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조신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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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조 신앙
마조 신앙은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이 신봉하고 있는 민간신앙의 한 종류로, 수신(水神)이다. 수신이란 강우나 치수를 기원하는 대상 혹은 수운과 관련된 신령이다. 고대 중국에서 수로를 이용한 장거리 유통업이 증가하면서 안전한 수운을 희구하는 바람을 담은 신앙으로써, 이들의 바람은 수신에 대한 제사와 사묘 건설로 이어지기도 하였다.(사묘: 중국 민간 신앙의 종교 시설을 통칭하는 말마조는 오늘까지도 중국 연해 지역고 동남아시아, 그리고 세계 각지로 흩어진 화교들이 가장 숭상하는 신령 중의 하나다.
마조의 탄생 설화
송나라 초 복건 지방에서 실존했던 여성으로, 성은 임씨이고 미주서 사람이었다. 생전에는 사람의 화와 복을 예언하던 무녀였다. 죽은 뒤, 사당을 세워 그녀에게 제사 지냈다. 죽은 뒤, 그녀가 살던 고을이었던 미주서에 사당을 세워 제사 지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가 살던 미주서에서 수백 리 떨어진 성돈이라는 마을에 상서로운 현상이 나타났다. 원우 병인년에 돈 위에서 널빤지가 매일 나타났는데 마을 사람들이 매일 가져다 두었으나, 이튿 날이면 항상 그 자리에 돌아가 있었다. 어느 날 밤, 백성들에게 “나는 미주 신녀이다. 그 널빤지가 실로 증거가 되니, 마땅히 돈 위에 내가 묵을 수 있도록 하라”고 전하여 성돈에 사당을 세우게 되었다, 그 후 해마다 수해와 한해 뿐 아니라 한해, 해적 등 문제가 있을 때마다 신녀에게 빌었는데 그 효과가 매우 영험했다고 한다. 그래서 특히 장삿배는 더욱 더 신녀에 인도에 의지하게 되었다.
마조의 출신성분 변화
마조에 대해 서술한 최초의 기록이었던 『성돈조묘중건순제묘기(1150)』에서는 마조가 ‘성이 임씨이고 미주서 사람’이라는 정도만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송나라 때 『선계지』라는 책에서는 아버지의 이름이 ‘임원’이고 어머니가 왕씨라는 기록이 발견되며, 원나라 때 정단학(程端學 1278-1334)의 『천비묘기』라는 책에는 “흥화 보전 도순군의 막내딸”이라는 사실이 덧붙여지며마조 설화를 수록하고 있는 가장 대표적 문헌이라고 할 수 있는 명 말에 제작된 『천비현성록』에서는 “보전 임씨의 딸로, 시조는 당나라 때의 임피이며 아버지 임유각은 도순각이라는 관직에 있고 어머니는 왕씨이며 마조는 1남 6녀의 막내딸이다”라는 상세한 기록이 나와 있다. 뿐만 아니라 마조의 출생에 여러 가지 신화적 요소가 덧붙여진다. 마조의 부모는 마조를 낳기 위해 목욕재계하고 제사를 지냈고, 부모 가문에 대대로 이어진 선행에 감복한 상제가 마모를 점지해 줄 뿐 아니라, 마조가 태어나는 당일에도 방 안이 상서로운 향기와 빛으로 가득 차는 등 신비한 출생적 요소가 더해진다. 이와 같은 요소들은 역사적 사실이 훗날에 발견 된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마조가 ‘천비’라는 최고의 지위로 격상되며 마조가 일반 무녀 출신이라는 것은 숨겨져야 했고, 마조의 출생에 정통성을 부여하기 위해 영광스러운 계보가 훗날에 덧붙여진 것이라고 보는 것이 옳다.
마조에게 부여된 작위
그녀는 선화 연간때 묘액을 하사받았고 ‘영혜현위조순영렬비’, ‘기응자제협정선경비’등의 지위를 하사 받았다. 또한 순희 7년(1180)에 묘액을 하사 받았고 소흥 2년(1182)에 순응 부인에 봉했다. 묘액을 하사받고 부인에 봉해진 마조는 소희 원년(1190)에 이르러서는 영혜비에 봉해진다. 또한 원나라 세조 지원 18년(1281)에 천비로 봉해지고, 청나라 강희 23년(1684)에는 천후로 봉해졌다. 즉, 순서대로 ‘무→부인→비’를 거쳐 천비와 천후로 봉해지는 것이다. 무와 부인, 비를 거치는 국가 공인화 과정은 으레 나타났지만, 오로지 마조만이 천비와 천후로 봉해졌다.
마조 신앙의 역사
송(宋)대
마조가 국가에 의해 그 지위를 인정받은 것은 구체적으로 남송(宋)대 때부터 시작되었다. 선화 연간 (송 휘종/흠종. 대략 1119~1125년까지의 시기)에 노윤적이라는 사람이 고려에 사신으로 파견되어 급사에 갔다가 동해를 지나던 중 거친 풍랑을 만났다. 이에 배 8덟척 중, 7척이 모두 파괴되었으나 오직 노윤적이 탄 배에만 한 여신이 돛대에 올라 빙빙 돌며 춤을 추었고, 갑자기 평안을 얻어 무사히 바다를 건넜다는 것이다. 공이 이 여신의 정체에 대해 주위 사람들에게 묻자, 동료였던 보의랑 이진이 마조 신앙을 받들어 왔기에 상세히 설명해 주었다. 노윤적은 항해에서 돌아와 조정에 보고하자, 마조는 ‘순제’라는 묘액을 최초로 하사받는다. 마조 신앙이 지위를 획득한 것을 단순히 그 영험함 때문이 아니라, 당시 시대적 배경 속에서 고찰해 보아야 한다. 공간적 배경 : 당시 복건 지방에서는 巫風이 다른 지역보다 농후했으며, 사회적 안정과 경제적 번영으로 민간 신앙이 급속도로 확산되고 있었다. 또한 사묘(祠廟 : 신위나 영정을 모셔두고 제사를 지내는 건축물) 신앙적/사회적 공간으로 부상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중앙 정부는 봉호와 묘액 제도를 제도화시킴으로서 사묘를 규제하는 주요 수단으로 자리매기고자 했다 즉, 중앙의 권위에 심각한 위해를 조성할 가능성이 있는 사묘들은 봉호와 묘액이라는 제도를 통해 적절한 지위를 하사하고 흡수함으로서 정부의 지역장악력을 높이는 동시에 중앙의 권위에 위협이 된다고 판단되는 사묘들을 견제한 것이다. 시대적 배경 : 실존했던 평범한 여인에 관한 신성(神性)을 국가적 차원에서 공인할 뿐 아니라 적극적인 후원을 한 것은 이례적인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마조 신앙의 영험함이 담긴 설화가 국가에 의해 공인되어 묘액을 하사 받는 등 널리 알려진 데에는 남송 정부의 시대적 상황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보고 있다. 또한 남송 정부가 수도를 북방 지역인 ‘개봉’에서 당시의 ‘임안’으로 불리었던 항주로 천도한 정황에도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즉, 북방 정권을 포기하고 강남 지역으로 피신한 남송 정부는 동남 연해 지역에 대한 지배력을 높이고자 했을 것이며, 이러한 과정에서 마조 신앙의 신조(神助)를 얻을 수만 있다면, 해상이나 연해 지역에서 발생한 소란을 진압하거나 무역선을 운행하는 데에 관부 측의 사기를 북돋을 수 있었고, 잠재적인 소요 가능성을 진압하는 계기가 될 수 있었다. 동남 연해 지역 백성들이 해상무역으로 먹고산 지가 오래되었다. 특히 복건이 심했다. 복주, 천주, 장주 지역은 산과 바다 사이에 위치해 농지 부족으로 개간할 땅이 좁아 바다에 나가지 않으면 먹고 살기 어려웠다. 자연히 거친 파도에 잘 적응하고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풍습이 생겼다. 장주 지역이 더욱 그러했다.
원(元)대
마조는 송대에 ‘순제’라는 묘액을 하사 받은데 이어, 원대에는 ‘천비(天妃)’로 그 위치가 승격되었다. 남송을 멸망시킨 몽골의 원조는 이전보다 더 적극적으로 마조 신앙을 후원했는데, 이는 원나라의 시대적 배경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원나라의 세조인 쿠빌라이 칸은 강남 지역의 쌀을 수도인 대도로 운송하려고 했다. 처음에는 해안을 따라 쌀을 운반하려 했으나, 양이 너무 많고 위험하다고 느꼈다. 기존 운하는 수세기 동안 방치되어 하천 주변에 집들이 난무했고 하천에는 보리를 가득 심어 운영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원 조정은 내륙의 하천들을 잇는 대운하를 새로이 건설했다. 운하의 건설과 유지비용이 엄청났지만, 쌀을 대규모로 운송하는 데에는 훨씬 안전하고 효율적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항주에서 대도에 이르기까지 1760킬로미터의 대운하가 연결되었고, 매년 300만 석이 넘는 조운이 안전하고 신속히 대도에 도착할 수 있었다. 역대로 해도 조운에 대한 의존도가 가장 높았던 원조에게 있어 해운의 안전은 곧 수도의 운명을 좌우할 만큼 중요해진 것이다. 이러한 배경에서 이전 시대부터 해운의 보호신으로 대중성을 확보해오던 맞 신앙은 1278년(지원 15년) 천비(天妃)라는 봉호를 받았으며, 이를 시작으로 모두 9차례나 책봉을 받는다. 마조 신앙을 공인화 함으로써 조정 역시 간절한 마음으로 그 효험에 기대고자 했을 것이며, 동시에 조정의 능력 밖에 있었던 능력 범위 밖의 일을 마조 신앙에게 맡김으로써, 백성들의 민심을 달래고자 했을 것이다. 이는 쿠빌라이가 마조를 천비로 봉할 때 내린 조서의 “바라건대 신이 바닷길을 보호하고, 뱃사람들을 조운을 함에 신에게 의지함을 목숨처럼 여겨, 신의 위엄이 크게 빛나고 영험함이 뚜렷이 드러날 것이다.” 라는 부분에서 원 조정의 간절함을 알 수 있다. 이 이후에도 원나라 때 이루어진 9차례의 봉작 하사의 결과, 마조는 국가적인 해신(海神)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분위기는 명초 영락제가 수도를 북경으로 옮기고 해도를 이용한 조운을 정지시키면서 자연스럽게 사라졌다. 하지만 조운 루트를 대운하로 일원화시키고 해금 정책이 강화되면서 정부에서 마조 신앙을 중시해야 할 이유는 사라져 버린 셈이 되었다.
명(明)대
태조 집권 초기, 명 정부의 반대 세력이 남쪽에서 해상까지 범위를 넓히며 활동하고 왜구의 소란이 잇따르자 태조는 “나무 한 조각도 바다에 띄우지 말라”라고 명하고, “사사로이 외국인들과 교역을 하는 사람은 엄한 죄로 다스린다”라는 해금령을 내린다. 조정은 일상적으로 이루어지던 공무역을 축소하고, 일반인들의 사무역은 아예 금지시켰다. 관부에서도 마조 신앙을 헌창해야 할 이유가 줄어들었다. 그러나 이렇듯 해금 정책이 실시되고 마조에 대한 국가 권력의 관심이 저조했던 명대의 마조 신앙은 크나큰 타격을 받을 만했으나 실제로 그러지 않았다. 해금령이 실시되고 조운이 대운하로 일원화된 이후, 마조의 성격은 해신(海神) 뿐만 아니라 하신(河神)의 기능도 수행하게 된다. 해금령이 반포되자 내륙의 하도 운성의 안전을 희구하는 수신으로 변용되어 민간 사회에 수용된 것이다. 대운하를 따라 마조 신앙이 내륙으로 자연스럽게 침ㅌ바다의 해안선 뿐만 아니라 대운하가 지나는 요충지에도 마조 신앙이 곳곳에 존재하게 되었으니, 이를 항주 출신의 낭영(1487~?)이라는 사람은 명초까지만 해도 조운으로 인해 중시되었던 마조 신앙이 “이후부터 바다 선박에 대한 영험이 하나같지 않고, 사방에 은혜를 입은 사람들이 각기 천비묘(마조의 사묘)를 세우니, 지금 각지에 마조가 존재”하는 상황이 되었다는 말에서, 마조 신앙이 해금령으로 인해 더욱 번성하는 결과를 가져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따. 요컨대, 조운과 마조 신앙의 관련성, 대운하를 이용하는 유통량의 증가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청(靑)
청나라 때에 이르면, 마조 신앙에는 국가 수호신의 역할이 더해진다. 이는 청나라가 대만을 정벌하는 과정에서 마조가 전쟁신으로 부각되었기 때문이다. 청조의 대만 정벌 : 대만의 반청 운동을 정벌하기 위해 강희제가 시랑을 정해장군으로 파견하여 대만을 평정한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시랑 장군이 대만을 공격할 때 배에 마조 신앙을 모시고 마조의 이름을 내세워 공격했기 때문이다. 참전한 병사의 대부분도 연해 지역 출신으로, 마조 신앙이 퍼뜨려져 번성했던 지역 출신이었다. 그리하여 해전에서 마조가 군대를 돕는다는 신화가 점차 퍼져나갔고, 이들을 통솔하는 입장에 있던 관리자들은 마조 신앙을 이용해 군의 사기를 높이고자 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대만에까지 퍼져있던 마조 신앙을 이용해 청나라에 의한 대만 정복에 정당성을 부여하려던 의도도 있었다.
현대 중국 대륙의 마조 신앙
청조 멸망 후 마조 신앙은 국가가 주도하던 방향에서 벗어나 대중적인 신앙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그러나 1949년 신중국 성립 후 무신론이 확산되고 모든 재산의 국유화(1955~1956)가 이루어지면서 종교는 경제적으로 존립 기반을 잃게 되었고, 이에 따라 마조 신앙을 비롯한 민간 신앙 역시 급속히 쇠락한다. 또한 문화혁명이 진행되면서 모든 사묘와 신상이 파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