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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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lowerman8922 (토론 | 기여)님의 2018년 6월 25일 (월) 23:26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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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탁[董卓]

출생 ?
농서군(隴西郡) 임조현(臨洮縣, 지금의 甘肅省 岷縣)
사망 192년 5월 22일
생존시기 후한
관련 활동 정치, 군벌

개요

중국 후한 말기의 무장이자 정치가이다. 자(字)는 중영(仲穎)이며, 농서(隴西) 임조(臨洮, 지금의 간쑤성 민(岷)현) 출신이다. 영제 사후 십상시의 난 등의 정치적 혼란을 틈타 정권을 잡았으며 흉포하고 잔인하고 탐욕스러운 정치를 펼친 것으로 유명하다. 초평 3년(192년) 양자로 삼은 여포의 변심으로 동탁은 죽음을 맞이하는데, 이때부터 동탁을 토벌하기 위해 협력했던 군웅들 사이에 치열한 주도권 다툼이 벌어지게 되는데 이 것이 바로 오늘날 우리가 알고있는 삼국지의 시작이다.


초기 생애

태어난 곳은 농서군(隴西郡) 임조현(臨洮縣)이지만 얼마 후에 양주 부친을 따라 양주(凉州)로 갔기 때문에, 동탁은 어린시절 줄곧 강인(羌人, 강족을 일컫는 말)들과 어울려 지냈다. (당시에는 강인이 이미 양주 대부분 지역을 점령하고 있었다) 천성이 싸우기를 좋아하고 힘도 좋았으며, 말을 잘 탔고 활도 양손으로 쏠 줄 알았다고 한다. 싸움을 잘해 군관이 될 재능은 있었지만, 장수의 재목은 아니었다. 병법을 배우기는 했어도 익혀서 자기 것으로 만들 줄 몰랐고 정치적으로 뛰어난 점이 있었으나, 권모술수에 능했을 뿐 사리에 밝은 것은 아니었다. 환제의 말년인 167년(영강 원년), 동탁은 자기 고장에서 병마연(兵馬掾)을 역임해 무기와 군마를 관장했으며 중앙에서는 우림랑(羽林郞)으로 뽑혀, 흉노 중랑장 장환(張奐) 밑에서 사마로 종군하여 한양(漢陽, 천수군)에서 강족과의 전투에서 작은 공을 세워 낭중(郎中)으로 진급한다. 그리고 서역의 무기교위(戊己校尉), 병주(幷州, 지금의 산시(山西)성 타이위안(太原)) 자사를 거치는 과정에서 관직을 잃기도 하지만, 탁월한 수완을 발휘하여 곧 직위를 회복해 하동태수(河東太守)로 승진한다.

세력을 키우고, 낙양에 입성하다

영제 중평(中平) 원년인 184년에 황건적의 난이 터지자 북방에서 먼저 강족 · 황(湟)족의 의종호와 금성(金城)에 살던 변장(邊章) · 한수(韓遂)라는 이들이 군대를 일으켰다. 동탁은 동중랑장(東中郞將), 중랑장(中郞將), 파로장군(破虜將軍), 전장군(前將軍)의 신분을 잇달아 거치면서 이들을 진압하였다. 이 때 동탁은 전투에서 번번이 지고도 관직이 높아졌는데, 이는 그가 '정치'를 잘 알았기 때문이다. 그는 예물을 보내는 일의 중요성을 잘 알았고, 어떻게 보내야 하는지, 누구에게 보내야 하는지도 잘 알았다. 황보숭과함께 반란을 진압하게 된 동탁은 이후로 조정으로부터 군대를 반납하고 황보숭의 지휘에 따르라는 명을 받지만, 그는 부하들이 자기를 너무 좋아해 보내주지 않는다는 핑계를 대며 명령에 따르지 않고 그대로 병사들을 이끈 채 하동(河東)에 머물며 때를 기다린다. 그해 영제가 죽자 대장군 하진과 원소가 환관을 제거하고자 모의하여 조정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은밀하게 동탁을 불러들였다. 그러나 이 계획을 미리 눈치챈 환관들에게 하진은 피살되었고, 이에 분노한 원소 등에게 환관들도 제거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동탁은 낙양에 진격하여 어린 황제 소제(少帝)와 진유왕(陳留王)의 신변을 확보하게 된다. 이 때 동탁의 군사는 3천 남짓한 병사들로 구성되어 있어 원소 등 다른 경쟁자들에 비하면 크게 유리한 점이 없었지만, 동탁이 꾀를 내서 한밤 중 어둠을 틈타 몰래 낙양성을 빠져나갔다가 다음 날 한낮에 깃발을 펄럭이고 북을 치며 입성하곤 하면서 서쪽에서 대군이 계속 도착하는 것 처럼 보이게 했다. 이에 주인이 없던 하진, 하묘 형제의 군사들과 정원의 군사들은 동탁쪽으로 붙게 되고 결국 수도의 군사 대부분을 장악하는데 성공하였다.

소제 폐위와 폭정의 시작

정권을 장악하자마자 동탁은 사공(司空) 유굉을 면직시키고 대신 자신이 그 자리에 앉고 문무백관을 불러 모아 소제의 폐위와 진류왕의 즉위를 논의하는 동시에 책봉 문서를 반포하도록 하태후를 핍박한다. 이유(李儒)를 시켜 하태후를 시후하고 태부 원외에게 지시를 하여 소제를 대전에서 끌어내린 뒤 차고 있던 황제의 옥쇄 인끈을 풀어, 아홉 살의 진류왕에게 넘겨주고, 그를 부축해 대전으로 올라가게 한다. 이로써 황제의 폐위와 즉위에 따르는 모든 의식을 마무리하고 이 때부터 동탁은 폭정을 시작한다. 군대를 이끌고 순찰 중에 춘절을 즐기고 있는 사람들을 보자 비위가 상해 자신에게 예를 갖추지 않는다고 하여 그 사람들을 학살하고, 여자들은 병사들에게 첩으로 주고 재산 또한 몰수했다. 심지어 궁녀나 공주도 희롱하였으며, 함부로 폭행하거나 강간까지 일삼았다.

역사학자 여사면(呂思勉)의 동탁에 대한 평(評)
: "나라를 위해 좋은 황제를 뽑았으니 동탁은 용서받을 만하다. 그러나 그에게는 그럴 권리가 없었고, 그럴 만한 명성이나 인망도 없었다. 제위를 찬탈하거나 권력을 남용하기 위한 포석이었다면, 동탁 스스로 골칫거리를 만든 것이나 다름이 없다. 어리석고 우둔한 소제가 총명한 진류왕보다 부리기도 쉬웠을 것이다. 동탁은 먼저 중앙정부부터 갈무리해야했다. 폐위를 하고 싶었다면 나중에 해도 늦지 않았을 것이다."

이와 같은 만행들을 참다 못한 오부가 동탁을 살해하려는 계획을 꾸몄지만, 실패하여 처형되고 조조 또한 동탁을 암살을 모의하지만 실패하여 달아나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