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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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호란
표장(票庄) 또는 회태장(汇兑庄)이라고도 불리며, 청나라 시기부터 전문적으로 환 업무를 담당했던 금융기구이다. 표호를 처음으로 만든 곳이 산서(山西)성의 상인들이었다. 때문에 대표적으로 표호를 언급할 때, 산서표호를 빼놓을 수 없다.
산서상인이 표호를 만든 이유
비교적 풍부한 물자
건륭제 시기때, 산서지역에 부유한 자본가들이 수두룩하였다. 거대한 자본가와 상인들의 출현은 자본조달과 환 업무에 관한 도움이 증가했다.
자본의 운영활동 필요
산서상인들은 장거리 물건판매에 종사하는 상인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또한 그들은 자본이 부족한 상황에서는 사회에서 돈을 끌어다 모았다. 예를 들면, 복건성의 무이차(武夷茶), 안휘성의 곽산차(霍山茶) 등의 상품을 수로를 거쳐 북쪽지역까지 운송판매를 맡았다. 수천 리나 되는 운송 거리와 엄청난 자본물량, 느린 자본회전속도, 엄청난 물건값 등의 상황에서 산서상인들은 상업의 효율성과 편리성을 위해 처음에는 장국(账局)을 설립하여 기본적인 예금업무를 관리하였다. 이는 나중에 표호의 토대가 되었다.
상점 간의 필요
산서상인의 상점은 전국각지에 분포했고, 이는 일정 규묘의 상업네트워크를 구성했다. 각지에 있는 상점의 이익은 산서에 있는 본점으로 돌아오고, 계속 영업을 위해 분점으로 자본의 조달이 발생하였다. 과거에는 표행(镖行)이라는 기구가 안전하게 자본조달을 할 수 있게 도움을 주었다. 하지만 건륭제 이후 사회가 불안정해지자, 표행은 자기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자본조달의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표행이 했던 역할을 점차 표호가 맡기 시작하였다.
영향력
110여년의 역사를 갖고 있는 표호는 중국의 전통은행기구의 신용수준과 품질의 정도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역할을 했다. 산서표호의 북경분점의 관리자였던 李宏龄는 "표호의 분점은 나라 곳곳에 분포에 있었으며, 표호의 명예는 중국상업의 번성함에서 드러났다"라고 말했다. 표호의 핵심이었던 신용제도는 <중국 사회의 지속과 변화>에서도 살펴볼 수 있다. “이익보다는 우정을 위해 대부한다”에서 살펴볼 수 있듯이, 신용을 최우선으로 여겼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표호가 1890년대까지 중국 전체 금융의 반 이상을 점령했다는 견해도 있다.
쇠퇴
경제위기
19세기 70년대부터 서양품들이 들어와 중국 물가를 낮추게 하였고, 여러 상점 관리자들의 부실한 경영이 겹쳐 많은 상점들이 문을 닫았다. 이러한 상점들의 도산은 금융업에 큰 악영향을 끼쳤다. 금융업에서 가장 중요한 신용이 더 이상 제 구실을 못하게 되자, 예금자들은 너도나도 표호나 전장에서 돈을 빼왔고, 이는 뱅크런상황을 초래하였다.
강력한 경쟁상대
청말 전시기에 여러 은행들이 성립되었다. 이러한 은행들 중 가장 표호에 위협이 되었던 것은 관영합작의 호조은행과 교통은행, 그리고 각 성에서 만든 거대한 은행들이었다. 특히 호조은행은 산서표호의 핵심이었던 왕조와의 거래를 가져왔다. 또한 호조은행은 산서표호보다 더 낮은 이자율을 고객들에게 제시하였기 때문에, 표호는 자연히 도태될 수 밖에 없었다.
참고문헌
중국 사회의 지속과 변화, 로이드E.이스트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