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진핑
시진핑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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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53년 6월 15일 베이징 시 |
학력 | 칭화대학 대학원 법학 박사 |
가족 | 아버지: 시중쉰(習仲勳), 어머니: 치신(齐心), 부인: 펑리위안(彭麗媛) |
관련 활동 | 중국(국가주석), 중국 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주석),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총서기 |
목차
개요
시진핑은 중국 공산당 개국 원로였던 시중쉰의 아들로, 베이징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비교적 유복한 환경에서 자랐다.
아버지가 실권한 이후에는 상산 하향을 했으며, 그 이후 칭화 대학을 졸업했다. 정치 경력은 각지를 돌아다니면서 쌓았다. 허베이성에서 시작해 푸젠성에서
근무하다가 저장성으로 발령받았고, 그 이후 상하이를 거쳐 베이징에 입성했다. 그 동안의 행정관료로서 쌓은 업적들을 인정받아 2013년 제7대 중국 국가주석의
자리에 올랐으며, 중국의 전세계적 영향력을 넓히겠다는 뜻의 '중국몽'과 '일대일로'를 주창하고 있다.
생애
1953년 6월 15일 베이징에서 태어났다. 당시 베이징은 北平으로 불렸기 때문에 그의 아버지인 시중쉰(習仲勛)은 그의 이름을 近平(베이징에 가깝다)으로 지었다고
전해진다. 당시 그의 가족은 두 명의 누나와 두 살 연하의 남동생 시위안핑까지 모두 여섯이었다. 당과 정부 주요 기관, 간부의 거주지 밀집 지역인 중난하이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는데, 이는 당시 당 중앙 선전부장을 맡은 대간부인 아버지 시중쉰의 영향이 컸다. 언제까지나 유복한 환경에서 성장할 것만 같았지만, 아버지 시
중쉰의 실각으로 시진핑은 9세의 어린 나이에 인생의 첫 번째 고비를 맞게 된다. 1962년 류즈단 사건으로 그의 아버지 시중쉰이 억울하게 실각을 당하게 되자, 시진핑 또한 반동분자의 자식이라는 이유로 온갖 천시
를 받았다. 1969년, 결국 그는 상산하향(上山下鄕)운동 정신에 입각하여 샨시성 옌촨(延川)현 량자허(梁家河) 따투이(大隊)로 7년 간의 하방(下放)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고위 간부의 자제였던 시진핑은 농촌 생활
에 적응할 수 없었고, 3개월 만에 베이징으로 도망쳐왔다. 당시 '학습반'에 구금되어 하수도 공사에 투입되었는데, 시진핑은 이 시절을 회상하며 농촌이나 도시나 육체 노동의 고달픔은 다를 바 없었다고 말한다. 다
시금 결의를 다지고, 샨시성으로 내려온 시진핑은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 농촌 사람들과도 격 없이 지내며 계속해서 공산당 입당 지원서를 제출했다. 당시 아버지인 시중쉰이 복권되기 전 상황이었으므
로 끊임없이 입당을 거절 당했다. 하지만 1974년 1월, 10전 11기의 성과로 21세의 시진핑은 공산당원이 되었다. 그 해 11월, 량자허 따투이 당 지부 서기까지 역임하게 된다. 이는 그의 정치 인생에 걸음마와 같
은 행보였다. 문화대혁명의 영향으로 학업에 대한 열망이 가득했던 그는 이듬해 인 1975년 10월, 칭화(淸華)대학교 화학공업학과 입학했다. 1978년, 아버지 시중쉰이 복권되고, 이듬해 4월에는 대학 졸업 후, 중
앙군사위원회 판공실 비서(겅뺘오(耿飇) 국방장관 비서)를 역임하게 된다. 겅뱌오의 비서를 맡을 즈음에 커링링과 결혼하지만 약 2년 후 이혼하게 된다. 3년만에 겅뺘오의 비서직을 그만두고 허베이성 정딩현으로 내
려가 기층 업무부터 시작했다. 허베이성에서 근무한 지 3년 만에 다시 푸젠성으로 이동해 관료직을 했는데, 샤먼에서 생활을 하다가 닝더로 옮기고 다시 푸저우로 옮기는 등 17년의 시간을 푸젠성에서 보냈다. 푸젠
성에서 근무하는 동안 펑리위안을 만나 결혼하였으며, 푸젠성 성장을 맡았다. 그 후 2002년에 저장성 성위원회 서기직과 성장직을 부여 받아 이동했고, 2007년까지 저장성에서 근무했다. 이후 상하이로 이동해 상하
이시위원회 서기의 직책을 받았으며, 그 해 열린 전국대표대회에서 정치국 상무위원에 당선되어 베이징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2008년부터 2011년 당 중앙정치국 상무위원, 중앙서기처 서기, 중앙당교 교장, 국가부
주석으로 있었으며 2010년에 당 중앙군사위 부주석 직에 오르면서 차기 지도자로 공인되었다. 그리고 2013년 중국 국가 주석의 자리에 올랐다.
정책방향
부패척결(腐敗剔抉)
시진핑은 향후 미래에 부정부패가 중국에 악영향을 줄 것을 우려해 부패척결을 지시했으며, 특히 지도급 인사들의 솔선수범을 지시했다. 개인의 이익을 위해 권력을 이용한는 것은 특별히 처리하겠다고 말했다. 그동안 많은 부패문제를 일으켰던 국영기업의 처리가 우선순위였다.[1]
신형대국관계
시진핑은 '신형대국관계'를 충돌하지 않고 상호 적대하지 않으며, 서로의 핵심 이익을 존중해주는 기반 위에서 윈-윈을 위한 협력을 극대화하는 관계로 언급했으며, 대상은 미국이었다. 중국이 미국 패권의 국제질서 하에서 비군사적 방식으로 미국과 계속 경쟁하겠다는 것이고, 중국의 강화된 국제 지위를 반영하는 양국 관계를 요구하며, 상호간 핵심 이익 또는 전략적으로 중시하는 사안은 존중해 주기를 미국에 요구한 것이다.[2]
일대일로(一帶一路) 전략
일대일로(一帶一路) 전략은 2013년 시진핑 주석이 처음 제기한 중국의 대외개방 국가전략이자 향후 35년간(2014~2049년)의 기본 대외노선이다. 일대일로는 실크로드 경제벨트(一帶)와 21세기 해상실크로드(一路)를 합친 개념으로,
시진핑 정부가 추진하는 정책의교류 및 도로연결, 무역소통, 화폐유통, 민심상통을 강화할 수 있는 전략구상인 실크로드 경제벨트와 중국과 아세안국가들의 상호협력을 강화시키고 해양합작 관계를 발전시키는 21세기해상실크로드 2개의
실크로드 프로젝트의 끝 자를 따서 만든 신조어이다. 시진핑 정부가 중국 당나라(육상)와 명나라(해상)의 옛 영광을 재현하고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인 중국몽(中國夢)을 실현하기 위한 중국 정부가 공식적으로 지정한 대외정책인 것
이다. 일대일로는 중국에서 출발해 동남아, 중앙아시아, 중동 등 지역을 거쳐 유럽에 닿는 26개국 인구 44억 명을 포괄하는 거대 프로젝트이며 일대일로에 포함된 국가의 주요 지표가 세계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인구 63%, 약 21조
달러의 전 세계의 약 29%를 차지하는 경제규모, 전 세계 상품 및 서비스 수출 등 교역 23.9%에 달하는 규모이다. 일대일로의 진정한 의미는 단순하게 육로와 해로로 동아시아와와 유럽을 연결한다는 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공간을
플랫폼으로 삼아 중국의 국제 자유무역지대를 확장하는 것을 의미한다.[3]
한국과의 상황
한중 자유무역협정
2012년 협상을 개시하여 2014년 11월 실질적 합의를 이뤄냈고 2015년 6월 협정문에 정식 서명하였다. 2015년 12월 20일, 고주파 의료기기, 변압기, 항공등유 등 958개 품목에 대한 관세가 즉시 철폐되었다. 2016년 1월 1일에는 5,779개
품목에 대한 2년차 관세 인하가 이뤄졌다. 또 해마다 단계적으로 관세가 내려가며 10년 내에 5,846개의 품목(LCD패널, 스테인리스냉연강판, 에어컨, 전기밥솥 등)에 대한 중국 측 관세가 철폐된다. 발효 20년차인 2034년까지 품목 수 기준으로
중국은 전체 90.7%인 7,428개, 한국은 전체 92.2%인 1만 1,272개 제품의 상대국에 대한 관세를 없앤다. 수입액 기준으로는 발효 20년 후 중국은 대 한국 수입액의 85.0%, 한국은 대 중국 수입액의 91.2%에 대해 관세를 부과하지 않는다.
한편, 농수산물을 포함한 초민감 품목은 양허 제외 30%, 자율관세할당 16%, 관세감축 14% 수준으로 조정되었다. 한중 FTA의 양허 제외 대상 농수산물은 총 548개로 한ㆍ미 FTA(16개), 한ㆍEU FTA(41개), 한ㆍ호주 FTA(158개), 한ㆍ캐나다
FTA(211개)보다 많다. 쌀을 비롯해 고추, 마늘, 양파, 사과, 조기, 갈치, 쇠고기, 돼지고기 등 주요 농수산물은 양허 대상에서 빠졌다.[4]
한국의 MD 체제 가입 및 사드(THAAD) 도입
북한의 핵 위협 및 핵 능력의 증가와 미사일 발사 실험은 미 중 양국의 대북정책의 한계를 여실히 보여주는 동시에 미국의 한국 내 사드 배치 필요성을 불러일으키는 논란의 단초가 되었다. 특히 미국은 북한의 핵·미사일 위협이 가중되는 상황에서
한·미·일 3국이 북한의 핵·미사일 위협에 효과적으로 공동 대처하기 위해서는 한국 내 사드 배치가 필요하다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중국은 한국 내 사드 배치로 인해 현실적인 자국 안보 위협을 느낀다는 이유로 사드 배치를 반대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미 중 양국의 대립에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이유가 존재한다. 중국은 한국 내 사드 배치 문제에 대한 반대 입장을 명확히 함으로써 공개적으로 한국 정부를 압박하고 이를 통해 한미관계의 균열을 조장하려고 한다. 즉 중국은 사드 문제를 계기로 하여 조금이라도 한미동맹관계에 균열을 가져오고, 더 나아가 한국 내 여론을 중국 측으로 끌어들이려 하는 것이다. 반면 미국은 북한의 핵과 미사일 능력이 고도화되면서 일부 동맹국들에서 나타날 수 있는 안보 불안과 이에 따른 지나친 군비확장을 억제하는 동시에 다가오는 중국과의 패권 경쟁에 대비하려는 것이다.[5]
참고자료
1. 소마 마사루 저, 이용빈 역, 「시진핑」, 한국경제신문사, 2011
2. 가오샤오 저, 하진이 역,「대륙의 리더 시진핑」, samho MEDIA, 2012
3. 우밍 저, 송상현 역,「시진핑 평전」, 지식의 숲, 2012
각주
- ↑ Liu, Xiaorong(2014),「시진핑 정부의 대외전략과 신형대국관계 제안」, 경북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pp38-39
- ↑ 이충형(2015), 「중국 국가 대전략 연구 : 시진핑 시대 국가 대전략 전환을 중심으로」, 서울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pp48-50
- ↑ 김나영(2016), 「중국 “일대일로(一帶一路)”정책 분석을 통한 한국 기업의 중국시장 진출 전략에 관한 연구」, 경희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pp10-11
- ↑ (2015), 한중 FTA 협정문, 산업통상자원부
- ↑ 김병기(2016),「중국의 패권증대와 한미동맹의 안보 딜레마 연구 : 포기와 연루 이론을 중심으로」, 경기대학교 대학원 학사논문, pp42-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