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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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민지 (토론 | 기여)님의 2019년 6월 25일 (화) 15:32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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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 2대황제 이세황제

창작은 나의 인생을 완전하게 해준다. 사람마다 욕망과 감정이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현실 생활속에서 그것을 완전히 방출할 수 없기에 창작 과정에 비현실적인 세계에서 마음껏 풀이할 수 있다. 수필은 마치 음악을 듣거나 영화를 보는 느낌이지만 소설 특히 장편 소설은 일종의 인생을 겪는 것과 같다.

 
— 위화, <2008.10.22>
호해(胡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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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1960년 저장성 항저우시 출신, 본래 국가의 직업 분배에 따라 발치사로 일했으나 1983년 「베이징문학」에 단편소설을 기재하며 문화관에서 소설가로서 활동. 중국의 3세대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생애

유년기

위화는 문화대혁명(1966~1976)시기를 겪으며 제대로 된 독서를 할 수 없는 환경에서 자라났다. 그러나 초등학교를 졸업하던 1973년 (문화대혁명 7년차)에 마을 도서관이 다시 문을 열었고, 이 때부터 소설을 즐겨 읽기 시작한다. 
당시 거의 모든 문학작품이 독초였던 중국 도서관의 서가에 꽂혀 있는 소설이라고는 20여종 남짓이었고, 하나같이 국내의 이른바 사회주의 혁명문학이었다. 여름방학이 끝나기도 전에 도서관의 책을 다 읽은 위화는 책을 구하기 위해 동네 곳곳을 뒤졌으나 이내 포기하고 마오쩌둥 선집의 1권부터 읽기 시작, 마오쩌둥 사상이 아닌 책의 각주에 쓰인 역사적 사건과 인물에 관해 읽고 흥미를 느낀다.
1973년 말, 황솨이 사건으로 전국의 초등학교와 중학교 학생들이 궐기하여 사도의 존엄을 비판하는 조류가 일었다. 위화 또한 글을 썼는데, ‘춘묘’라는 필명으로 서명한 대자보가 중학교에 선풍을 일으켰다. 
문화대혁명 시기 위화의 이런 글쓰기는 고등학교 때까지 계속됐다. 그러다 어느 날 대자보 쓰기에 흥미 없어지고 연극 대본을 써보기로 마음먹었다. 이것이 위화의 첫 번째 문학작품이다.

청소년기

책 제목도, 작가도 모르는 독초를 구해 읽었으나 상태가 온전치 않아 소설의 앞과 뒤가 없었다. 덕분에 결말이 없는 책을 읽고 스스로 이야기의 결말을 상상함으로써 창작 열정이 시작이 되었다. 
문화대혁명이 끝날 무렵인 고등학교 2학년, 독초 소설 가운데 유일하게 뜯겨나가지 않았던 책, 프랑스 작가 알렉상드르 뒤마의 ‘춘희’를 필사본 형태로 구했으나, 하루밖에 빌려 읽지 못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위화는 친구와 함께 3분의 1가량 읽고 훌륭한 소설이라 생각하여 책을 베끼기 시작한다. 부모님이 퇴근하여 집에 오실 시간 되자 학교로 향했고, 창문을 통해 교실로 들어가 전등 전선 끌어다가 백열등 켜놓은 채, 한 사람이 베끼는 동안 다른 한 사람은 책상을 이어 만든 침대 위에 누워 휴식, 이를 번갈아가며 아침까지 책을 필사했다. 

발치사에서 작가로의 탈바꿈

당시 중국에서는 개인에게 자신의 직업을 선택할 권리가 주어지지 않았다. 직업은 전부 국가가 분배해주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했을 때, 위화에게 치과의사라는 직업을 분배되었지만, 오후 휴식시간이 되면 항상 거리가 내려다보이는 병원 창가에 서서 눈 아래 펼쳐지는 소란스러운 거리의 풍경을 부러워했다. 창가에 서면 항상 현 문화관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할 일 없이 한가하게 거리를 오가는 모습을 볼 수 있었고,‘내가 이 자리에 평생 서 있을 수 있을까?’라는 의문이 든 순간 위화는 바로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문화관에서 일하기로 결심한 위화가 치과의사라는 직업을 포기하고 문화관에서 일을 하려면 국가의 허락을 받아야 했다. 게다가 자신이 문화관에 들어갈 자격을 갖추고 있다는 것을 증명해야했는데 문화관에 갈 수 있는 방법에는 ‘작곡’, ‘회화’, ‘글쓰기’ 뿐이었다.
위화는 스무살 때 이를 뽑는 동시에 글쓰기를 시작했다. 이를 뽑는 것은 생계를 위해, 글쓰기는 더 이상 이를 뽑지 않기 위해서였다. 한편 1980년대 단편 소설을 문학잡지에 보내기 시작한 위화는  1983년 11월 <베이징문학>에 단편소설을 기재하며 문화관에 출근하게 되었다.

작품

단편소설

  • 첫 번째 기숙사
  • 18세에 집을 나가 먼길을 가다
  • 내게는 이름이 없다
  • 세상사는 연기와 같다
  • 4월 3일 사건
  • 무더운 여름

장편소설

  • 가랑비 속의 외침
  • 인생
  • 허삼관 매혈기
  • 형제
  • 제 7일

수필집

  • 영혼의 식사
  • 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간다
  • 우리는 거대한 차이 속에 살고 있다
  • 글쓰기의 감옥에서 발견한 것

대표작

인생(活着)

「인생」, 1994













허삼관매혈기(许三观卖血记)

「허삼관」, 2014












평가

수상

1998년 이탈리아 그린차네 카보우르 문학상
2004년 프랑스 문학예술 훈장 및 미국 반스 앤 노블의 신인작가상
2005년 중화도서 공로상
2008년 프랑스 꾸리에 엥테르나시오날 해외 도서상

작품성

중국 문학 평론가들은 언어 서술이 매우 간결하다고 칭찬했으며, 미국의 한 문학교수는 영어로 번역된 위화의 언어가 마치 헤밍웨이의 언어 같다고 말했다. 위화의 작품들은 모두 해학적 문체와 극단적인 상황의 연출로 현대 중국사회를 냉소적으로 표현한다.

  • 독특한 서사전략과 개성적 인물 제시

위화의 소설은 중국과 중국인을 보여주되 자기만의 고유한 서사를 통해 개성있게 제시한다. 위화는 세계와 사람을 표현하는 자기만의 고유한 서사방식을 가지고 있는 작가이다. 위화는 초기에는 형식실험을 추구하는 단편을 썼다. 그런데 요즘에는 장편만 쓴다. 그는 단편과 장편은 전혀 다른 별개의 장르라고 말한다. 장편을 쓴 뒤로 그는 자신이 독재자에서 민주주의자로 바뀌었다고 한다. 단편을 쓸 때는 소설 속 인물들을 지배하였지만 장편을 쓰면서는 인물이 자기 목소리를 가지고 스스로 말할 수 있도록 변했다는 것이다. 확실히 그의 인물들은 스스로 말하고, 작가는 그것을 중계하고, 독자는 그 중계방송을 듣는다. 그의 소설을 읽는 우리는 독자인 동시에 청자이다. 작가는 흡사 저 옛날 저잣거리에서 사람들을 모아놓고 기이한 이야기를 재미있게 늘어놓던 설서인(說書人) 같다. 그의 소설은 이야기, 특히 사람 이야기이다. 그의 소설은 범박하게 말하면 이른바 ‘전'(傳)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푸꾸이전(富貴傳)이고 《허삼관 매혈기》가 허삼관전(許三觀傳)이라면 신작 《형제》는 리꽝터우전(李光頭傳)과 같다. 위화는 오로지 그의 소설 속에만 존재하는 이 세 사람을 창조했다. 이들 주인공은 온갖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삶에 대한 낙관과 웃음을 잃지 않는다. 숱한 역사적 고난과 굴욕 속에서 피를 열세번이나 뽑으면서도 삶을 포기하거나 원망하지 않고, 세상의 모순을 추궁하면서 그것과 대결하지 않는다.

 
— 이욱연, 창비주간논평, <2007.06.05>



  • 순응적 운명론과 낭만적 현실관의 한계

그의 소설을 중국과 한국의 독자들은 매우 친숙하게 받아들인 반면 서구 독자들이 낯설고 불편하게 여겼던 것은 인물들의 이런 특징 때문이다. 위화 소설의 인물들은 근대인들, 근대소설 속의 인물들이 아니다. 세계의 숨은 진리를 찾기 위해, 혹은 세계와 대결하기 위해 길을 떠나는 문제적 개인들이 아닌 것이다. 물론 이는 위화 소설의 독보적 장점과 가능성이지만 치명적 약점이자 한계이기도 하다. 그의 소설에서 인물들이 정치적 원인으로 초래된 재난을 운명의 한 형식으로 받아들이거나 현실을 과도하게 낭만적으로 대하여 결국 정치성이 약화되는 것 등은 서사 자체에서 유래하는 약점이자 한계이다. 하지만 이러한 약점과 한계까지 포함하여 창조된 인물들이 진짜 중국인이고 그의 소설에만 나오는 독특한 인간형이라는 것을 인정받으면서 위화 문학은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고 있다. 아큐가 루쉰(魯迅)의 소설에만 있듯이, 위화의 인물들은 그의 소설에만 있는 중국인임을 세계문학이 인정한 것이다.”

 
— 이욱연, 창비주간논평, <2007.06.05>

[1]



본인의 평가

위화는 1980년대 혈기와 폭력으로 가득한 글이 성장 배경과 연관이 있다고 말한다. (대환경 - 문화대혁명, 소환경 - 의사 부모님)

나는 나의 성장 이력이 1980년대에 내가 그토록 혈기와 폭력으로 가득 찬 글을 쓰도록 결정해놓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문화대혁명 시기에 나는 초등학교 1학년에 다니고 있었고 문화대혁명이 끝났을 때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였다. 나의 성장은 한 차례 또 한 차례 연이어 벌어지는 가두행진과 비판투쟁대회, 조반파 사이의 무장투쟁을 목도해야 했다. 이것 말고도 끊임없이 이어지는 거리의 집단 패싸움도 지켜봐야 했다. 대자보가 가득 붙어 있는 길거리에서 피를 줄줄 흘리는 사람들과 얼굴을 마주치고 지나가는 것이 내가 성장하는 과정에서 습관처럼 겪은 일이었다.

 
— 위화

하지만, 본인이 살해당하는 생생한 꿈을 꾼 뒤 낮에 썼던 살인에 관한 소설내용을 의식하게 되고, 이것이 반전의 계기가 된다.

위화와 루쉰

중국의 비평가들 은 나를 루쉰정신의 계승자라고 말한다. 이런 소리를 들을 때면 나는 마음 속으로 몹시 불쾌할 뿐만 아니라, 그들이 내 작품을 폄하하고 있다는 생각마저 들곤 했다.

 
— 위화

실제로 이 둘의 문학작품은 닮아있다는 평을 받으나 위화는 유년시절의 기억으로 루쉰의 소설을 온전히 받아들이기를 거부한다. 위화는 작품이 재미없다 생각하면 그 작가의 작품 당장 내려놓으나 문화대혁명시기에는 루쉰의 작품 내려놓지 못하고 반복해서 읽었고, 루쉰은 위화가 싫어했던 유일한 작가가 되었다. 문화대혁명 이후 한 번도 루쉰 작품 읽지 않았으나, 1996 어느 영화감독이 루쉰의 소설을 영화화하면서 위화에게 각색과 기획 맡겼고, 이를 계기로 루쉰 소설집을 산 위화는 소설을 영화화하지 말아달라 부탁하며 이렇게 말했다. “루쉰을 망가뜨리지 맙시다. 루쉰은 정말 위대한 작가거든요”

참고자료

1. 위화 저, 최용만 역, 「영혼의 식사」, 휴머니스트, 2008
2. 위화 저, 김태성 역, 「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간다 : 위화, 열 개의 단어로 중국을 말하다」, 문학동네, 2012
3. 위화 저, 이욱연 역, 「우리는 거대한 차이 속에 살고 있다 : 작가 위화가 보고 겪은 격변의 중국」, 문학동네, 2016
4. 위화 저, 김태성 역, 「글쓰기의 감옥에서 발견한 것」, 문학동네, 2018

5. 이욱연, 「한국문학의 길에 위화가 보여주는 것들」,창비 주간논평, 2007.06.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