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천안문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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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fn7101 (토론 | 기여)님의 2016년 6월 27일 (월) 06:28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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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 천안문 사건

배경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정책

1978년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정책이 점차적으로 실시되었다. 여기서 개혁은 근대적 생산력 발전을 통해 사회주의를 실현하는 시장경제화를 의미하고, 개방은 폐쇄적인 자력갱생정책을 포기하고 국제시장에 참여함을 의미한다. 농업, 공업, 경제 방면에서 많은 변화가 있었는데, 농업 부문에서는 1983년 인민공사가 공식적으로 해체되었고, 소유는 집체가 농사 및 생산물은 각자 가지는 소유권과 사용권의 분리가 이루어졌다. 이를 농가생산도급제라고 하는데 개인이 생산한 농산물을 개인이 갖게 되는 것으로 개개인이 더 열심히 일함으로써 농민소득이 향상되는 효과를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일시적인 것으로, 소유권과 사용권의 분리는 농지 파편화, 효율성 저하, 빈부격차 확대 등의 문제들을 야기하게 되었다. 공업부문에서는 민영기업이 많아졌고, “철밥통을 타파하자”라는 주장 하에 고용의 유연화가 이루어졌다. 80년대 중반부터 신규사원을 자유 해고시킬 수 있고 90년대부터는 모든 노동자를 자유해고 시킬 수 있는 전면적인 노동계약제를 실시한 것이다. 이는 노동자 입장에서 언제든지 해고당할 수 있음을 의미했다. 이 외에도 중국 인구의 7분의 1 정도의 2억 농민이 도시로 넘어와 노동을 하는 농민의 이주노동자화, 상품 가격 결정의 다원화가 이루어졌다. 이러한 농업, 공업 개혁에도 문제점들이 있었는데, 바로 관료층이 가장 이득을 본다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관료들이 공동의 땅이었던 것 중 제일 좋은 땅을 자기 이름으로 돌려버리고, 국유기업의 가격으로 물선을 사들여 시장에 높은 가격으로 판매하는 일이 빈번했다. 이 과정에서 크게 부유를 축적한 사람이 많았다. 경제적 변화로는 민영화 기업의 출현하고 자영업 가능해졌고, 연해지역 경제특구 설치, 중공업과 건설부문 투자 삭감, 경공업과 농업 생산 확대 등이 있었다. 부업과 개인상점이 가능해지면서 농민들이 바로 돈을 만질 수 있게끔 한 것이 큰 변화였다.

1980년대 중반 인플레이션

1988년 초 자오쯔양연해발전전략이 실행되었다. 총 2억의 인구를 가진 만주에서 광동까지의 연해지역을 외국인 투자가에게 개방하는 것인데, 유입된 외국자본은 경기부양정책과 함께 놀라울 정도로 높은 공업 성장률을 이룩하는 원동력이 되었고, 1980년대의 마지막 몇 년 간 덩샤오핑 정권을 침몰시킨 관료들의 부패풍조에 한 몫 하기도 했다. 자오쯔양의 시장지향정책은 기업개혁과 가격개혁 두 가지가 있었다. 그의 기업개혁은 국유공장의 재정과 경영에 대한 정부의 통제를 제거하려는 노력이 기반이 되었지만 대부분 무산되었고, 가격개혁은 가격을 시장의 힘에 의존하게 하는 정책이었다. 하지만 이 역시 경제와 금융에 혼란을 초래하였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관료들의 부패가 성행했다. 이러한 배경 하에 1988년 초가을, 대도시의 인플레이션이 연 30%에 육박하였다. 정부는 엄격한 긴축정책을 채택하였고 다시 기업과 지역에 통제를 가했다. 긴축정책은 과열된 경제를 냉각시키기 위함이었지만 인플레이션과 긴축정책 모두 도시민 대다수에게 고통을 안겨주었다. 농민에게는 비료가격이 폭등, 정부의 곡물 수매가 하락, 부패관료들의 불법세금 징수 등의 문제점이 발생했다. 특히 중국경제에서 가장 역동적인 부문이었던 향진기업은 본래 손쉬운 신용대출에 의존했지만, 긴축정책에서 신용대출을 엄격하게 통제하는 바람에 일부 향진기업은 문을 닫았고 대부분은 생산을 감축했다. 이에 수백만의 젊은 노동자들이 직장을 잃고 일부는 유민(遊民)집단에 가세했다. 천안문사건이 발생했던 해인 1989년 봄, 이렇게 정처 없이 떠도는 유민집단(룸펜프롤레타리아트) 대열에 휩쓸려 들어간 사람들의 수가 5천만 명 이상으로 추산되었다. 반면에 외국지역에 종사했던 사람들, 민영 기업의 경영자와 고용인, 농촌의 기업가와 도시번화가의 잡상인 등 일부 사람들은 1988년 한 해 동안 엄청난 부를 획득하였다. 이렇게 점점 더 커지는 빈부격차, 하락하는 대다수 시민들과 농민들의 생활수준, 부정부패를 일삼는 관료들과 수상한 방법으로 벌어들인 돈을 자랑하는 사람들에 대한 커져가는 분노, 이를 야기한 덩샤오핑 정권에 대한 불만이 1989년 겨울과 봄, 광범위한 사회적 동요의 불씨가 되었다.

대학가의 민주토론회와 후야오방 실각

1980년대 중후반 대학가의 민주토론회가 결성되었다. 학생들은 자신들이 좀 더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민주적인 사회를 원했다. 당시 총서기였던 후야오방은 이 학생들을 비롯한 민주지지자들을 지지하고 자유와 민주를 수용했다는 이유로 1987년에 실각되었다.

천안문 사건의 진행과정

1989년 4월 5일 후야오방이 사망하고, 4월 17~22일 후야오방 실각의 원인 규명을 요구하며 대규모 추모시위가 진행되었다. 22일 내부에서는 후야오방의 장례식이, 외부에서는 대화할 것을 요구하는 학생들의 시위가 이어졌다. 이에 1989년 4월 26일 학생들의 시위를 '동란(動亂)'이라고 규정지은 인민일보 사설이 공개되었고, 4월 27일 대규모 대학생 행진과 5.4 거리 행진, 5월 13일 단식 투쟁, 5월 15일 소련 고르바초프의 방문(본래 천안문에서 만남을 가질 계획이었지만 광범위한 시위로 인해 비행기 승강장에서 만남이 이루어졌다. 이 날 천안문의 시위에 대한 외신의 보도가 잇따랐다), 5월 17일 학생을 비롯한 노동자, 자영업자 등 100만 시민의 천안문 광장 집회, 5월 18일 학생대표와 리펑 총리의 만남과 자오쯔양의 시위현장 방문이 있었다. 5월 19일 덩샤오핑이 계엄령을 선포하였고, 1989년 6월 4일 유혈진압이 거행되었다.

천안문 사건의 의의

아래로부터의 민주화운동

천안문 사건은 대학생들의 민주화운동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지만, 개혁개방 10년의 억압적인 분위기와 경제적인 문제점 등 사회에 불만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참여한 노동자 및 시민들의 참여도 컸다. 정부 입장에서 사회주의의 주인은 노동자였고, 이 때문에 정부가 가장 두려워했던 것은 노동자들의 불만이었다. 실제로 천안문 사건 때 가장 큰 인명피해를 입은 것은 노동자였다. 천안문 사건을 단순히 천안문 광장에서 일어난 학생들의 민주화 운동으로 규정짓기 보다는, 중국 전역 도시 지역에서 일어난 지식인, 학생들뿐만 아니라 노동자, 개인 상공업자, 일부 당 간부, 하층민, 농민공 까지 참여한 광범위한 정치적, 경제적 사회운동으로 규정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를 비롯한 외신들은 이 천안문 사건을 서구식 민주화를 주장하는 운동이라고 여기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시민들이 원했던 것은 서구식 민주주의가 아닌 관료주의가 만연한 사회에서 자신들이 좀 더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민주적인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었다.

천안문 사건 이후

천안문 사건 이후 사회는 정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정상으로 돌아왔다. 민주화 운동을 낳은 강력한 정치적, 도덕적 열정이 이토록 빨리 사그라지고 사라져 버렸다는 것, 그리고 정부가 조장하는 소비주의와 내셔널리즘 문제에 파묻혀버린 것은 남겨진 사람들에게 좌절감을 안겨주었다. 덩샤오핑은 유혈진압으로 희생된 시민들의 유가족들에게 사과 한 마디 없었으며, 오히려 당시 동원되었던 군대와 경찰들의 노고를 치하하고 사망한 병사들의 가족에게 위로를 전하는 것에 그쳤다. 민간인 희생자들에 대해서는 ‘사회적 쓰레기’라고 비난하기 까지 했다. 실제 사망자 수는 2000~7000명에 이르지만 정부가 발표한 사망자는 300명이었다. 1990년대 중국사회는 더욱더 가혹한 정치적 탄압이 이루어졌다. 오로지 경제성장에만 치중했고, 사회주의와 민주화를 부정하고 자본주의를 이룩하려는 데에 힘을 쏟았다.

참고자료

  • 모리스 마이스너 저, 김수영 역, 마오의 중국과 그 이후2 , 이산, 2004.12
  • 찰리 호어 저, 김희정 옮김, 천안문으로 가는 길, 책갈피, 2002.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