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추바이
취추바이(Qu Qiubai, 瞿秋白, 1899년 1월 29일~1935년 6월 18일)는 장쑤성 창저우 출신으로, 1920년대 후반 중국 공산당의 총서기였다.
젊은 시절
취추바이는 장쑤성 창저우에서 태어났다. 취추바이의 가족은 칭구어썅(青果巷)에 위치한 천향루(天香楼)에서 살았다. 그의 아버지인 취시웨이(瞿世玮)는 한때 세력가였던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는 그림과 검술에 능했고 의학에도 정통하였으나, 정치나 사업에는 큰 관심이 없었다. 취추바이의 어머니인 진쉔(金璇)은 고위 정부 관료의 딸로, 시에 정통하였다. 취추바이는 6남 1녀 중 장자였다. 취추바이가 어렸을 때, 그의 가족은 삼촌의 집에 살면서 친척들로부터 경제적인 지원을 받았다. 취추바이의 아버지는 교사로 일하기는 했지만 아편 중독 때문에 가족을 부양하지는 못했다. 1915년 취추바이의 어머니는 생활고와 빚 때문에 자살하였다. 1916년, 취추바이는 사촌의 지원을 받아 한커우의 우창 외국어 학교에 들어가서 영어를 배웠다. 1917년 봄 취추바이는 직업을 얻기 위해 베이징으로 갔지만 일반 공무원 시험에 통과하지 못했다. 정식 대학교 등록금을 낼 돈이 없었던 중국 외교부 산하의 새로 창립된 러시아어수료관(俄文专修馆)에 들어갔다. 러시아어수료관은 취추바이에게 일정한 봉급과 졸업 후의 직장을 보장하였다.
공산당원 활동
러시아어수료관에 들어간 취추바이는 프랑스어와 러시아어를 배웠고 여가 시간에는 어릴 때부터 관심이 있었던 불교철학과 중국 고전을 공부하였다. 또한 그는 버트런드 러셀의 물리와 인지에 관한 저작들이 불교의 가르침과 비슷하다고 느껴 관심을 가졌다. 베이징 대학의 도서관장이던 리다자오가 주최한 마르크스주의연구회의 토론에 참여했을 때 그는 혁명세력과 최초로 접촉하였다. 후에 공산당의 총서기이자 주석이 되는 마오쩌둥도 이 회의에 참가하고 있었다. 취추바이는 공무원으로서의 경력이 위태로워지는 것을 무릅쓰고 신보(晨报)의 기자로 취직하여 모스크바에 특파된다. 모스크바에서 취추바이는 러시아의 힘겨운 생활상을 조사하여 중국으로 보냈는데, 이는 볼셰비키 혁명 이후 중국인으로서는 최초의 러시아 관련 보도 중 하나였다. 그는 또한 톨스토이의 손녀 소피아와 함께 야스나야폴라냐에 있는 톨스토이 생가를 방문했고, 레닌의 대표단 연설과 표트르 알렉세예비치 크로포트킨의 장례에 참석하였고, 구소련의 오페라 가수 샬리아핀이 푸슈킨의 시를 노래하는 것도 두 눈으로 직접 목격하였다. 1923년 1월에, 취추바이는 당시 공산당 서기이던 천두슈의 초대로 러시아에서 돌아와 공산당에 가입하였다. 귀국한 취추바이는 공산당의 선전직을 맡게 된다. 1927년 천두슈의 사임 이후 그는 중앙 정치국의 임시 의장이자 공산당의 실질 총서기가 된다. 그는 1927년 11월 11일의 광저우 봉기 등의 활동을 조직하였다. 1928년 4월, 취추바이는 다시 모스크바로 가서 중국 공산당 대표로 2년간 일했다. 1930년 대표직에서 해임된 취추바이는 중국으로 돌아왔으나 좌경 모험주의의 동조자로 몰려 권력의 중심부에서 멀어지게 되었다. 해임 이후 취추바이는 상하이에서 작가이자 번역가로 일하면서 마오둔, 루쉰과 함께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문학계에 확산시키려고 투쟁하였고 또한 좌익문화운동의 지도자들과 교류하였다.
죽음
1934년 상황이 위태로워지면서 취추바이는 더 이상 상하이에 머물 수 없게 되어 장시 해방구로 이동하였다. 홍군이 대장정을 시작했을 때 취추바이는 게릴라전을 주도하며 남쪽에 머무르고 있었다. 1934년 푸젠의 창칭에서 체포된 취추바이는 1년 후 국민당에 의해 사형이 선고되었다. 취추바이를 체포한 국민당 정부는 각종 방법을 동원해 그를 항복시키려 시도하였고 심지어 고문까지 동원하였지만, 취추바이는 전향을 거부하였다. 1935년 6월 18일 취추바이는 창칭의 중산공원에 위치한 처형장으로 조용히 걸어 들어갔다. 그는 “인터내셔널가”와 “홍군의 노래”를 불렀고, “공산당이여 영원하라” “공산주의여 영원하라” 등의 구호를 외쳤다. 중산공원의 작은 언덕 뤄한링에 도착한 취추바이는 잔디 위에 앉아 집행인에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여기가 좋겠소!” 취추바이는 36세에 총살당하였다. 체포 기간 동안, 취추바이는 문학가에서 혁명가로서의 전향과 정치적인 의견을 책으로 썼다. 『만여적화』라는 제목의 이 책은 취추바이 사후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업적
문화대혁명 기간 동안 취추바이는 변절자로 신랄한 비판을 당했다. 그러나 1980년 중앙위원회에 의해 복귀되었고 현재는 공산당에 의해 추앙되고 있다. 그의 고향 창저우에는 취추바이 박물관이 있다. Tsi-an Hsia (夏济安; 夏濟安)는 그의 저서 『The Gate of Darkness: Studies on the Leftist Literary Movement in China(1968)』에서 취추바이를 "인정 많은 공산주의자(the tenderhearted Communist)"라고 묘사하고 있다. 취추바이와 러시아 언어학자인 V.S. Kolokolov는 만다린의 로마자화 체계인 Latinxua Sin Wenz(北方话拉丁化新文字)의 초기 발전에 기여하였다. 취추바이는 또한 인터내셔널가를 중국어로 번안하였는데, 이 버전은 공식 가사로 지정되었고 이후 중국 공산당의 국가로 사용되었다. 취추바이는 5∙4운동의 주요 지식인 중 하나였으며, 중국의 혁명운동 정신을 수립한 초기 공산당원 중 한 명이기도 하다. 그는 또한 서정시인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참고목록
Qu Qiubai in English Wikipedia(https://en.wikipedia.org/wiki/Qu_Qiuba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