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9혁명
목차
1.개요
대한민국 헌법 전문에 민족 정신으로도 언급되는 대한민국 근현대사의 큰 획. 1960년 이승만 정부에 반해 학생,교수들이 주도하여 일으킨 민주화 운동. 3.15 부정선거와 마산 김주열 사망사건으로 불이 붙은 여론이, 대학가 중심의 시민운동으로 전국으로 확산되었고, 이로 인해 이승만 정부가 하야를 선언, 제 1공화국의 종결을 가져온 혁명.
대한민국 헌법 전문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민국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하고, 조국의 민주개혁과 평화적 통일의 사명에 입각하여 정의·인도와 동포애로써 민족의 단결을 공고히 하고, 모든 사회적 폐습과 불의를 타파하며, 자율과 조화를 바탕으로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더욱 확고히 하여 정치·경제·사회·문화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각인의 기회를 균등히 하고, 능력을 최고도로 발휘하게 하며, 자유와 권리에 따르는 책임과 의무를 완수하게 하여, 안으로는 국민생활의 균등한 향상을 기하고 밖으로는 항구적인 세계평화와 인류공영에 이바지함으로써 우리들과 우리들의 자손의 안전과 자유와 행복을 영원히 확보할 것을 다짐하면서 1948년 7월 12일에 제정되고 8차에 걸쳐 개정된 헌법을 이제 국회의 의결을 거쳐 국민투표에 의하여 개정한다. 1987년 10월 29일
[네이버 지식백과] 대한민국헌법 전문 [大韓民國憲法全文] (두산백과)
2.발생 원인 및 진행사항
- 1. 이승만 정권의 탄생과 타락.
1945 대한민국 수립~1950 6.25전쟁
1945년 10월, 30여년동안의 독립운동가로서의 명성만을 가진 이승만이 귀국한다. 이후 이승만은 1948년 2월 16일, 유엔 소총회의 결의와 같은해인 1948년 3월 17일 공포된 군정법령에 의거한 국회의원 선거법에 따라, 같은해 5월 10일 실시된 총선거를 통해 대통령에 당선된다. 동시에 이승만을 지지해오던 대한독립촉성국민회와 한국민주당이 제헌국회에서 많은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하지만 이 선거는, 남측의 단독 정부 수립에 반대했던 여러 세력이 빠진 선거였다. 남로당을 비롯한 좌익계의 불참을 시작으로 강력한 대중적 기반을 가지고 있던 김구의 한독당계열, 김규식의 민족자주연맹 역시 이 선거에 불참했다. 정치적 기반이 전혀 없던 이승만은 당시 『뭉치자』라는 구호만으로 그의 명성을 통해 이익을 보려던 수많은 정당 그리고 사회 단체들을 포섭하는데 성공한다. 이렇게 권력을 잡은 이승만 대통령은 권력 유지를 위해 서로 다른 견해를 가진 주변 인물들을 수시로 갈아 치우기 시작했고, 이는 곧 스스로의 눈을 가려버리는 결과를 가져온다. 그의 옆에서 그와 다른 생각을 가지고 발설하는 이는 곧 좌천되었기 때문이다. 실제 이승만 초기 정권에서 장,차관의 평균 임기는 약 6개월 정도였다. 이는 결국 이승만을 국민들로부터 고립시켜버렸다. 유능한 보좌관의 부재와 국내 정치경험의 부족은 비효율적인 정부 운영을 야기하게 된다.
1950. 6.25 전쟁의 발발과 부산정치파동
이러한 국내 상황이 지속되던 중,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이 불법남침을 감행하며 6.25전쟁이 시작된다. 이로 인해 이승만 정권은 다시 한번 기회를 맞이하게 된다. 국가가 완전 동원상태가 되었고, 외부의 적이 너무나도 명확한 상황 속, 국민은 지도층의 분열을 원치 않았기에 이승만 정권의 무책임한 행동도 면죄부를 받게된다. 또한 전시에 있었던 여러 사건들의 처리과정에서 당시 야당이던 민국당계인사들을 대거 해임함으로써 국회내 민국당계와 정부와의 마찰이 절정에 이르렀다. 대표적으로 전시내각에 참여했던 민국당계의 신성모 국방장관, 조병욱 내무장관, 김준연 법무장관등이 해임을 당했다. 이로 인해 상당수 국회의원들이 이승만의 반대세력에 서게 된다. 이는 하나의 큰 문제점을 야기한다. 당시 헌법상 대통령은 국회에서 선출하는 간선제를 통해 선출되었다. 따라서 1952년 임기가 끝나는 이승만의 입장에서는 국회에서의 지지층을 반드시 확보해야만 했다. 하지만 1950년 2대국회의원 선거 결과, 여당인 대한국민당의 당선자수는 24명으로, 이는 전체 의석수읜 210명 중 11.4%에 불과했다. 오히려 무소속 의원들이 126명, 전체의 60%의 의석을 차지하며 사실상 이승만의 재선은 불가능한 상황에 이르렀다. 이를 인지한 이승만 정권은 부산임시정부에서 대통령 직선제와 국회의 상하양원제를 골자로 한 개헌을 추진하였다. 전시상황인 지금, 이미 자신에게 등을 돌린 국회의원이 아닌 정치와 어느정도 거리가 있는 국민이라면, 지도층의 교체보다는 유지를 원할 것이라 판단한 것이다. 하지만 국회가 이 개헌을 거부해 버린다. 이러한 상황에 처하자, 이승만은 정권은 여당세력과 군사력, 경찰력을 동원하여 국회를 위협하기에 이른다. 이승만 정권은 게릴라 활동과 대중시위를 저지한다는 명목으로 선포된 계엄령을 이용, 47명의 국회의원을 체포하고 그중 9명은 공산주의자라는 명목으로 구속해버린다. 다음 국회 정족수를 채우기 위해 이들 중 몇몇은 다시 풀어주었고, 결국 국회는 찬성 163표, 반대 0, 기권 3으로 이승만의 개헌안을 통과시킨다.
의회기능 상실과 선거 침해
이 이후에도 이승만 정권은 이승만의 영구집권 및 장기집권을 목표로 1954년 그 유명한 사사오입개헌을 이루어(?)낸다. 1958년에는 2.4 안보법파동등이 발생하는데, 이는 우리나라 의회가 사실상 이승만 정부에 의해 기능을 상실했음을 잘 나타낸다. 의회기능의 상실은 합법적인 제도적 절차에 의한 국민의 의사반영 통로의 폐쇄를 의미한다. 따라서 자신들의 의사를 제대로 표현할 수 없는 국민들의 불만감은 점점 쌓여갈 수 밖에 없었다. 한가지 더 문제점은, 선거마저 이승만 독재에 의해 제 기능을 상실했다는 것이다. 선거 역시 국민들이 합법적 제도적 절차에 의하여 국가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통로인데, 이 길 역시 막혀버린 것이다. 이러한 부정선거의 시작은 1954년 5월 20일에 실시된 제 3대 국회의원선거로 본다. 이 선거는 자유당 99석, 민국당 15석으로 압도적 차이를 보였는데, 선거 후 당선무효 혹은 선거무효등의 소송이 25건이나 제기된다. 이 다음 선거인 1958년 5월 2일에 실시된 제 4대 국회의원선거에서는 더 가관이다. 이 선거는 105건에 달하는 선거소송 및 1,065건의 선거사범을 기록하는 등 선거의 부정성을 세상에 내보였다. 당시 이승만 정권은 정치 깡패를 동원하는 등 수많은 부정선거를 행했고 이러한 민주선거제도의 왜곡은 국민의 정치적 좌절감, 반발감을 더욱 증가시키는 결과를 야기했다.
- 2.학생 시위의 시작
2.28 대구 학생 데모
1960년 2월 28일 대구에서 벌어진 대규모 학생 시위이다. 이날 장면박사 일행의 합동유세가 있는데, 당국이 자유당의 지시에 따라 학생들이 그 유세현장에 가지 못하게 당일이 일요일임에도 불구하고 추가시험, 영화관람등의 이유로 학생들을 학교에 등교시킨 것이 발단이 되었다.(시위 동기가 충분히 이해가 된다.)이에 분노한 학생들이 2월 28일 오후 1시 30분경, 경북 도청 광장에 경북고 학생 천여명이 모여 '학생들을 정치도구화하지 말라'라는 구호를 가지고 시위를 시작했다. 뒤를 이어 경북여고, 경북대사대부고, 대구고교에서도 데모가 발생했다. 하지만 당국은 이를 공산당 사주를 받은 시위로 간주하고 학생들을 강제 해산시키는데, 이 과정에서 100여명의 학생들이 경찰에 연행된다. 이 사건을 계기로 전국의 중, 고등학교 학생들이 큰 영향을 받고, 후술할 3.15 부정선거 직후 마산 시위가 일어나는 도화선이 된다.
- 3. 1960년 3.15 부정 선거
3.15 부정선거
이승만과 자유당은 민주당 대통령 후보 조병옥이 신병치료차 미국으로 건너간 틈을 타서 5월 중에 실시하기로 되어 있는 정,부통령 선거를 2개월이나 앞당겨 3월 15일에 실시한다고 전격적으로 공고했다. 이승만 정권은 야당 대통령 후보가 신병치료차 해외로 나간 틈에 조기 선거를 시도하면서 능력도 인기도 없는 부통령 후보 이기붕을 당선시키기 위해 관권 부정선거를 획책했다. 그런데 그 조병옥 후보가 선거를 눈앞에 두고 사망하였다. 이승만 정권은 조병옥의 돌연한 사망으로 재집권이 확실시되었는데도 부통령 후보 이기붕을 당선시키기 위해 관권동원과 물량살포 등 온갖 부정을 저질렀다. 정,부통령 선거 일정이 3월 15일로 공고되면서 자유당은 선거부정을 자행했다. 경찰과 공무원이 자유당 운동원으로 앞장서고, 반공청년단과 같은 폭력배들이 몽둥이를 들고 다녔으며, 폭력이 난무하여 야당계 인사들이 쓰러졌다.
부정선거 지령문이 폭로되었는데, 내무장관 최인규를 중심으로 공무원을 총동원하는 부정선거 계획은 '4할 사전투표, 3인조에 의한 반공개투표, 완장부대 동원으로 유권자 위협, 야당 참관인 축출, 유령유권자의 조작과 기권 강요 및 기권자의 대리투표, 내통식 기표소 설치, 투표함 바꿔치기, 개표 때의 혼표와 환표, 득표수 조작 발표'로 요약된다. 여태껏 자행되었던 수많은 부정선거를 능가하는 이번 선거에, 드디어 시민들의 분노는 극에 치닫고 만다. 더욱이 전에 서술했던 2.28 대구 학생 시위를 통해 이미 어느정도 '시위'란 도화선에 불이 붙어 있는 상태였다. 이에 영향을 받아 같은 날, 이 도화선에 확실하게 불을 붙이는, 마산 시위가 일어난다.
- 4. 마산 시위와 김주열의 사망.
제 1차 마산시위
이승만 정권이 어이가 없을 정도의 부정 선거를 자행하자, 같은날 오후 3시경, 분노가 가득 찬 수천명의 군중들이 마산 민주당 당사 앞에 모여 시위를 일으킨다. 하지만 이들은 곧 남성동 파출소 앞에서 경찰과 충돌하여 해산되었다. 그러나 개표가 진행된 오후 6시 40분경에는 남녀 학생을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부정선거 즉시 중단'이란 구호를 들고 시청으로 몰려들었다. 이 중 경찰과 충돌이 있었고 경찰의 발포로 8명이 사망, 50여명이 부상을 당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로 인해 국민들의 분노는 이미 한계치를 달리고 있었다. 하지만 여기에 대해 이미 국민 여론을 배척한 이승만 정권은 이 사건 배후에 공산당이 있으며, 법에 의해 강경하게 처벌할 것이라고 공표해 버린다. 이러한 강경책에 여론은 분노하고, 제 1차 마산 사건은 그 진상을 밝히지 못한 채 지나간다.
김주열 사망 사건
1차 마산 사건 이후 마산에서 떠오르는 사람은 故 김주열 이었다. 마산상고의 입학 시험 결과를 확인하러 온 상고생 김주열이 4월 10일까지 행방불명 된 것이었다. 김주열의 어머니는 한달 가까운 시간동안 마산 거리를 돌아다니며 행방불명된 자식을 찾아 다녔고, 4월 11일, 마산 해안의 신포동 부둣가에서 한 낚시군에 의해 바다에 떠오른 김주열의 시신이 발견된다. 당시 시신의 상태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참혹했는데, 우선 사인 자체가 최루탄에 맞아 머리가 함몰된 상태였고, 그 최루탄이 한쪽 눈에 박힌 채로 물에 수십일 간 빠져 있었던 상태다. 물에 빠진 시신은 빠른 속도로 부패한다. 그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모습을 부산일보의 허종 기자가 찍어 특보로 보도를 낸다. ( 사진은 구글에서 당시 보도와 함께 쉽게 찾을 수 있다 ). 이 사건을 통해 마산뿐만 아니라 전국이 광기에 휩싸이기 시작한다. 약 2만여명의 마산의 학생, 시민들은 '살인정권, 이승만 정권은 물러나라' 라는 구호를 들고 '3.15 정 부통령 선거 다시 하자'를 외치며 강경하게 대규모 시위를 감행했다. 죽은 김주열군이 학생이었기 때문에, 수많은 학생들이 이 시위를 주도했으며, 또한 중년의 어머니들 역시 '죽은 아들을 살려내라'라는 구호를 들고 거리로 나왔다. 이를 제 2차 마산 시위라고 부른다. 한편 여기에도 제 1차 마산 시위와 마찬가지로 정부는 뒤에 공산당이 개입해 있다는 소리를 하였고, 더 큰 분노를 사게 된다.
- 5. 4.18 고려대학생 학생시위와 4.19 혁명
4.18 고려대학생 학생시위
1960년 4월 18일, 고대생 3,000여명 정도가 학교 앞으로 나와 시위를 벌인다. 전국의 시위 물결은 많은 학생이 모여있는 서울까지 올라왔고, 이에 서울의 모든 대학이 21일로 거사일을 확정지었다. 하지만 고려대학교는 자신들의 신입생 환영회 날인 16일에 모여 이 거사를 진행하기로 한다. 하지만 경찰의 움직임에 막혀 결국 거사일을 18일로 미루었고, 예정대로 18일날 약 3,000명의 학도들이 거리로 나와 현 정권에 불만을 표시한다. 한편, 이승만 정부는 정치 깡패를 보내 이들을 응징, 해산시키려 하고, 이 과정에서 충돌이 발생한다. 이 과정에서 수십명의 학생들이 다치고, 몇몇 기자들 역시 부상을 입는다. 이때 한 기자가 학생들이 맞아 쓰러져 있는 사진을 신문에 보도했고, 당시 최고 지식인으로 취급받던 대학생이 정치 깡패에게 맞는다는 사실이 전국에 알려지며, 수 많은 대학생과 시민들의 분노를 사게 된다. 이 사진이 보도된 그 다음날이 바로 4월 19일이다.
4.19 혁명과 4.25 교수단 데모
학교로 귀교하던 고려대 학생들이 정치 깡패에게 폭행당했다는 기사는 김주열 사망을 비롯한 이전의 사건들과 맞물려 어마무시한 분노를 자아냈다. 이에 다음날인 4월 19일, 서울 시내의 대학생들이 일제히 봉기하였고, 중고등학생과 시민들도 이에 동참하여 대규모의 시위가 전개된다. 약 10만여명의 학생들을 비롯한 시민들은 이승만이 있던 경무대나 이기붕의 자택 쪽으로 방향을 잡고 행진하였다. 이에 경찰은 중앙청 앞에서 저지선을 형성하였고 강경하게 시민들에게 대응하였다. 시간이 흘러 오후 1시가 넘어서, 경찰이 곽영주의 지휘하에 시위대를 향해 무차별 팔포를 감행했다. 경찰의 무차별적인 총격으로 약 50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한다. 이로 인해 더욱 격분한 시위대는 경찰관, 파출소, 반공회관등을 공격하고 불태워 버리기 시작한다. 결국 이날 총 104명이란 수의 사람이 사망하기에 이른다. 이러한 시민 운동에 미대사관이 반응했다. 미대사관은 19일 성명서를 발표하여 폭력적 수단에 대해 개탄하고 데모군중의 정당한 불만을 해결해 주는 방향으로 근본적인 시정책을 취하도록 촉구했다. 같은날 미국무성역시 이 의견에 동의를 표한다. 또한 미대사였던 메카나기가 경무대로 이승만 대통령에게 접촉하여 현 한국 정부의 대응 방식을 비난하기에 이른다. 한편 이승만 정권은 우선 계엄령을 서울, 부산, 대구, 광주, 대전에 시행하였고, 우선 어느 정도 시위가 소강 상태에 이르게 된다. 한편 이렇게 소강상태로 흘러가는가 싶었던 혁명을 이번에는 교수들이 분위기를 바꾸어버렸다. 4월 25일, 교수들이 총 집합해 시국선언을 하고, '학생들의 피에 보답하라'라는 구호를 앞세워 시위에 나선다. 당시 교수들이 직접 시위에 참석하는것은 보기 드물었기에, 이 시위의 영향력은 굉장히 강했다. 이들은 3.15 재선거가 아닌, 직접적으로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를 요구하였다.
계엄군의 중립성
이승만이 계엄령을 발표하고, 계엄 사령관에 송요찬 중장을 임명한다. 비상계엄령 사령부가 육군본부에 설치되었고, 계엄부대인 육군 제 15사단이 서울로 들어왔다. 한편 이들 군부는 학생들의 데모를 살인, 방화, 파괴를 한 폭행과 명백히 구별하고 학생들은 폭도가 아니라고 명쾌하게 언명하였다. 이후 군대는 25, 26일 데모대의 뒤를 따르면서 파괴행위를 저지하는 일에만 주력하였을 뿐, 데모에 어떠한 직접적인 영향도 주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송요찬 중장은 직접 이승만 대통령을 만나, 시위대 사람들과 직접 면담을 해 보는것을 추진하였고, 이는 실제 시행되어 5명의 시위대 대표와 이승만 대통령이 면담을 통해 서로의 의견을 교환하는 기회 역시 만들었다. 이는 당시 우리나라 군 부대의 특성에서 그 이유를 찾아볼 수 있다. 당시 이승만의 경우 계속해서 군 내부의 파벌 ( 전 소속이 일본, 중국, 미국이었나, 혹은 출신 지역에 따라) 을 조장하여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는데 사용했다. 반면 미군의 경우 한국군에 필요한 군사 훈련과 군사 장비등을 지급만 하고, 큰 간섭을 하지 않았기에 당시 군은 미국에 더 호의적이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미국이 이미 시위대 지지 선언을 한 만큼, 이들 역시 시위대를 강압적으로 제압하지 않고 최대한 중립성을 지키는 방향으로 간 것이다.
- 6. 4.19 혁명 이후
4월 25일 대학 교수들의 시국 선언 이후로, 이승만 대통령의 측근들이 하나 둘 하야를 권유한다. 결국 송 중장이 주선한 면담을 가진 후, 10시 20분경 드디어 이승만이 시민들의 요구에 굴복하여 사임할 것을 발표했다. 이 대통령은 27일 국회에 사임서를 제출하였고, 이 9일간의 혁명역시 시민들과 학생들의 승리로 막을 내리게 된다. 이후 이승만 대통령은 하와이로 떠났으며 헌법 규정에 따라 수석국무위원인 허정이 대통령 권한을 대행하게 되어 후에 대한민국 제2공화국이 출범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