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안스카이
위안스카이(원세개, 袁世凯)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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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59년 8월 20일 중국 하남성 항성현 |
사망 |
1916년 6월 6일(57세) 중국 하북성 북경 |
직업 | 정치가, 군인 |
위안스카이(원세개, 중국어 정체: 袁世凱, 간체: 袁世凯, 병음: Yuán Shìkǎi, 1859년 8월 20일 ~ 1916년 6월 6일)는 중국 허남성 항성현 출신으로, 중국 청나라 말기의 무관(武官), 군인이며 중화민국 초기의 정치가이자 중화제국의 황제이다.
목차
개요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활동한 중국의 정치가이자 군인. 1882년 조선의 임오군란을 계기로 조선에 파견되어 활약했으며 갑신정변에도 개입하여 조선에 대한 청나라의 영향력을 확대시키며 정치적 입지를 다져나갔으며 북양군을 신식화 하는 데도 큰 기여를 한다. 19세기말 변법자강 운동에 찬성하는 듯한 입장을 보였으나 곧 이를 배신하고 변법자강 운동을 좌절시키고, 이를 계기로 서태후의 신임을 얻게 된다. 이후 의화단 진압에도 큰 공을 세우며 출세가도를 달려 외무부 총리교섭통상대신까지 오르나 서태후 사망 이후 선통제가 즉위하고 순친왕이 섭정을 시작하면서 정계에서 잠시 물러나 있게 된다. 하지만 신해혁명이 발생하자 다시 군권을 장악하게 되고 청나라 황실을 마음대로 조종하게 된다. 이후 잠시 혁명군을 진압하였으나 손문과 타협하여 청나라를 무너뜨리고 중화민국의 대총통으로 취임한다. 그 후 독재를 강화하여 황제체제로의 회귀를 선언하였으나 3개월 만에 이를 취소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한다.
명칭
국립국어원의 규정에 따르면 “중국 인명은 과거인과 현대인을 구분하여 과거인은 종전의 한자음대로 표기하고, 현대인은 원칙적으로 중국어 표기법에 따라 표기하되, 필요한 경우 한자를 병기한다.” 과거인과 현대인을 가르는 기준을 ‘신해혁명’으로 보고 있는데, 위안스카이의 생몰년은 청나라 말기에서 중화민국 초기로 신해혁명에 걸쳐있지만 대부분의 생애는 신해혁명 이전에 해당하며, 대체로 그와 함께 등장하는 인물들은 청나라 말기에 활동했던 인물들이 많고 이들의 인명은 한자음으로 표기되므로 이 문서에서는 위안스카이 대신 ‘원세개’라는 명칭으로 통일하여 서술한다.
생애
출생과 입양
1859년 9월 16일 중국 허남성(河南省) 항성(項城)에서 원보중과 후처 유씨의 사이에서 태어났다. 위안스카이의 친부인 원보중은 아들을 얻지 못했는데 동생 원보경이 위안스카이를 친애하는 모습을 보고 그의 양자로 입양시켰다.
과거 낙방과 군인의 길
군인으로서 첫 커리어를 쌓기 시작한 원세개는 사실 과거에 응시했던 전력이 있다. 진사 시험에 두 번 응시하였으나 어렸을 때부터 글공부보다는 무예에 관심이 더 많았던 탓인지 모두 낙방했다. 결국 양아버지인 원보경은 자신과 의형제를 맺은 오장경 밑에 들어가서 일하면서 공부를 계속하게끔 하였다. 오장경은 당시 청조에 막대한 영향력을 지니고 있던 북양대신 이홍장의 참모였으며, 이홍장에게 매우 큰 신임을 받고 있던 사람이었다. 오장경은 원세개의 군사적 재능을 알아보고 그에게 영무처의 일을 맡게 했고 이로써 군인으로서의 삶을 시작하게 된다.
조선 출병
원세개는 우리나라의 근대사의 주요 사건들에서 자주 등장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그는 조선에서의 파병을 계기로 입지를 다져나간다. 1882년 임오군란이 발생하자 명성황후는 청나라 측에 원병요청을 하는데 이 때 파병된 부대가 오장경의 부대로 원세개가 소속되어 있었던 부대였다. 이 때 원세개는 영무처를 관할하는 임무를 맡게 된다. 임오군란을 진압하고 임오군란의 배후로 지목되었던 흥선대원군 납치를 주도한 것도 바로 오장경과 원세개였다. 오장경은 파병 이후 원세개가 보여준 모습을 보고 그 능력을 인정하였고 이홍장에게 건의해 ‘동지’라는 벼슬을 받아 마침내 관료의 길을 걷게 된다. 이후 오장경은 원세개에게 군대 훈련 등의 업무는 물론 외교 업무도 맡길 정도로 그를 신임했고 2년 후 오장경이 귀국하자 원세개는 청나라 군대에서 2인자로 등극한다. 그 후 갑신정변이 일어나자 갈팡질팡하던 오조유를 설득하여 과감하게 군대를 이끌고 개입하였고 개화파가 보위하고 있던 고종을 빼내는데 성공한다. 이처럼 조선에서 발생한 중대한 사건에서 발 빠른 대처로 점차 그에 대한 평판은 좋아져 갔다. 조·청 상민수륙무역장정 등이 체결되는 등 조선에 대한 청나라의 경제적 영향력이 확대되던 시기도 바로 이 때였다. 이후 모친의 병세로 인해 잠시 귀국하였다가 이홍장을 대면하게 된다. 이 때 이홍장은 그가 조선의 정세를 꿰뚫고 있음을 알아보고 다시 총리교섭통상사로 임명하여 조선에 파견한다. 그는 조선에 머물면서 조선의 내정과 외교문제에 관여했으며 일본, 러시아를 견제하며 조선에 개입하는 것을 저지하려고 했다. 조선에 머무는 동안 그는 조선의 다른 공사나 총영사와 달리 상국의 대신으로서의 지위를 내세우려 했고 이로 인해 고종과 명성황후 부부와 마찰이 생기기도 했으며, 타국 공사들에게도 오만하다는 평을 듣기도 했다. 원세개 또한 그런 갈등 상황을 탐탁치 않아하고 청나라로 돌아가게 해달라는 요청을 여러 번 하였지만 거절당하였다. 하지만 조선에 머무는 기간이 길어질수록 그의 벼슬은 점점 높아져 갔는데, 1890년 도원(道員)이라는 벼슬을 얻었고 2품 직함까지 받아 관모의 술이 붉은색으로 바뀌었으며 감사(監司)대관이 되었다. 1894년 동학 농민운동이 발생하였는데 이 때 출병을 고민하던 원세개는 일본 측의 계략에 말려 본국에 출병 요청을 하게 되고 이를 빌미로 일본에서도 조선에 출병하게 되는데 이는 결국 청일전쟁의 단초가 된다. 동학농민운동이 진압된 후 전운을 미리 감지한 원세개는 자신의 병세가 악화되고 있다는 이유로 귀국 요청을 하였고 당소의에게 모든 직무를 넘기고 천진으로 돌아온다. 하지만 전쟁이 발발하자 이홍장은 그를 다시 요동으로 보냈지만 전쟁은 결국 시모노세키 조약의 체결로 청나라의 패배로 끝이 난다.
신건 육군의 창설과 개혁
청일전쟁의 패배로 개혁의 필요성을 절감한 광서제와 청나라 조정은 군제 개혁에 힘쓰고 있었다. 마침 광서제는 원세개를 불러들여 그를 군무처의 장경(章京)으로 임명한다. 처음 보직된 직책은 고문역할에 불과했지만 점차 군무처 대신들에게 인정받게 되었고 군무처 대신들은 원세개를 새로운 군대를 맡기에 적격인 인물이라면서 추천하고 조정에서 이를 승인하여 천진에 있는 정무군(定武軍)을 맡기에 이른다. 그는 병력을 더 모집하고 이름을 신건(新建)육군으로 바꾸었는데 이 부대는 훗날 원세개의 정치적 입지를 지지하는 강력한 바탕이 되어 그가 승승장구 할 수 있는 기반으로 작용하게 된다. 원세개는 병과 분리, 장비 현대화, 서구 군관 초빙, 서양식 훈련 등의 개혁을 추진해나간다. 또한 군율을 엄격하게 다스리는 한편, 병사들에게 급료 지급하는 일을 직접 감독하여 갈취되는 일이 없도록 하였다. 그런데 1896년 4월 원세개를 탄핵하는 상소문이 올라온다. 그가 병사들의 급료를 가로채고 무고한 사람들을 죽인다는 등의 내용이었다. 하지만 그 조사를 영록이라는 직례총독이 담당하게 되고 영록에게 온갖 아부를 한 덕에 탄핵을 모면했을 뿐만 아니라 1897년 7월 조정으로부터 직례 안찰사라는 직위를 수여받기까지 한다.
변법자강운동에 대한 배신
한편 청일전쟁 이후 군사적 개혁 이외에도 정치제도 개혁, 입헌주의, 근대적 학교 설립 등 중국 사회 전체에 대한 변법을 시행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고조되고 있었다. 그러던 중 1897년 11월 독일군이 선교사 두 명이 살해되었다는 명분으로 교주만을 점령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로 인해 열강의 침략이 본격화 되었다는 위기의식이 더욱 더 강해졌고 일본의 메이지유신을 모델로 삼은 유신파들이 변법을 주장하며 광서제에게 변법을 촉구하는 상소를 올렸고 광서제는 이를 받아들임으로써 무술변법이 개시된다. 하지만 무술변법은 수구파의 극렬한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이를 저지하기 위해 결집한다. 수구파의 대표적 인물이자 조정의 실권자인 영록이 서태후와 함께 광서제를 폐위시키려고 한다는 소문이 세간에 돌기도 할 정도로 광서제와 유신파에 대한 반발은 컸다. 유신파에게는 군권을 가진 사람이 없었기에 이들의 개혁은 더욱 위태로워 보였다. 그런데 유신파의 대표적인 인물로 강유위, 양계초가 있었는데, 원세개는 강유위와 자주 술자리를 갖기도 하고 강유위가 설립한 ‘강학회’에도 참가하였고 기부금을 내기도 할 정도 강유위와 친분이 두터웠다. 유신파들에게 신건 육군의 군권을 가진 원세개를 개혁에 끌어들인다면 적지 않은 힘이 될 것이 분명했다. 그리하여 유신파 중 담사동은 원세개를 설득하여 영록과 서태후를 제거할 계획에 협조할 것을 약속받고, 광서제도 그를 승진시켜 충성심을 자극하려 한다. 하지만 한편으로 원세개는 수구파의 실권자인 영록에게 도움을 받았던 적이 있는 영록의 심복이었다. 원세개는 유신파와 수구파를 저울질한 다음 유신파가 상당한 열세에 있다고 판단하고 유신파를 배신하고 서태후에게 이를 밀고해버린다. 원세개의 배신으로 인해 유신파는 숙청되고 광서제는 구금당하면서 무술변법은 실패로 돌아가고 만다. 하지만 원세개는 밀고 덕분에 서태후에게 신임을 얻게 되고 더욱 더 출세하는 기회가 된다.
의화단 진압
변법자강운동 이후에도 서태후의 마음을 얻기 위해 나날이 노력하던 원세개는 외국 교회와 현지 주민과의 마찰이 심한 산동지역으로 군대를 이끌고 가서 훈련하라는 명을 받는다. 그 때 산동순무를 맡고 있던 사람은 육현이라는 사람이었는데 외세에 대한 반감이 있던 탓에 기독교를 공격하던 의화단 활동을 사실상 묵인하고 있었다. 원세개는 이를 조정에 보고하여 육현을 산동순무에서 해임되게 하고 자신을 산동순무가 되게 하는 데 성공한다. 이 때 그는 포교활동 금지를 철폐하고 선교사들과 주민 사이의 갈등이 커지지 않게 소송 사건을 처리하는 동시에 의화단의 폭력적인 약탈이나 납치 등에 대해서는 엄격하게 금지하였다. 한편 서태후는 광서제를 폐위시키고 자신의 아들을 황태자로 삼으려고 하나 서구 열강들의 반발로 실패한다. 이에 서태후는 의화단을 이용해 열강에 대적하려하자 열강들은 연합하여 군대를 이끌고 북경으로 진격해나간다. 이 와중에 원세개는 서태후로부터 조정에 지원군을 보내라는 명령을 여러 번 받는데 매번 산동을 지켜야한다는 핑계 등으로 명령에 응하지 않거나 소수의 병력만을 보내면서 한편으로는 산동성 내의 외국인들을 보호하는 조치를 내리기도 하면서 열강과 서태후 사이에서 교묘한 줄타기를 한다. 항명으로 서태후의 마음을 잃을까봐 염려한 원세개는 서태후가 서안으로 피신할 때 은과 물자를 모아서 보내주고 명령에 충실히 따르는 등의 모습을 보인다. 그 결과 원세개는 서구 열강에게 우호적인 인상을 남기면서 서태후의 마음도 잃지 않는 데 성공한다. 뿐만 아니라 열강과의 전투과정에서 영록이 통솔하던 무위군이 궤멸되면서 중국에서 근대화된 군대 중 살아남은 건 원세개의 군대가 유일했고 원세개의 영향력은 확대되는 것은 필연적이었다.
신정(新政)시기
서태후는 열강들에게 참패하면서 큰 충격을 받고 개혁에 대한 의지를 천명하며 ‘신정’을 선포한다. 한편 1901년 이홍장이 사망하자 서태후는 원세개를 직례총독 및 북양대신을 대행하게 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직례총독 및 북양대신으로 임명되고 각종 요직을 겸하게 된다. 이때부터 그는 각종 개혁에 착수한다. 우선 외국의 징병제도를 본받아 훈련 규칙과 신병 모집 요강을 수정하고 신병을 모집한다. 또한 군정사를 창설하는 등 군 관련 조직을 개편하였고 상비군 훈련에 열중한다. 또한 경찰제도인 순경국을 설치하고 성경제를 전국에 확대 시행한다. 또한 조정에서 지시한 기업 진흥 정책을 충실히 집행하였고, 직례 공예총국을 창설하여 공업과 농사기술을 연구하도록 하였다. 또한 근대식 학교 설립과 전국적 보급을 추진했는데, 이러한 흐름 속에서 천 년 넘게 이어져온 과거제까지 폐지했다.
낙향
1908년 11월 14일 광서제가 병사하고 이튿날 서태후도 사망한다. 그리고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 부의가 즉위하였고 서태후가 사망 직전에 섭정왕으로 임명한 광서제의 동생인 순친왕 재풍이 모든 일을 맡게 된다. 황실의 거대한 두 권력자가 사망하자 조정에서는 원세개에 대한 두려움이 더 커져만 갔다. 그 때문인지 강유위, 조병린, 어사 진전 등이 그를 탄핵해야 한다고 순친왕에게 연달아 상소를 올렸고 마침 순친왕은 변법운동 시기에 원세개가 배신한 일 때문에 그를 증오하던 인물이었기에 그들의 건의를 받아들이기로 한다. 당시 원세개는 병을 얻어서 다리가 좋지 않았던 참이었다. 그리고 1909년 1월 2일 순친왕은 원세개에게 병세를 이유로 그를 해임시키고 원세개는 잠시 권력에서 밀려나고 은거 생활을 시작한다.
신해혁명과 총통 취임
하지만 혼란스러운 국내외의 정세는 다시 원세개가 권력을 쥘 기회를 다시 열어주고 있었다. 이미 은거 생활하는 동안 북양군에 심어져 있던 원세개 세력은 청 조정이 군권을 황실로 넘기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그를 더 그리워하는 모습을 보였고 그가 낙향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주 찾아가 문안하기까지 하였다. 그러던 중 1911년 10월 10일 혁명당원들이 무창에서 봉기를 일으켰고 전국의 각 성에서 철도 국유화에 반대하는 봉기가 일어났다. 원세개와 가까이 지내던 관리들은 오직 원세개만이 봉기를 진압할 능력을 갖췄으며 그를 총독으로 삼으라고 주장했고 각 열강들도 원세개만이 혁명군을 소탕할 수 있다면서 압박하였다. 이에 못 이긴 순친왕은 마침내 10월 14일 원세개를 호광총독으로 임명되었고 혁명군 토벌 임무를 맡긴다. 그러나 자신을 해임시킨 순친왕에게 불만을 품고 있던 원세개는 두 차례에 걸쳐 자신의 요구 조건을 관철시켜야 명령에 응할 수 있다고 답하였고 혁명군의 기세가 더 거세지자 재풍은 어쩔 수 없이 원세개를 그에게 해군과 육군 지휘권을 넘김은 물론 그를 총리대신으로 임명하고 내각을 조직할 권한을 부여했다. 군대를 인계받은 원세개는 11월 9일 혁명당 악군 총사령 황흥으로부터 함께 청조를 무너트리고 한족 정권을 세우자며 회유한다. 이미 청조에 대한 충성은 있지도 않았으며 오히려 황제가 되고 싶은 욕망으로 가득했던 원세개였다. 그는 혁명당의 제안에 기뻐하며 혁명당에 사절을 보내 협상을 시도하지만 입헌군주제 도입을 주장한 원세개의 협상안을 거절한다. 이에 원세개는 지금 당장 협상에 임하는 것보다는 어느 정도 우위를 확보한 다음에 협상을 재개하는 것이 더 유리하다고 판단하여 한양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혁명군은 무창으로 퇴각한다. 자신의 목적이 달성되었다고 생각한 그는 더 이상 진격하지 않았다. 무창 점령 후 3일 뒤 남부 지역의 독립된 성들은 각 성 대표연합회를 구성하고 원세개와 정전하기로 합의한다. 각 성 대표연합회는 무력으로 원세개의 군대를 이기기에는 무리라고 판단하였고 그를 끌어들이기만 한다면 청 왕조를 멸망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였고 그가 공화정 체제 수립을 지지할 경우 그를 대총통으로 추대하겠다는 결의안을 통과시킨다. 그 후 원세개와 평화회담을 개시하였고 당소의의 건의로 국민대회를 개최하여 공화정 체제 수립 여부를 결정하자고 하였다. 국민회의는 3차에 걸쳐 개최되었고 양측은 합의에 이르렀으나 손문이 돌아오고 남방 측에서 그를 임시정부 총통으로 선출하자 원세개는 합의안을 인정하지 않았다. 1912년 1월 1일 손문은 남경에서 임시정부 총통으로 취임하면서 중화민국 건국을 선포하였다. 그리고 원세개가 총통을 맡아야 한다는 의사를 표시했다. 하지만 원세개는 이를 믿지 않았고 한동안 둘 사이의 줄다리기가 계속되었다. 원세개는 혁명파들의 요구를 이행하기 위해서는 청 왕조를 종식시켜야 했고 청 황실을 압박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원세개는 루이 16세를 언급하면서까지 황실에게 강력한 경고 메시지를 보냈다. 그러자 청 황실은 분노하며 이에 반발했고 왕공 대신들은 평화회담에 반대하는 종사당을 결성하면서 격렬히 저항했다. 그러나 종사당의 지도자인 양필이 혁명당원의 테러에 의해 암살당하자 반대 여론은 쥐죽은 듯 가라앉았다. 손문은 점점 원세개를 압박해오자 양측은 여러 차례의 협상을 거쳐 황제의 퇴위조건에 대해 합의했다. 1912년 2월 12일 융유태후는 선통제의 이름으로 칙령을 내렸고 이로써 마지막 황제 부의는 청나라는 공식적으로 사라졌고 2천년 넘게 지속되어오던 왕조 체제는 종말을 고했다.
2차 혁명 진압
바로 그 다음날 손문은 협상안에 따라 원세개를 임시정부 대총통으로 추천하는 교서를 발표했고 이틀 뒤 그는 마침내 임시정부의 대총통으로 선출되었고 3월 10일 임시 대총통으로 취임하였다. 당시에는 아직 중화민국의 정치체제를 구체적으로 구성하는 정식 헌법이 제정되기 전이었고 ‘중화민국임시약법’이 그 역할을 대신하고 있었다. 이 법은 내각책임제를 국가구성 방식으로 채택하고 있었고 임시 참의원이 설립된 10개월 내에 국회의원 선거를 해야한다고 규정하고 있었다. 임시 참의원은 국회를 양원제로 채택하기로 결정하고 국회의원 선거를 시행한다. 이 선거에서 이사장 대리 송교인은 열렬히 선거활동을 벌였고 국민당은 참의원과 중의원 양원 선거에서 압도적 지지를 얻어 제1당이 되었고 송교인도 참의원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국민당내에서 매우 촉망받는 지도자였다. 원세개에게 내각책임제 하에서 원내 다수당의 유력한 지도자로 주목받는 송교인은 위협적이었고 원세개는 그가 새로운 내각 구성을 주도하여 자신을 총통자리에서 끌어내릴까봐 두려워하여 그를 암살할 것을 지시하였다. 1913년 3월 20일 송교인은 상하이역에서 총격을 입어 부상당하였고 이틀 후 사망하였다. 국민당은 이 사건의 배후를 찾아내어 엄벌할 것을 주장했고 곧 그 배후는 원세개라는 사실이 얼마 지나지 않아 드러났다. 국민당원들은 매우 분개하여 그를 토벌해야한다고 하는 여론이 급속도로 확산되었다. 그러나 원세개는 이에 대한 사과는 일절하지 않음은 물론이고 오히려 이런 반발을 빌미로 국민당 세력을 군사적으로 제거할 기회라고 판단하였다. 그는 군 내부에서 국민당 측에 속한 주요 인물들을 해임하고 국민당을 향해 진격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손문은 군대를 출병하여 원세개를 토벌하기로 결의하면서 ‘2차 혁명’을 일으키기로 결정한다. 이에 따라 남북전쟁이 재개 되었지만 원세개의 북양군에게 패배하고 말았고 2차 혁명은 좌절된다. 2차 혁명이 진압된 후 원세개는 사실상 원세개 천하를 만드는 데 성공하였고 끝없는 권력욕으로 가득찼던 그는 이제 정식 총통으로 취임하길 원했다. 그러나 총통 취임은 헌법에 기초한 절차를 따라야 가능한 것이었다. 하지만 마음이 급했던 그는 총통 선출을 먼저 해야한다는 여론을 조장하였고 이에 따라 총통 선거법이 제정되었다. 이 법에 따라 중의원 회의장에서 총통 선거가 진행되었고 이 회의장은 총통부에서 파견한 군경들이 사실상 포위하고 있었다. 이렇게 강압적 분위기 속에 3차례에 걸친 투표 끝에 원세개는 정식 총통으로 선출되었고 1913년 10월 10일 그는 정식 총통으로 취임하였다.
독재체제
원세개는 점점 더 군주제로 회귀하는 길로 나아가고 있었다. 총통 취임 후 원극정을 휴양을 명목으로 독일로 보내고 빌헬름 2세를 접견하게 했는데 원극정은 빌헬름 2세로부터 중국은 군주제를 시행해야만 한다는 친서를 받아온다. 열강 중 하나인 독일로부터 이러한 말을 듣자 원세개는 군주제에 대한 자신감이 생겼다. 그런 그에게 의회정치와 정당, 책임내각 등은 모두 장애물로 보일 뿐이었다. 총통 취임 후 헌법 제정을 진행해나가고 있던 헌법기초위원회는 ‘천단헌법초안’을 마련하였는데 이는 민주공화국의 기초적 제도인 국회의 입법권 등을 규정하고 있었는데 원세개는 이 헌법이 통과되는 것을 어떻게든 저지하기 위해 헌법초안을 공격하는 한편 헌법기초위원회에 자신의 측근을 보내 압박하려고 했다. 그러나 천단헌법초안은 헌법기초위원회에서 이미 통과되었고 헌법회의에 제출되자 원세개는 국민당을 비난하며 나라를 혼란스럽게 하고 국민을 해친다는 등의 죄로 국민당을 해산시켰고 국민당이 반란을 획책하려 했다며 국민당 의원의 자격을 정지시켰다. 이로 인해 국회 의사정족수가 부족해져 국회를 열 수 없게 되자 남은 의원들은 정부에게 문제를 빨리 해결하라고 촉구했다. 원세개는 각 성의 도독 등으로 하여금 국회를 해산하라는 여론을 조성하게끔 하였고 정치회의를 소집하여 대책을 마련하라고 하였다. 정치회의는 원세개가 바라던 대로 국회를 해산하여야 한다고 건의하였고 이를 수용하는 형태로 원세개는 국회 해산 명령을 내리고, 다음 달에는 각 성의 의회를 해산시키기에 이른다. 그리고 약법회의가 열려 ‘중화민국약법’이 제정되었고 원세개가 이를 공포함으로써 사실상 원세개의 독재체제가 확립되었다. 이 법은 총통에게 국회해산권, 외교권, 긴급명령권, 긴급 재정 처분권 등을 부여했고 참의원을 사실상 무력화시켰다. 같은 해 12월 29일 약법회의에서 ‘총통 선거법‘을 통과시킴으로써 종신총통제가 마련되었고 총통직 세습이 가능하게 하였다. 원세개의 의중을 간파한 원극정을 포함한 측근들은 원세개에게 군주제 실시를 더 적극적으로 권유하기 시작한다.
21개조 조약 조인
그렇게 황제로 가기 위한 발판을 차근차근 마련하고 있던 중 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고 독일에 선전포고를 한 일본은 독일 점령하에 있던 청도를 침략하였다. 이듬해 일본에서 ‘21개조’ 조약 승인을 요구해왔다. 이 21개조 조약은 기존에 독일이 가지고 있던 산동성에 대한 모든 권리 양도, 철도부설과 운영에 관한 일본의 권리 연장과 확대, 일본인 고문 초빙, 중국 내의 일본 병원 학교 등의 토지소유권 인정, 경찰행정과 무기공장의 공동경영, 복건성을 포함한 기타 여러 지역에 대한 철도 부설권 등 중국의 주권을 상당히 위협하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었다. 그러나 황제 체제를 준비하던 원세개는 이 조약을 받아들이면 황제 즉위에 대한 일본의 승인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여 조약 체결에 동의한다.
황제등극과 자진 퇴위
일본의 지지가 확보되었다고 생각한 원세개는 군주제 도입에 탄력을 받았다. 그는 각 성의 군벌들을 불러 군주제에 대한 동의를 받았다. 또한 ‘양도’라는 자는 <군헌구국론>을 지어 원세개의 마음을 얻었고 그를 필두로 하여 군주제 도입을 본격적으로 추진하는 ‘주안회’가 구성되었다. 뿐만 아니라 양도는 각 성의 대표와 인사를 끌어들여 ‘공민청원단’이라는 조직도 만들어 군주제를 찬성하는 청원서를 올리게 한다. 하지만 아직 민중이 군주제를 지지한다고 주장할만한 명분이 부족하다고 생각하였다. 이때, 원세개가 군주제를 옹호하는 여론이 형성되었다고 믿게끔 한 인물이 그의 아들 원극정이었다. 군주제의 그림자가 다시 드리웠을 때부터, 원세개의 황제등극을 누구보다 강력하게 희망한 것도 바로 원극정이었다. 아버지가 황제가 되면 자신이 황태자가 될 것이라는 희망에 아버지에게 계속 군주제 시행을 강력하게 건의해왔었다. 그는 아버지의 마음을 움직이기 위해 여러 가지 일을 조작하기에 이른다. 우선 그는 고향에서 묘지기에게 낡은 돌에 ‘천명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라는 글귀를 새기게 하고 땅 속에 묻어놓았다가 원세개에게 보낸다. 원극정은 이 돌이 원세개의 생부인 원보정의 무덤 곁에서 발견되었고 밤에 불빛이 나타나 1리 안팎을 비췄고 무덤 옆에서 갑자기 자색 나무 한 그루가 올라왔는데 마치 그 모양이 용과 같다고 하면서 속였다. 뿐만 아니라 모든 신문이 군주제를 찬성하게끔 손을 썼지만 「순천시보」만이 군주제에 대해 유일하게 비판하였는데 그는 이 신문이 아버지의 결심을 흔들게 할까 걱정되어 「순천시보」를 위조하여 아버지에게 갖다준다. 하지만 후에 군주제 선포 후 ‘3차 혁명’이 발생했을 때 원세개는 자산이 즐겨먹던 잠두콩을 쌓아온 「순천시보」의 기사 내용이 자신이 보던 것과 다른 것을 발견하고 원극정이 「순천시보」를 조작해서 자신에게 올려왔음을 알고 분노했던 일도 있었다. 한편 양사이는 전국청원연합회를, 양도는 여성 청원단 등을 조직하여 원세개의 황제 즉위를 재촉했고 참정원에서는 소집기간이 긴 국민회의 대신 국민대표대회를 열어 군주제 시행여부를 결정하기로 한다. 원극정을 포함한 원세개 세력이 주도한 국민대표회의에서 군주제 시행을 투표에 부쳐 승인받는데 성공하고 참정원은 원세개를 황제로 추대한다. 원세개는 이를 받아들이고 황제 즉위식을 준비해나간다. 그러나 운남성에서 군주제에 반대하며 공화정을 복구할 것을 주장하며 독립을 선언하였다. 이들은 중화민국 구국군을 조직하여 원세개를 토벌하기로 하였다. 이 와중에 해가 바뀌어 1916년이 왔고 그는 중화제국을 선포하고 연호를 홍헌으로 삼아 그 해를 홍헌 원년으로 삼았다. 하지만 군주제 시행에 대한 반발은 매우 광범위했고 격렬했다. 우선 군주제 시행에 대한 일본의 지지와 지원을 확보했다는 것은 그의 착각에 불과했다. 일본은 21개조 협약이 누설되었다는 이유로 그의 특사를 거절했다. 또한 각 국 공사들도 군주제를 철회할 것을 요구했다. 거기다 그의 사촌동생인 원서정과 원세동 등 또한 군주제에 반대했으며 원세동은 원세개에 대항하기 위해 병력을 모으기까지 한다. 또한 운남의 중화민국 구국군은 사천과 호남 지역등을 점령해나갔고 손문이 이끄는 중화혁명군은 광동, 산동, 호남, 호북 등에서 궐기하여 원세개에 저항했다. 또한 각지에 보낸 토벌군도 매수당하거나 연패하자 원세개는 이미 대세가 기울었음을 깨닫는다. 그는 회의를 소집하여 군주제를 폐지에 대해 논의하고 모두가 이견 없이 군주제 철회를 선포하기로 결정한다. 그리고 3월 22일 군주제 철회 명령서를 발표한다. 하지만 군주제 폐지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권력욕이 남아있던 원세개는 총통 노릇을 하고 싶어했고 내각책임제를 선언하기까지 하며 권력에 대한 집착을 놓지 못했다. 이는 전국적으로 달아오른 ‘반원(反袁)’ 운동에 기름을 끼얹은 꼴이 되었고 광동, 사천, 호남, 강소 등의 각지에서 독립을 선언하였다. 황제 선포 이후 전국이 원세개에 대항했을 쯤부터 원세개는 앓기 시작했고 시간이 지날수록 병세는 악화되기 시작했다. 결국 그해 6월 6일 57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기타
가족관계
원세개는 총 1명의 처와 9명의 첩을 두었고 17명의 아들과 15명의 딸을 낳았으며, 22명의 손자, 25명의 손녀를 두어 총 79명에 달하는 자손을 두었다. 그의 정실인 우씨는 원세개의 총애를 받지 못하고 원세개는 오랜 기간 동안 그녀와 동침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심씨와 5번째 첩 양씨를 총애했다고 하며 특히 심씨를 매우 총애했다고 한다. 또한 원세개는 조선에 파견된 기간 동안 3명의 조선인 첩을 두었는데 첩의 딸 중 한 명이었던 원숙정은 원세개 첩 자녀들의 가정생활을 《나의 아버지, 원세개》라는 글에서 매우 상세하게 묘사한 바 있다.
배우자 본부인 위씨(于氏) 첩실 선씨(沈氏) 첩실 진씨(金氏, 조선인, 안동 김씨 조선 척족) 첩실 리씨(李氏, 조선인, 안동 김씨의 여종) 첩실 우씨(吳氏, 조선인, 안동 김씨의 여종) 첩실 양씨(楊氏) 첩실 예씨(葉氏) 첩실 장씨(張氏) 첩실 궈씨(郭氏) 첩실 류씨(劉氏)
북양군의 군벌화
그가 근대화시키고 직접 훈련시킨 북양군은 그의 사후 북양 군벌의 주축이 된다. 그가 사망한 이후 북양군은 3개의 군으로 분열되는데, 이때 각 군벌의 지도자들은 모두 한 때 원세개의 측근으로 일했던 적이 있었던 인물들로 안휘 군벌의 단기서, 직예 군벌의 풍국장 등이 모두 이에 속한다.
평가
“인생의 전성기에 원세개가 대단한 박력과 능력을 가지고 있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동시에 그의 야망이 철저하게 이기적이었다는 것과 그가 간교하며 믿음을 배반한 자였다는 것도 사실이다.” - 레지널드 존스턴(마지막 황제 부의의 스승).”[1]
“그는 조선의 중국 주재관으로 공직 생활을 시작했으며…1898년 정치제도를 개혁하려던 광서제를 배신하고 악명 높은 서태후의 총신이 되었으며…1911년 공화파의 혁명 기간에는 내각 총리대신의 신분으로 만주 조정을 배신하고 공화국의 대총통이 되었다. 그 대총통의 지위도 처음은 매수에 의해서, 다음은 국회를 해산함으로써 유지했다.…그리고 마지막에 속임수로 군주제를 수립하려다가 자신의 무덤을 팠던 것이다.” - 정문강(丁文江) 박사[2]
생전과 사후를 막론하고 “음모가, 나라를 도둑질한 도둑놈, 위대한 개혁가, 한 시대를 끝내고 새로운 시대를 연 사람, 공화주의자, 황제를 꿈꾼 몽상가” 등 열거하기 힘들 정도의 저주와 찬양을 동시에 들었다. [3]
대체로 전형적인 기회주의자이자 배신자라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변법자강 운동 때 개혁 세력을 배신하여 각종 개혁을 좌절시킨 일과 신해혁명이 발생하자 청조를 배반하면서 당시 국민당 세력과 손잡았고, 총통에 올랐지만 권력욕이 강하여 독재체제로 전환하고 황제체제 선언함으로써 공화국을 배신하여 중국 역사의 결정적인 순간에 3번의 배신을 했다. 물론 그에 대한 평가가 부정적인 것들로만 점철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부분적으로는 그의 군사적 개혁이나 그가 집권했을 당시에 주도했던 근대적 학교 설립, 과거제 폐지 등을 긍정적으로 보는 측면도 있다. 하지만 일본의 황제체제 지지와 21개조 조약 승인을 거래하여 중국의 이권을 팔아넘기려 했다는 모습은 당시 중국인들에게 매국적인 행위로 인식되었고 비춰질 수밖에 없었고 그 이외의 행적으로 인하여 부정적인 평가가 우세하다.
참고자료
허우 이제, 《원세개》, 장지용 역, 지호, 2003
김명호, 《중국인 이야기3》, 한길사, 2014, p.387~426
레지널드 존스턴, 《자금성의 황혼》, 김성배 역, 돌베개, 2008
이상옥, 《신 중화민국사》, 전주대학교 출판부, 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