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한
목차
역사
통치체제
국가유교
군현제
- 한 고조는 건국 초기 수도인 장안과 그 근기 지방에 대해서는 황제 직할의 군현 제도를 실시하면서도 관동 지역에는 제후를 분봉하는 군현제와 봉건제의 혼합 형태인 군국제를 실시하였다. 제후들은 통치 지역의 정치와 경제 전반을 관리하였으며 한의 율령에도 예속되지 않았다. 초기 한 왕실이 직접 장악한 군은 서부지역의 15개 군이었고, 관동 지역에 10개의 세습 왕국이 존재하였다.
- 그러나 중앙집권화를 향한 황제의 야욕은 분명했으며, 정국이 안정되자 반란의 혐의를 씌워 이성제후를 제거하기 시작하였다. 제후의 자리는 유씨 일족으로 대체되었는데, 고조 말기 제후국 장사국 하나만이 유일한 이성 제후로 남아있었다.
- 경제 때 조조는 경제와 함께 삭번책을 추진한다. 삭번책이란 동성 제후의 권력을 축소시키기 위한 영지 삭감책으로, 이것은 자신들의 권력이 약화된 제후들의 분노를 폭발시켜 오초칠국의 난을 일어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한 왕실과 다른 제후국들의 도움으로 반란은 진압되었으며 그 후 제후왕의 지위는 급격히 약화되었다.
- 경제의 뒤를 이은 한 무제는 추은령(推恩令)을 실시함으로써 더욱 적극적으로 제후의 권력을 축소시키기 시작하였다. 기존에는 제후가 죽으면 적장자가 그 자리를 계승했는데, 추은령 반포 후 적장자 외의 아들들도 토지를 물려받고 제후가 되었다. 이는 결국 기존 봉건국의 세력이 쪼개어지면서 힘이 약해지는 결과를 낳았다. 또한 제후들이 종묘 제사에 바치는 황금의 양이 부족하거나 기준에 미달하면 작위를 거두는 등 가차없이 처벌함으로써 제후들의 권력을 축소시켰다. 제후가 기존의 정치 권력을 더 이상 누릴 수 없게 되자 漢은 황제 중심의 중앙집권국가로 나아갔다.
사회제도
외교
흉노와의 외교정책
실크로드
사회
문화
왕소군
개요
한나라 원제 때의 왕소군(王昭君, 기원전 1세기)은 중국의 ‘4대 미녀’로 유명한 인물이다.
그녀는 원제의 궁녀로 있다가 후에 흉노의 선우였던 호한야 선우(呼韓邪 單于)의 처가 된다.
이름은 왕장(王牆), 자는 소군(昭君)이며, 훗날 태조 문황제 사마소의 이름인 '소(昭)'를 피휘하여 왕명군(王明君) 혹은 명비(明妃)라 불리기도 했다.
생애(서경잡기를 중심으로)
왕소군은 양가자(良家子, 청빈한 농민 집안의 자제) 출신으로 16세의 나이에 궁녀로 선발되어 입궁했다. (원제 때인 BC38년에 전국의 미녀를 선발하여 후궁으로 보충토록 명을 내렸기 때문에 아마 왕소군도 이 시기에 입궁한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에는 궁녀가 많아 황제는 화공의 그림을 통해 궁녀들의 외모를 평가했다. 하지만 왕소군은 가난한 출신으로 화공에게 뇌물을 주지 못했고, 그녀의 얼굴은 못나게 그려져 황제의 총애를 받지 못했다. 후에 흉노의 선우인 호한야선우가 입조하여 한나라의 미녀를 구해 그 비로 삼겠노라고 요구했고, 원제는 그림에 의거하여 왕소군을 흉노로 보내기로 결정했다. 왕소군이 떠날 때가 되어서야 원제는 그녀의 미모가 후궁 가운데 제일이며, 행동거지 또한 한아함을 알게 되었다. 원제는 후회스러웠지만 흉노와의 관계는 중요했던 터라 다른 궁녀로 바꿀 수 없었다. 이에 그 일을 철저히 따져 화공들 모두 기시(죄인의 목을 베어 죽이고 그 시체를 길거리에 내다 버리는 형벌)에 처하고 화공들의 재산을 몰수하였는데 그 재산을 헤아릴 수 없었다. (또한 그녀가 흉노로 떠나가는 도중 날아가는 기러기를 보고 고향 생각에 비파를 탔는데, 이를 들은 기러기들이 그녀의 아름다운 미모에 반해 떨어지고, 이에 낙안(落雁)이라는 칭호를 얻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왕소군은 흉노로 가서 호한야 선우의 처로서 살다가 생을 마감했다.
리텔링
리텔링(retelling)이란 말 그대로 ‘다시 쓴 이야기’이다. 기존의 이야기를 다시 쓰는 이유는 많겠지만 주된 이유는 이야기의 긴장감, 참신함을 얻거나 당대의 이데올로기가 작용하기 때문이다. ‘당대의 이데올로기가 작용하는 부분’은 수업 시간에 다룬 ‘의고파-고힐강’과 어느 정도 연관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史(기록)’란 하나의 텍스트로서 당대의 역사가에 의해 쓰이거나, 후대의 역사가에 의해 변용되는 과정에서 역사가, 혹은 당대의 이데올로기가 작용할 수밖에 없다.”는 고힐강의 주장이 리텔링된 문학 작품에도 다소 작용하기 때문이다. 문학 작품의 대중성에는 독자와의 공감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위 목차에서는 수업의 ‘의고파’에 초점을 맞춰 ‘이데올로기가 작용하는 부분’을 중심으로 왕소군의 리텔링 과정을 서술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