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궈펑
화궈펑(華國鋒)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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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21년 2월 16일 산서성(山西省) 자오청(交城县) |
사망 |
2008년 8월 20일(87세) |
경력 |
국무원 총리(2대) 1974년 2월 2일 ~ 1980년 8월 20일, 중국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주석(2대) 1974년 4월 7일 ~ 1981년 6월 28일 |
직업 | 군인, 정치가 |
목차
요약
1976년 마오쩌둥 사후 중국의 최고지도자가 된 화궈펑(華國鋒)은 짧은 통치 기간으로 인하여 과도기적 지도자로 불렸다. 화궈펑은 마오쩌둥이 가지고 있던 당 주석과 중앙군사위원회 주석뿐만 아니라 국무원 총리까지 겸직하였기 때문에 공식적 직위로 보았을 때는 중화인민공화국 역사상 어느 누구보다도 강력한 지도자였다. 더구나 당시에는 중국에서 지도자의 종신제가 유지되었다. 화궈펑은 이러한 이점을 활용하여 마오쩌둥 사후 발생한 문화대혁명 4인방과의 권력투쟁을 성공적으로 진압하였으며, 마오쩌둥의 후계자라는 점을 활용하여 지지세력을 확보하기도 했다. 화궈펑은 자신이 문혁 시기 급성장하였을 뿐만 아니라 마오쩌둥이 지명한 계승자라는 점에서 문혁의 수혜자이자 계승자였으나 동시에 사인방의 감금을 통해 문혁을 끝낸 문혁의 종결자였다.[1] 그렇기에 화궈펑은 이후 ‘마오쩌둥의 결정과 지시가 모두 옳다’는 이른바 양개범시론(兩個凡是論)을 내세워 문화대혁명을 옹호하며 덩샤오핑을 비판하기 시작했다. 덩샤오핑은 문화대혁명 이후 해방된 간부, 군 원로 및 지방의 군 실력자 등 복권을 지지하는 인사들을 중심으로 광범위한 기반을 확보하고 있었기 때문에 화궈펑과 덩샤오핑의 직접적인 대결은 필연적 결과였다. 덩샤오핑은 이에 대해 실사구시론 등을 내세웠는데, 이들의 일련의 대립은 '진리투쟁토론'이라고 불렸다. 이러한 상황에서 화궈펑은 무리한 신약진정책을 추진하였고 투자 대비 최악의 결과를 낳은 1978년의 경제 실적에 따라 전면적인 비판에 직면하게 되었다. 반대로 덩샤오핑은 실사구시에 입각한 현대화 과제를 제기하며 지지세력을 확산해 나가기 시작했다. 결국 1980년 제11기 3중전회를 기점으로 화궈펑은 1980년 국무원 총리직, 1981년에는 당 중앙 주석직과 중앙군사위 주석직에서 사임하였다.[2] 총리직은 자오쯔양, 당 주석직은 후야오방, 중앙군사위 주석직은 덩샤오핑이 각각 승계하였다. 화궈펑은 이후 1992년 중국 공산당 대표, 중국 공산당 중앙당학교 교장, 중국 공산당 군사위원회 주석을 역임하는 등 당에서 활동을 이어갔지만, 이전과 같은 위치를 회복하기는 어려웠다.
생애
집권 이전
건국 이전
화궈펑은 산서성 교성현 출신이며 1920년생이다. 중일전쟁 발발 후에 혁명에 참가하여 산서성 綏遠의 中共黨 根據地인 晋綏에서 활약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많은 군사작전에 참여하여 무장공작대와 민병조직을 통한 게릴라 활동을 전개함으로써 중공당의 정규군을 도왔다. 뤄양(呂梁)의 싸움이나 타이위안(太原)의 싸움에도 참가했으며, 연대의 정치위원을 역임해 胡宗南이 되었고 閭錫山의 군대와도 싸웠다. 화궈펑은 교성현 당위원회를 주재하면서 한편으로는 지방의 행정관리에도 손을 댔다. 1947년 10월 중공당은 中共土地法大綱을 공포하여 화북과 진수에서 토지개혁 운동을 전개하고 그 뒤 당 조직 재건을 획책했다. 또한 교성현에서 토지개혁 운동을 지도하고 몰수한 지주의 토지를 농민에게 분배함과 동시에 교성현 당 조직의 재건을 추진해 나갔다.
공산당 생활
1949년 여름, 그는 華北老解放區南下工作團에 참가하여 호남성으로 갔다. 초대 湘陰縣 唐書記 겸 人民武裝部 政治委員을 역임했다. 또 당시 연대의 정치위원이라는 직책도 맡았다고 생각된다. 湘陰縣은 洞庭湖地區, 즉 浜湖區에 속해 있다. 浜湖區는 호남성의 토지개혁 중심지구로 지정되었다.中共黨 호남성위원회 政策硏究室에서는 상은현 和豊鄕을 浜湖區의 모델로 해서 농촌의 토지 소유 관계를 조사했는데, 그에 따른 모든 조사보고서는 화궈펑의 협력을 근간으로 해서 정리되었다. 이것이 湖南省에 있어서의 그의 현지조사 활동의 시초였다. 상음현에서의 2년간 화궈펑은 토지개혁을 진행하였는데, ‘계급의 적을 제거한다’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지주들에게 통렬한 타격을 가했다. 1951년 여름과 가을에 걸쳐 화궈펑은 湘漂縣 黨서기로 있었던 2년여 동안 湖南의 ‘농업합작화운동’은 아직 ‘相助組’의 단계였다. 화궈펑은 相助組에 전력을 기울임과 동시에 ‘반혁명제거운동’, ‘계급의 적은 제거한다’는 中共黨의 정책을 철저히 행하여 周小舟(1953년부터 湖南省의 黨서기로 근무)에게 인정을 받아 누구보다도 빨리 지방위원회 서기로 발탁되었다. 그는 1954년 초부터 1963년까지 12년간 湘潭地區委員會 서기로 있었는데 1957년까지는 專任이었고 그후로는 겸임이었다.
湘潭地區는 湖南의 동쪽에 위치해 있으며 북부의 몇 개 縣은 洞庭湖 평야의 일부를 이루고 있어 湖南省의 중요한 농산지였다. 湘陰縣 이남도 농업이 주된 생산수단이었기 때문에 ‘農業合作化運動’의 추진이 가장 긴급하고도 중요한 과제라고 생각되었다. 화궈펑이 黨專任 서기로서 黨위원회를 주재한 3년동안(1954~1956)은 중공의 농업합작화운동의 격변기었다. 1953년은 중공이 제1차 5개년계획을 시작하는 해로써 과도기의 총노선을 농업합작화운동에 집약시켰으며 그중에서도 농업의 사회주의적 改造의 실현을 모토로 했다. 같은 해 12월에는 中共黨 中央委가 ‘농업생산합작사의 발전에 관한 결의’를 발표했고 다음 해에는 相助組를 병합하여 초급농업합작사를 조직했다.
1955년 2월 화궈펑은 湘陰縣 洞庭園에 湘潭地區委員會 工作組를 파견하여 湖南省에서 최초로 고급 농업생산합작사를 설립시켰다. 1956년까지에는 고급 농업합작사에는 아직 실험단계로써 숫자상으로는 적은 편이었다. 화궈펑은 타지방 간부들처럼 초급 농업합작사의 설립에 역점을 두었고 그 설립 템포는 상당히 빨랐다. 1953년 湘潭地區에는 75개의 농업생산합작사밖에 없었지만 1954년 겨울부터 1955년 초에 걸쳐 4,500개社 이상으로 확대되었고 55년 가을에는 이미 6,400으로 늘어났다. 1955년 마오쩌둥을 중심으로 편집된 ‘중공농촌에서의 사회주의 提高’라는 논문집 3권이 출판되었다. 이 책에는 湖南省 관계의 조사보고 6편이 수록되었는데 그 가운데 4편은 湘潭地區 간부들이 쓴 것이며, 또 하나는 中共黨 中央書記處 湖南工作組에 의해 쓰여진 湘潭地區와 長沙縣 및 寧鄕縣에 관한 조사보고서였다. 6편의 조사보고서 가운데 湘潭縣에 관한 것이 5편이나 차지하고 있는 것은 주목할 만한 사실이다. 湘潭地區의 간부들이 쓴 4편의 조사보고 가운데 3편은 화궈펑에 의해 정리되었던 것이며, 이들 보고서에는 한결같이 마오쩌둥을 찬양하는 내용으로 일관되어 있었다. ‘중국 농촌에서의 사회주의 提高’가 정식으로 출판되기 이전에 중앙당 발행잡지 <學習>은 1955년 12월호에 농업합작화 특집으로 마오쩌둥의 ‘농업합작에 관한 諸문제’ 및 中央黨의 관계자료와 3편의 地區黨 書記 조사보고를 수록했다. 이 3편의 조사보고는 中共黨 山東省 膠州地張釣 및 화궈펑이었다. 화궈펑의 조사보고는 ‘농촌 각계층의 동향을 충분히 연구하자’라는 題下에 농촌합작화운동으로 貧農들의 곤란한 현실을 타개하여야 한다고 강조하고 中農에 의지하여 農業合作社를 설립하는 방법을 비판함과 아울러 일부 간부들의 ‘자본주의적 타락 경향’을 비난했다. 이때부터 마오쩌둥이 3인의 地區委 書記를 농촌합작화운동의 모범적 인물로 삼았던 것으로 보기도 한다.[3]
1957년부터 화궈펑은 湖南省의 黨과 정부기관에서 활동하게 되었다. 루산회의(1959년 9월)까지는 湖南省黨委員會 書記 후보, 湖南省文敎辨公室 主任 및 과학공작위원회 副主任을 역임하여 湖南省의 문화교육부문을 장악하고 있었다. 文敎辨公室은 문화국·교육청·위생청 및 제육운동위원회를 총괄하고 있었던 관계로 화궈펑의 역량은 위의 각 부문에 미치고 있었다. 화궈펑이 호남성의 省 레벨의 기관에 부임한 것은 바로 마오쩌둥이 ‘반우파운동’, 즉 지식인에 대한 대규모적인 숙청운동을 전개하고 있던 때였다. 화궈펑은 중앙당의 정책을 철저히 실행하여 湖南師節學院·湖南醫學院·中南鑛山治金學院 및 文藝科學 부문에서 적극적으로 ‘반우파운동’을 전개했다. 마오쩌둥의 고향 후난성의 작은 지역인 자오청현 서기로부터 본격적인 지도자수업을 시작한 화궈펑은 말 그대로 별다른 정치적 기반 없이 마오쩌둥이 발탁해서 고속성장한 전형적인 ‘낙하산’ 지도자였다. 화궈펑이 마오쩌둥을 직접 만난 것은 1959년 6월 마오쩌둥의 첫 고향방문 때였다. 당시 그는 샤오산이 속한 샹탄현 제1서기였다.
마오쩌둥의 주치의였던 리즈수이도 <마오쩌둥의 사생>에서 화궈펑과의 첫 대면장면을 기록해 놓았다. … 샹탄현 당 지방위원회 제1서기인 화궈펑이 주석 일행을 맞이했다. 내가 18년 후에 마오의 후계자가 될 그를 만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우리는 상탄에서 화궈펑과 이야기하며 잠시 쉬었다. 그러나 그는 샤오산에는 동행하지 않았다. 마오는 샤오산의 농부들이 그가 근처에 있으면 솔직하게 이야기하지 못할 것 같아 걱정했던 것이다.
화궈펑 본인이나 마오쩌둥은 물론 누구도 그가 마오쩌둥 사후 마오의 정치적 위상을 이어받게 될 후계자가 되리라고 상상하지 못했다. 당시 화궈펑의 나이는 38세에 불과했다. 어쨌든 화궈펑이 마오쩌둥의 눈에 들었던 것은 사실이다.
마오쩌둥의 후계자
집권시기
4인방 숙청
진리 투쟁 논쟁
실각 이후
참고자료
서적
1. 중국 최고 정치지도자들의 리더십, 이승익, 2011.
2. 후난 마오로드, 서명선, 2015.
논문
1. 모호한 전환점, 안치영, 2008.
2. 중공의 정치현실과 화국봉 노선, 황현봉, 1977.
3. 중국공산당의 범시파와 개혁파의 노선비교, 전병곤, 1990.
4. 중국공산당 3중전회(全會) 성격 고찰 -11기 3중전회(全會) 이후 집단지도체제 교체기의 3중전회(全會)를 중심으로-, 최경식, 2015.
5. 중국 '사상해방' 논쟁에 관한 연구, 공봉진, 2009.
6. 중국 화궈펑과 소련 흐루시초프를 보자, 이동훈, 2012.
7. 화국봉의 숨겨진 이력, 정망, 1997.
8. 화궈펑 체제의 승계와 실각을 통해 본 김정은 체제의 딜레마, 안치영, 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