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골문
갑골문(甲骨文)은 지금으로부터 약 3,300년 전 상나라(B.C.1600~B.C.1046)후기 은허(殷墟) 시기에 사용됐던 문자로서 최초의 한자 원형이다. 갑골문은 귀갑수골(龜甲獸骨)의 약칭이다. 갑(甲)은 거북의 뼈를 의미하고 골(骨)은 짐승의 뼈를 의미한다. 여기에 새겨진 문자를 갑골문이라고 한다.
목차
갑골문의 발견시기와 발견과정
갑골문의 발견시점에 대해서는 일반적으로 1898년과 1899년이라는 두가지 설이 있다. 즉, 글자가 있는 갑골의 발견은 1898년 후기에 이루어졌으며, 골동상들이 일부 갑골 조각을 천진의 맹정생(孟定生)과 왕양(王襄,1876~1965)등에게 가져다 보였는데 그들은 그것을 고대의 죽간으로 여겼다. 그 후 1899년 저명한 금석학자였던 왕의영(王懿榮,1845~1900)에 의해 이것이 거북 딱지에 새겨진 문자라는 사실이 밝혀졌으며 갑골이라는 것이 세상에 비로소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당시 금석학자(金石學者)였던 왕의영은 병에 걸려 약재를 사서 병을 치료하고 있었다. 한약방에서 조제해 온 약재에는 '용골(龍骨)'이라는 뼈 조각이 있었다. 그런데 그 '용골'이라는 뼈에는 자신이 연구하던 금문과 비슷한 문자의 흔적을 발견했다.그는 바로 한약방에 '용골'을 판매한 약재상을 소개해 달라고 요청했고 얼마 후 한약방으로부터 연락을 받은 산동(山東)의 골동상 범유경(范維卿)은 12관의 '용골', 즉 갑골을 가지고 베이징의 왕의영을 찾아왔다. 왕의영은 그 갑골에 새겨진 문자를 보고 감정한 결과 금문보다 훨씬 앞선 상나라 시대의 문자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왕의영은 1900년에도 범유경와 조집제(趙執齊)로부터 수천 편의 갑골을 구입했다. 그러나 왕의영은 그해 사망을 했고, 그가 갖고 있있던 갑골은 그의 제자인 유악(劉鶚)이 입수했다. 유악은 1903년 왕의영으로부터 전해들은 갑골에 대한 이야기와 갑골편을 선별해 <철운장귀(鐵雲藏龜)>라는 최초의 갑골문에 관한 책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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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골문의 특징
갑골문의 여러가지 명칭
글자를 새겼다는 의미에서 계문(契文),은게(殷契),갑골각사(甲骨刻辭)라고 하고, 점을 친다는 의미에서 복사(卜辭),은허복사(殷墟卜辭)라고 한다. 또한 점을 친 사람을 정인(貞人)이라하여 정복문자(貞卜文字)라고도 부른다. 출토된 지역의 이름을 따서는 은허문자(殷墟文字),은허서계(殷墟書契)로도 불린다.
갑골에 새겨진 이유
거북의 등은 둥근 반구형 모습으로 하늘을 나타내고, 편평한 배딱지는 대지는 편평하다는 고대 중국인들의 생각과 흡사하다. 거북의 배딱지는 중국인의 우주관을 담을 亞형을 닮아 있어 상대인들은 우중의 실제상황인 亞와 거북의 모습을 동일시 하였다. 여기서 亞는 우주의 중심을 의미한다. 상왕조 귀족들의 무덤이나 묘실, 상왕실과 관계되는 친족, 귀족 등의 족휘를 나타내는 청동기 금문에 '亞'의 형태가 나타나 있다. 상왕조가 이처럼 '亞'를 표기한 것은 우주의 중심인 '아'가 바로 상나라라고 생각 했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이유는 거북도 '亞'의 모습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신성한 신탁을 기록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거북은 예로부터 장수하고 신성한 동물로 여겨져 신비의 영물로 인정받았다. 중국 고대신화에서 인간을 창조한 것으로 알려진 여와(女娲)라는 여신이 하늘을 떠받치기 위해 거북의 발을 이용했다는 기록이 거북에 관한 최초의 기록이다. 상나라는 원시시대의 유목생활에서 농경시대로 넘어가는 단계에 있었다. 따라서 주변의 소규모 부족들을 규합하고 통일시키려면 강력한 제재수단이 필요했기 때문에 신탁에 의지를 하였다. 그 때 거북은 신탁을 받는 도구로서 채택되었다.
갑골문자의 형태
현재 남아 있는 갑골문자를 살펴보면 완전히 오늘날의 한자의 특성을 갖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과거에 어떤 사람들은 중국의 한자를 방괴자(方塊字)라고 불렀는데 갑골문 역시 이러한 특징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왜냐하면 갑골문 중에는 먼저 붓으로 그렸다가 후에 칼로 새겨진 극소수의 큰 글자를 제외하고는 일반적인 모든 글자가 전문적인 청동칼로 거북껍데기와 소뼈의 표면에 직접 새겨졌기 때문이다. 거북껍데기와 소뼈는 모두 비교적 단단하여 새겨진 선들이 거의 직선으로 나타났기 때문에 절대 다수의 자형이 방형이나 장방형을 이루었다. 이러한 독특한 민족문자의 예술은 오늘날까지도 보존되어 어떤 필체의 한자를 쓰든지 간에 여전히 방형이나 장방형의 모양이 주류를 이루는 것이다. 또한 갑골문에는 이미 적지않은 편방자(偏方字)가 있으며 그 형체를 살펴보면 일부 문자의 새김 방법이 오늘날의 것과 큰 차이가 없는 것으로 나타나는데 이러한 문자들은 이미 3천여년 전에 그 기본 형태가 갖추어졌을음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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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골문의 구성
정인의 역할
수집된 갑골들은 '정인(貞人)'이라는 특수 집단이 관리했고, 점복을 했다. 정인이란 요즘 시대의 무당과 같은 역할을 했던 사람이다. 당시의 무당은 신과 교감을 할 수 있는 특별한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다. 점복의 해독, 즉 신탁의 길흉은 왕이 직접 풀이하지만 신에게 묻는 행위는 정인이 담당했다. 그리고 점복의 결과가 나오면 이를 기록하는 것도 정인의 역할이었다. 갑골문에는 모두 120여 명의 정인이 갑골을 관리-정리-기록했다고 한다.
정인들의 첫 번째 임무는 외지로부터 공납 받은 갑골을 점복에 사용할 수 있도록 정리하고 관리하는 것이다. 정인들은 몸을 정결하게 하고 신에게 제사를 드린 뒤, 수집된 거북을 잡아 점복의 재료로 만들었다. 잘 다듬어진 귀갑은 매끄러운 부분을 앞면, 좀 거친 부분을 뒷면이라 하는데, 뒷면에 홈을 팠다. 이 홈을 찬착(鑽鑿)이라고 하는데 둥글게 판 부분을 찬이라 하고, 타원형에 가까운 것을 착이라고 한다. 이러한 작업을 하는 이유는 점복을 할 때 열이 골고루 전해지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 뒤에 정인은 점을 치고, 그 과정과 결과를 기록한 다음 이를 관리하고 보관을 하였다.
점복의 내용
점복은 인간이 하늘의 뜻을 물어 응답을 구하는 신성한 행위이다. 점을 치는 데는 순서가 있다. 정인이 제사를 지내기 위해 따로 마련된 제단인 향(享)에서 점복 준비를 마치면, 왕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점복 행사에 참여하면서 점복이 시작된다. 정인은 먼저 몇월 며칠에 누가 어떤 내용을 신에게 묻는다고 고한 다음, 쑥대 같은 것에 불을 붙여 홈을 파 놓은 뒷면에 대여 점을 치면, 앞면에는 복(卜)자가 나타난다. 이 복(卜)의 모양을 보고 왕이 직접 길흉을 판단했다. 복(卜)자의 옆으로 그어진 선이 바르거나 위로 향하면 길(吉)한 것으로, 부정확하거나 밑으로 향하면(凶)한 것으로 풀이했다. 정인은 왕으로부터 풀이된 내용을 듣고 이를 길고하고, 왕이 풀이한 길흉이 맞는지 여부도 기록했다. 이것이 갑골문을 기록한 형식이었다. 날짜와 점을 치는 사람, 즉 정인(貞人)을 기록하는 것을 전사(前辭)라고 했다. 점칠 내용을 묻는 것을 명사(命辭)라고 했고, 점친 결과를 보고 왕의 신탁의 의미인 길흉을 풀이하는 것을 점사(占辭)라고 했다. 마지막 그 결과를 기록하는 것을 험사(驗辭)라고 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갑골문에는 점사와 험사 부분이 생략되어 있다. 그 이유는 왕이 점친 결과를 보고 천기를 누설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즉 왕이 혼자서 처리할 뿐 정인에게 신탁 내용을 말해주지 않거나, 결과의 기록을 금지했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