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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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서 농업이 시작된 것은 염제 신농씨와 나누어 말할 수 없다. 염제는 중국 농업문화의 창시자로서 중국문명사에 위대한 공헌을 하였으며, 또 한 사람의 위대한 문화적 영웅인 황제 헌원씨와 같은 시기에 태어나 똑같이 중국민족의 시조신으로 높이 추앙되었다.
염제 신농씨는 중국 고대의 신화적이고 전설적인 인물이다. 역사책에 기록되어 있는 바에 의하면, 유웅씨의 수령인 소전이 유교씨의 여인을 부인으로 맞아 염제와 황제를 낳았다. 염제는 강수에서 자랐고, 황제는 희수에서 자랐다. 그래서 염제는 성이 강씨가 되었고, 황제는 성이 희씨가 되었다.
염제는 시조신과 농업신이 된다. 그의 경력은 옛사람들에 의해 신비하고 기이한 이야기로 무수히 윤색되었다. <<3황본기>>는 염제의 어머니 여등이 화양 땅을 지나다가 "신룡과 감통하여 염제를 낳았다."고 한다. 신룡과 교접을 하여 염제를 낳았다는 이야기라 하겠다. 이와 같이 신령하고 기이한 것과 감통하여 시조가 탄생하였다는 사실을 노래하는 신화는 고대로부터 이미 있어왔으니, 이는 인류역사의 아주 이른 시기의 산물이다. 이것은 당초에 "사람들이 그 어머니만을 알고 그 아버지는 알지 못하던" 모계사회의 특징적인 환경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원시시대의 사람들은 여인이 임신하고 출산하는 것에 대한 분명한 지식을 가지고 있지 못하여 아이가 씨족의 삶과 가까운 관계에 있던 어떤 외계 사물(토템동물 같은 것)이 여자의 자궁 안으로 들어와 태어나게 된 것이라는 잘못된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신룡은 중국민족이 가장 숭배하였던 토템(원시적 종교 숭배의 한 형태)이다. 위의 전설은 염제를 용의 후예나 용의 화신으로 바꾸어내어 비할 바 없이 존귀한 존재로 만들어 놓고 있는 것이다.
전설은 염제를 "사람의 몸에 소의 머리를 가진 인물"이라고 묘사한다. '소의 머리'로 이야기하는 것은 염제 씨족이 소를 그 씨족의 토템의 하나로 삼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원시 사회에서는 고기를 잡아 생활하고 사냥을 하여 먹고 살던 시기의 뒤에 농업경제 시기가 출현한다. 농업의 출현과 발전은 고대의 인간들이 대자연을 정복하여 위대한 승리를 거두게 만들어 준다. 인류역사가 단순하게 자연의 산물을 이용하여 살던 시기로부터 벗어나 자기 스스로가 생산한 물건을 가지고 살아가는 시기로 접어들게 되고, 인류의 삶은 원시 상태를 탈피하여 문명세계의 문턱을 넘어서게 되는 것이다. 어로와 수렵의 시대에는 중요한 가축들 중 하나였던 소가 농업시대로 들어가면 가장 중요한 가축으로 위상이 달라진다. 이것이 그것의 문화적 의미를 다시 두드러지게 드러내는 작용을 하는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신농이 그 자신의 문화적 의미 위에 소의 형상을 중첩시키기에 이르렀다는 것은 그리 괴이한 이야기라 할 수도 없는 일이다.
옛날 중국사람들의 마음속에 염제는 민족을 행복으로 이끌어 가는 숭고한 사명을 띠고 있는 인물로 받아들여졌다. 그는 농업을 발전시키는데 커다란 능력을 발휘하였고, 저 높디높은 하늘의 전폭적인 도움까지 이끌어 낼 수 있었다는 이유 때문이다. 전설은 "신농의 시대에는 하늘이 곡식의 비를 내리고, 신농은 그것에 맞추어 땅을 갈아 곡식을 길렀다."라고 한다. 이와 동시에 "아홉 개 우물이 저절로 뚫렸고" 무수한 우물과 샘이 흘러넘쳤다고도 한다.
염제 신농씨는 쟁기, 도끼, 호미 등 농업기구를 발명하여 백성들에게 농경을 가르쳤다. 신농은 사람들이 뽕나무를 심고 마를 기르게 하고 잠사와 마 껍질 실로 옷감을 짜도록 가르쳐서 의복을 만들어 내었다. 신농은 또한 도기 그릇을 만들어 사람들이 생활에 편리하게 사용하도록 하였다. 그는 해가 중천에 떠올랐을 때 장을 열도록 하여 처음 시장제도를 만들기도 하였다. 5현금을 제작하여 연주토록 해서 사람들의 문화생활을 활성화시킨 것도 신농이었다.
또 하나, 염제 신농씨의 위대한 공적은 "처음으로 백가지 풀을 먹어보고 약성을 알아내서 의약의 역사를 개시"하여 의약의 신, 중국의약학의 시조가 되었다는 점이다. 그는 백가지 풀을 두루 길러서 중약학을 개창하고 중국의 풀로 약을 삼아 무수한 사람들을 치료하였다.
염제의 씨족은 후에 황제의 씨족과 연합하여 남방의 강적인 구여씨족을 탁록의 들판에서 격파하고 치우를 죽인다. 염제와 황제는 강대한 염제황제연맹을 겷성하고 황제가 최고 우두머리가 된다. 염제는 만년에 남방을 순수하다가 피로가 누적되어 병을 얻고 도중에 죽는다. 일설에는 백성들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백가지 약초의 맛을 보다가 불행히도 죽게 되었다고도 한다. 염제는 장사(長沙) 땅 다향의 발치에 묻혔으니 이것을 다릉이라고 한다. 서기 967년 송나라 태조는 사람을 파견하여 전국의 옛 묘지를 돌아보게 하고 염제의 묘에 사당을 지어 제사를 올리게 하였다. 제사는 오늘날까지 천년의 역사를 이어오고 있다. 염제의 릉침은 황궁의 양식을 따라 건조되었는데 기세가 웅대하고 건물들이 한데 어울려 장관을 이루고 있다.
전설 속의 염제 출생지인 섬서성 보안시 위하의 남쪽 기슭에 있는 곡천촌에는 염제신농의 사당이 있다. 사당은 남쪽으로 진령, 북쪽으로 위수와 접하여 있고 주변 풍치가 유려하다. 염제릉 신농사와 황제릉은 똑같이 중국민족의 성지이고 매년 뿌리를 찾아 시조를 알현하려고 하는 국내외의 염제와 황제 후손들이 무수하게 찾아와 엎드려 경배를 드리는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