을 지었다가 좀더 중국 이름에 가까운 필명인 보다로 바꾸었고, 이는 훗날 자신의 이름이 되었다. 1937년 당의 지시로 옌안으로 활동 무대를 옮겼다. 국민당 지역에서 지하 활동을 하던 시기에, 심한 푸젠 사투리 때문에 대중사업보다는 선전,이론 사업에 주로 참여하였다. 옌안에서는 산베이 공학 및 중앙당교의 교원과 마르크스-레닌주의 학원 부원장을 맡아 중국 고대 철학사 등을 강의하였다. 이 시기에 마오쩌둥을 만나 교류하면서 마오의 정치,이데올로기 비서를 맡게 되었다. 이 시점부터 본격적으로 마오쩌둥과의 공동의 이론작업에 몰두하게 된다. 1945년 중국공산당 7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으로 선출되었고,, 7기 2중전회에서는 중앙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56년 8차 당대회에서는 중앙정치국 후보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중공중앙 선전부 부부장, 중국과학원 부원장, 당기관지 '홍기' 총편집인을 역임했고, 당내 최고 이론가로 '노 선생님' 으로 지칭되기도 했다. 1966년 5월, 문화대혁명 개시와 더불어 중앙문혁소조 소조장을 맡았으며, 1966년 8월 8기 11중전회에서는 당서열 5위의 중앙정치국 상무위원에 선출되었다. 1969년 4월 개최된 9차 당대회의 정치보고 초안 작성을 두고 장춘차오와 대립하였다. 1970년 8월 말~9월 초 루산에서 열린 9기 2중전회에서 린뱌오와 동맹을 맺어 '천재론'과 '국가주석 지위 부활' 등을 주장하면서 장춘차오 등의 '상하이방'을 공격하다가 마오쩌둥의 비판을 받아 실각하고, 가택연금 당했다. 1971년 린뱌오 사건(9.13 사건) 이후에는 진청감옥에 수감되었고, 1973년 10차 당대회에서 당적이 박탈되었다. 1976년 '4인방 체포'와 더불어 공식 체포된 것으로 기록되고, 1981년 '4인방'과 함께 재판이 진행되어 18년형을 선고받았다. 1981년 8월 병으로 가석방되어 집필활동을 재개하였으며 1988년 형기가 만료되어 베이징시 문사관 관할로 소속이 변경되었다. 이후 1989년 9월 20일, 생을 마감하였다.

천보다와 중앙문혁소조

두 문건과 파리코뮨

천보다는 1966년 문화대혁명 역사에 있어 아주 중요한 축을 담당하는 두 중요한 문건 작성에 관여했다. 「5·16통지」와 「문혁 16조」가 바로 그것들이다. 이 두 문건은 천보다가 생각하는 문화대혁명의 원칙과 사상을 잘 반영하고 있기에 천보다를 살펴보는데 있어, 그리고 초반 문화대혁명을 파악하는 데 있어 효과적이다.

「5·16통지」

「5·16통지」는 류사오치와 덩샤오핑에게 맡겨진 최초의 '문화혁명'의 임무를 마오 중심으로 되돌리는 역할을 했다. 이는 왕런중이 기록한 마오의 연설 기초 위에 천보다 본인이 보충 수정한 문서이다.'문화혁명'은 1965년 말 문예계 논쟁을 시발점으로 하여 당내 정풍운동 방식으로 시작되었다. 베이징시 시장인 펑전을 위원장으로 하는 '문화혁명 5인소조'가 구성되었고, 이들은 1966년 2월, '2월 제강'( 「당면 학술 토론에 관한 문화혁명 5인소조의 보고 제강」)을 작성해 이를 지침삼아 '문화혁명'을 진행중이었다. 한편, 마오쩌둥은 이 류사오치와 덩샤오핑으로 대표되는 당의 몇몇 관료들이 본인의 본래 취지와는 다른 방향으로 '문화혁명'을 진행중이라 판단했고, 이 방향을 완전히 전환시키기 위해 개입을 결심한다. 이 개입의 시발점이 된 문서가 바로 「5·16통지」이다. 1966년 5월 16일 발표된 이「5·16통지」는 "부르주아 계급 대변인들이 당 각 수준에 침투해 있다" 는 정세 판단 하에 공격의 대상을 '당, 정부, 군대와 각종 문화계에 잠입한 부르주아 계급 대표 인물'로 확대하였다. 「5·16통지」는 구체적인 '방법' 보다는 '목표' 제시를 목적으로 삼은 문건이었다. 오늘날 문화대혁명을 공부하면 자주 등장하는 '주자파', '당내 자본주의의 길을 걷는 실권파' 등의 표현이 이 문건에서 공식적으로 등장한다.


「문혁 16조」

「문혁 16조」는「5·16통지」가 발표되고 나서 2달 후인 1966년 8월 8일에 발표된 문건이다. 「문혁 16조」는 「5·16통지」에서 제기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방법'을 구체화하려는 의도에서 집필되었다. 허나 오히려 「5·16통지」보다 훨씬 더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함으러써, 문화대혁명의 핵심 '강령', 더 나아가서 '헌법'적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까지 평가되었다. 천보다 본인 역시 이 문건에 큰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다음의 천보다의 발언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 「문혁 16조」의 초안 작업은 주로 내가 했는데, 마오 주석, 저우 총리와 타오주, 왕런중 동지 등이 일부 수정했다. 문건은 회의참석자의 공동 토론을 거친 후 통과되었다. 오늘의 관점에서 보면 「문혁 16조」에는 잘못된 곳도 있다. 그러나 「문혁 16조」는 처음으로 몇 가지 중요한 원칙을 제기했다. 비록 이 원칙이 운동의 혼란 상황 중에 관철될 수 없었더라도, 이 원칙을 제기한 것이 의미가 없다는 것은 아니다. " 

「문혁 16조」가 의미있는 이유는 또 있다. 이 문서는 당내 회람용 문서로 발표된 것이 아닌, 8월 8일 라디오 방송을 통해 전국에 동시에 공포되었는데, 이처럼 전례없는 매우 독특한 방식을 통해 '대중에 직접 전달'되었다. 당을 거치지 않고 대중에게 직접 전달한 것은 문화대혁명 시기 마오가 강조하는 가치관과도 어느정도 일맥상통해 보인다. 한편 샤오시둥은 「문혁 16조」이 「5·16통지」보다 훨씬 중요하다고 언급했는데, 이는 프랑스혁명 시기와 비견될 '헌법정치'를 가능케 하는 특성을 지녔다고 극찬했다. 여기에 추가해서 볼 것이 바로 왕리의 회고이다. 천보다를 이야기 하다 왕리라는 사람이 갑자기 나왔다고 생각할 수 있으나, 왕리는 천보다와 분리하기 힘든 인물이다. 왕리는 천보다와 함께 중앙문혁소조에서 일 했던 사람이다. 후에 서술하겠지만 왕리는 중앙문혁소조 활동 당시 천보다의 편에 서서 일을 한 몇 안되는 인물 중 한명이다. 천보다는 푸젠 지역 사투리가 굉장히 심했던 것으로 알려졌는데, 따라서 대중집회를 나갈 때 보통어를 잘 구사할 수 있는 통역이 필요했다. 당시 이 통역을 맡았던 자 역시 왕리였다. 또한 왕리는 1981년 7월 5일, 천보다를 위한 탄원서를 중앙에 제출하기도 하는 등, 전반적인 면에서 그가 천보다를 지지하고, 그와 사상적 노선이 비슷한 동지였음을 알 수 있다. 당시 천보다를 도와 「문혁 16조」초안을 준비한 왕리는 초안 작업에서 천보다의 역할과 문건의 의미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5·16통지」가 발표되자 밖에는 대자보가 나붙기 시작했다. 이때 마오 주석은 「5·16통지」만으로는 안 되는데, 왜냐하면 이 통지는 정치 사상성 문제만 언급하였기 때문이라 하고, 어떻게 운동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개괄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제출했다. 마오 주석은 경계선을 그어, 어떤 것은 허가되고 어떤 것은 허가되지 않는지, 주로 어떤 것을 해야 하고 어디까지 가야 하는지, 무엇을 주의해야 하는지 분명히 설명해야 한다고 했다. 마오 주석은 천보다가 베이징에서 이 문건을 작성하라고 지시했다. ··· 마오 주석은 초고를 재촉했지만, 초고가 쉽게 나오지 못했는데, 작성자들도 대체 무엇을 써야 하는지 분명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이 안에는 하나의 사상이 있는데, 즉 파리코뮨 정신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문혁 16조」의 제9조에서는 이 조직이 임시 조직이 아니라 상설 조직이며 공장, 광산, 농촌에 적합하독 했다. 문화혁명위원회 대표대회는 파리코뮨처럼 선거를 시행해야 한다. 이것이 마오 주석 사상의 핵심이다. 「문혁 16조」중 이 조항은 아직도 그다지 분명해 보이지 않지만 사실 매우 중요하다. 마오 주석은 파리코뮨 형식을 이용해 낡은 국가장치를 대체하고, 간부는 선거하고 수시로 소환하려 하고, 임명제는 시행하지 않으려 했다.···「문혁 16조」의 제4조에서는 대중이 스스로를 교육하고 스스로를 해방시켜야 하며 대신하는 방법을 택할 수 없고, 혼란이란 낡은 국가장치, 낡은 질서를 혼란시키는 것이고, 자신은 낡은 국가장치가 어쨌건 이미 빠르게 부패하여 거기에 혼란을 불러와야 새로운 것이 생길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사람들이 보통 「5·16통지」는 중시하면서도 「문혁 16조」를 중시하지 않는 것은 잘못된 일이다. 「문혁 16조」는 파리코뮨의 원칙을 제시했는데, 이는 매우 중요한 것이다."

천보다의 회고에서의 '중요한 원칙', 왕리의 회고에서 등장하는 「문혁 16조」가 중요한 이유는 같은 것으로, 이 것이 바로 '파리코뮨 원칙'이다.

파리코뮨 원칙

파리코뮨 원칙은 천보다의 핵심 원칙이다. 예융례는 천보다를 '코뮨광'이라고 부를 정도로 '코뮨'사상은 천보다에게 있어 중요한 것이었다. 파리코뮨이란 마르크스가 대중이 직접 참여하는 민주주의를 시행한 내용을 뜻한다. 1871년 보불전쟁 당시 프랑스 파리 시민의 자치기구로서 한시적으로 등장한 파리코뮨의 경험에 대해 마르크스가 『프랑스 내전』에서 정리했으며, 상비군과 상비 관료제를 해체하고 시민소환제를 도입함으로써 대중의 직접 참여 민주주의 시행을 유도하는 것이다. 천보다의 「문혁 16조」의 핵심적 사상을 담고 있는 제4조를 한번 보자. '제4조 : 대중이 운동 중에 스스로 자신을 교육할 수 있도록 한다. 프롤레타리아 문화대혁명은 대중이 스스로를 해방함으로써만 가능하며, 타인들이 독단적으로 주도하는 방법으로는 불가능하다. 대중을 믿고, 대중에 의지하고, 대중의 창조적 정신을 존중하여야 한다.' 여기서 천보다는 파리코뮨의 원칙을 대중에 대한 의존에서 찾는다. '대중 스스로에 의한 해방'을 근본적인 원리로 두고 앞의 「문혁 16조」를 작성하였다고 볼 수 있다. 천보다는 기존 중국 사회의 문제점으로 간부들이 대중의 감독을 받지 않고 평생 자리를 유지한다는 것이라고 판단했다. 해방 이후 중국의 간부제도는 상급임명제였다. 많은 간부가 한 지역에서 일단 관료가 되면 십수 년을 갔고, 대중의 감독도 없이 오랜 시간 권력을 누리다 결국 대중에서 점점 이탈했다. 따라서 이러한 상황을 타파하기 위해서는 파리코뮨 정신이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다. 파리코뮨의 원칙에 따라 전면 선거제를 시행하고, 대중이 충분히 숙고하여 후보자 명단을 제출하여 선거로 문화혁명위원회를 만들어 내며, 당선된 사람이 일을 못 하면 대중이 비판할 수 있고 다시 선거하고 소환할 수 있게 되어 있다. 이를 통해 상급임명제를 개혁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즉 다시 말하면, 어떠한 지도자건 반드시 대중의 감독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파리코뮨의 원칙은 대중에 의한 관료의 직접선출과 직접소환이며, 이는 결국 대중 스스로에 의한 해방에 뿌리를 둔 것이다. 「문혁 16조」는 이에 대한 구체적인 방법역시 제시하고 있다. 이는 제6조에서 찾아볼 수 있다. '제6조 : 서로 다른 의견을 가진 소수 사람에 대해 절대로 어떤 억압의 방법도 사용해서는 안 된다. 소수를 보호해야 하는데, 왜냐하면 때로는 진리가 소수의 사람들에게 있기 때문이다. 소수 사람들의 의견이 잘못된 것이라 할지라도, 그들이 변론을 전개하고, 자신의 의견을 지닐 수 있도록 허락해야 한다.' 이에 근거하여 천보다는 대(大)민주'라 이야기되는 4가지의 大, 대자보, 대변론, 대명, 대방을 구체적인 혁명의 방법으로 제시한다. 하지만 이런 규정들은 모두 실제 문화대혁명 과정에서 중요한 쟁점이 되었던 것이지만 실행에 잘 옮겨지지 않은 것이기도 했다. 문화대혁명은 사회주의 하에서 '자본주의의 복귀'라는 질문과 더불어 시작되었다. 이러한 파리코뮨의 원칙과 그 위에 세워진 「문혁 16조」는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을 사회주의 혁명의 '새로운 단계'를 이루고 그 해결 방식으로 '대중들이 스스로를 새로운 정치적 주체'로 만드는 것을 선택했다. 스스로를 정치적 주체로 만드는 것은 대신 될 수 없는 일이며, 스스로를 교육해야 하고, 항상 소수가 다수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두어야 하는 길이다. 이를 통해「문혁 16조」는 문화대혁명과 그 전개에 있어 굉장히 낙관적 전망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문화대혁멍의 현실 정치 속에서 이러한 낙관은 현실의 난관에 부딪혔다. 사회주의 하에서 '공산당'의 위상이 문제로 부각되었다.

천보다와 홍위병

천보다와 마오쩌둥

천보다와 덩샤오핑

천보다와 덩샤오핑 사이에는 갈등이 있었는데, 특히 주목할만한 것은 천보다가 덩샤오핑 실각을 주도했다는 것이다. 이와 더불어 그가 문혁 촉발의 핵심인물이었다는 점이라는 두가지 배경 때문인지, 그는 아직도 복권되지 않은 문제인물이며 금기시되는 인물에 속하고 있다. 더욱 주목할만한 것은, 천보다가 1957년 반우파투쟁과 문화대혁명 초기 공작조 파견 두 가지가 덩샤오핑에 의해 연결된다고 주장했다는 점이다. 천보다는 류사오치와 덩샤오핑 모두를 비판하긴 했지만, 류사오치를 비판할 때는 마오에게 등을 떠밀린 듯한 소극적인 태도를 보인 반면 덩샤오핑에 대해서는 일관적으로 비판적 태도를 유지하였다. 천보다와 덩샤오핑 둘은 서로에 대해 "덩은 잘못된 노선의 최선봉", "덩, 이 자는 총명함을 믿고 타고난 백과사전인 양 모르는 것이 없고 깨닫지 못한 것이 없어 조사연구도 하지 않고 그대로 문제를 결정해 버린다", "덩과 문제를 논의하는 것은 참으로 하늘에 올라가기보다 어렵다", "천보다 이 인간에 대한 내 인상은 아주 자만감이 넘치고 허세를 떨치며 종래 자아비판을 한 적이 없다는 것", "천보다는 여러 해 동안 어떤 일도 맡은 게 없고, 이런 붓쟁이들은 늘 이해해 달라고 해서, 그에 대한 인상은 별다른 게 없다", "이런 나쁜 놈의 과거가 그렇게 드러난 것이 그리 이상한 일도 아니다" 라는 등 신랄하게 공격했다.

천보다-덩샤오핑, 공업문제에 대하여

참고자료

백승욱, 「천보다를 통해 본 중앙문혁소조와 문화대혁명」
백승욱, 『중국 문화대혁명과 정치의 아포리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