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양옥
진양옥
진양옥(秦良玉)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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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사천 충주 |
개요
명사(明史) 진양옥열전에 기록되어있는 여장군이다. 1574년 사천 충주에서 태어나 1648년 명나라가 멸망한지 4년 뒤 죽었다.
석주
1594년, 21살에 석주 토사 마천승과 혼인하였다. 석주는 소수민족 토가족들이 모여 살던 곳으로 석주의 발전에 힘썼다. 선진적인 경작방식을 도입하고 학교와 절을 짓고 다리를 세우는 등 지역 건설과 발전에 힘썼다. 이에 석주는 상업이 번성한 지역으로 변모하였다. 진양옥은 치수에 힘썼는데 성 주위에 인공하천과 축대를 쌓아서 홍수 피해를 막았다. 진양옥이 만든 치수시설을 옥대하라고 한다. 수재의 발생을 막고 경작지에도 물을 댈 수 있게 하는 풍작을 이루는 기반시설이었다. 1613년, 남편 마천승이 죽었다. 조정에서 진양옥이 어린 아들을 대신해 토사직을 세습하고 석주의 군권을 장악하도록 허락하였다.
백간병 양성
도적이 들끓던 때 남편 마천승과 함께 석주의 백성들에게 남녀불문 군사훈련을 받게 하고 가뭄의 영향을 덜 받는 옥수수를 심어 자체적인 역량과 보급을 갖추게 하였다. 백간창이라는 무기로 무장한 병력을 구성하였다. 백간창은 진양옥이 석주의 특징을 이용해 만든 창으로 백랍수라는 나무로 만든 창이다. 이 백간창을 무기로 백성들을 훈련시켰으며 백성들이 평소에는 생업에 종사하다가 비상시에 전투에 나설 수 있도록 하였다. 이 병사들이 후에 백간병이 된다.
활약
인근 지방인 사천 파주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1599년, 만력제의 명을 받아 마천승과 난을 진압하러 갔다. 진양옥은 병사들 가운데 일부는 남아 명절을 즐기는 것처럼 위장하게 하고 반란군이 야습하자 반격해 무찔렀다. 도망치는 반란군을 끝까지 추격해 근거지를 격파했다.
1620년. 누르하치가 요동지역을 침공하자 진양옥은 백간병을 직접 이끌고 출전하였다. 천계제는 진양옥을 칭찬하며 2품의 관직과 관복을 내렸고, 산해관을 지키는 중요한 직책을 부여했다. 후금군이 물러갈 때까지 진양옥은 산해관을 굳게 방어하였다.
석주로 귀환하자 사천 영녕의 선무사가 반란을 일으켰다. 진양옥에게 사자를 보내 반란을 제의했으나 진양옥은 사자의 목을 베었다. 그 후 진양옥은 반란을 진압하고, 반란세력을 전멸시켰다. 명 조정에서 진양옥의 공을 인정해 진양옥을 도독첨사 겸 석주총병관으로 임명하였다.
1630년, 누르하치의 뒤를 이은 황태극이 명나라를 대대적으로 침공하였다. 숭정제는 각 지방에 북경을 방어하라는 명령을 내렸으나 대부분은 듣지 않았다. 그러나 진양옥은 만 리나 떨어진 북경까지 군량을 준비해 갔고, 백간병과 함께 후금세력을 물리쳤다.
1640년, 스스로 황제라 칭하며 장헌충이 반란을 일으켰다. 그 때 진양옥은 63세였는데, 사천순무 소첩춘과 연합하여 토벌했다. 소첩춘의 잘못된 판단으로 백간병의 거의 대부분을 읽었지만 진양옥은 끝까지 석주를 방어했다.
참고문헌
서영, 『중국역사가 기억하는 비범한 여성들』, 책벗, 2015.
임종욱, 『중국역대 인명사전』, 이회문화사, 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