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천안문사건
목차
배경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정책
1978년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정책이 점차적으로 실시되었다. 여기서 개혁은 근대적 생산력 발전을 통해 사회주의를 실현하는 시장경제화를 의미하고, 개방은 폐쇄적인 자력갱생정책을 포기하고 국제시장에 참여함을 의미한다. 농업, 공업, 경제 방면에서 많은 변화가 있었는데, 농업 부문에서는 1983년 인민공사가 공식적으로 해체되었고, 소유는 집체가 농사 및 생산물은 각자 가지는 소유권과 사용권의 분리가 이루어졌다. 이를 농가생산도급제라고 하는데 개인이 생산한 농산물을 개인이 갖게 되는 것으로 개개인이 더 열심히 일함으로써 농민소득이 향상되는 효과를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일시적인 것으로, 소유권과 사용권의 분리는 농지 파편화, 효율성 저하, 빈부격차 확대 등의 문제들을 야기하게 되었다. 공업부문에서는 민영기업이 많아졌고, “철밥통을 타파하자”라는 주장 하에 고용의 유연화가 이루어졌다. 80년대 중반부터 신규사원을 자유 해고시킬 수 있고 90년대부터는 모든 노동자를 자유해고 시킬 수 있는 전면적인 노동계약제를 실시한 것이다. 이는 노동자 입장에서 언제든지 해고당할 수 있음을 의미했다. 이 외에도 중국 인구의 7분의 1 정도의 2억 농민이 도시로 넘어와 노동을 하는 농민의 이주노동자화, 상품 가격 결정의 다원화가 이루어졌다. 이러한 농업, 공업 개혁에도 문제점들이 있었는데, 바로 관료층이 가장 이득을 본다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관료들이 공동의 땅이었던 것 중 제일 좋은 땅을 자기 이름으로 돌려버리고, 국유기업의 가격으로 물선을 사들여 시장에 높은 가격으로 판매하는 일이 빈번했다. 이 과정에서 크게 부유를 축적한 사람이 많았다. 경제적 변화로는 민영화 기업의 출현하고 자영업 가능해졌고, 연해지역 경제특구 설치, 중공업과 건설부문 투자 삭감, 경공업과 농업 생산 확대 등이 있었다. 부업과 개인상점이 가능해지면서 농민들이 바로 돈을 만질 수 있게끔 한 것이 큰 변화였다.
1980년대 중반 인플레이션
1988년 초 자오쯔양의 연해발전전략이 실행되었다. 총 2억의 인구를 가진 만주에서 광동까지의 연해지역을 외국인 투자가에게 개방하는 것인데, 유입된 외국자본은 경기부양정책과 함께 놀라울 정도로 높은 공업 성장률을 이룩하는 원동력이 되었고, 1980년대의 마지막 몇 년 간 덩샤오핑 정권을 침몰시킨 관료들의 부패풍조에 한 몫 하기도 했다. 자오쯔양의 시장지향정책은 기업개혁과 가격개혁 두 가지가 있었다. 그의 기업개혁은 국유공장의 재정과 경영에 대한 정부의 통제를 제거하려는 노력이 기반이 되었지만 대부분 무산되었고, 가격개혁은 가격을 시장의 힘에 의존하게 하는 정책이었다. 하지만 이 역시 경제와 금융에 혼란을 초래하였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관료들의 부패가 성행했다. 이러한 배경 하에 1988년 초가을, 대도시의 인플레이션이 연 30%에 육박하였다. 정부는 엄격한 긴축정책을 채택하였고 다시 기업과 지역에 통제를 가했다. 긴축정책은 과열된 경제를 냉각시키기 위함이었지만 인플레이션과 긴축정책 모두 도시민 대다수에게 고통을 안겨주었다. 농민에게는 비료가격이 폭등, 정부의 곡물 수매가 하락, 부패관료들의 불법세금 징수 등의 문제점이 발생했다. 특히 중국경제에서 가장 역동적인 부문이었던 향진기업은 본래 손쉬운 신용대출에 의존했지만, 긴축정책에서 신용대출을 엄격하게 통제하는 바람에 일부 향진기업은 문을 닫았고 대부분은 생산을 감축했다. 이에 수백만의 젊은 노동자들이 직장을 잃고 일부는 유민(遊民)집단에 가세했다. 천안문사건이 발생했던 해인 1989년 봄, 이렇게 정처 없이 떠도는 유민집단(룸펜프롤레타리아트) 대열에 휩쓸려 들어간 사람들의 수가 5천만 명 이상으로 추산되었다. 반면에 외국지역에 종사했던 사람들, 민영 기업의 경영자와 고용인, 농촌의 기업가와 도시번화가의 잡상인 등 일부 사람들은 1988년 한 해 동안 엄청난 부를 획득하였다. 이렇게 점점 더 커지는 빈부격차, 하락하는 대다수 시민들과 농민들의 생활수준, 부정부패를 일삼는 관료들과 수상한 방법으로 벌어들인 돈을 자랑하는 사람들에 대한 커져가는 분노, 이를 야기한 덩샤오핑 정권에 대한 불만이 1989년 겨울과 봄, 광범위한 사회적 동요의 불씨가 되었다.
대학가의 민주토론회와 후야오방 실각
1980년대 중후반 대학가의 민주토론회가 결성되었다. 학생들은 자신들이 좀 더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민주적인 사회를 원했다. 당시 총서기였던 후야오방은 이 학생들을 비롯한 민주지지자들을 지지하고 자유와 민주를 수용했다는 이유로 1987년에 실각되었다.
진행과정
1989년 4월
- 4월 15일: ‘’후야오방의 사망’’’
- 후야오방은 4월 8일 오전 9시 교육문제를 논의하는 정치국회의에서 심장마비로 쓰러졌고, 치료를 받았으나 15일에 향년 37세로 사망하였다. 후야오방은 1980년대 초의 여러 정치 개혁(무슨?)을 이루고, 1986년 학생들의 항의 시위(무슨 시위인지 찾기) 후 축출되자 자유주의자로서의 이미지가 더욱 높아졌다. 후야오방이 정치국 회의에서 보수파와 논쟁을 하다가 심장마비로 사망했다는 소문(사실인지 확인)이 학생들 사이에 급속히 확산되었다.
죽지 말아야 할 사람은 죽고, 죽어야 할 사람은 죽지 않네. 야오방은 이미 죽었고, 좌파가 또다시 번성하니, 국민이여 깨어나라, 투쟁을 잊지말라 (베이징대학의 대자보 내용)
- 4월 16일: 학생들의 후야오방 추모
- 학생들이 후야오방을 추모하기위해 천안문 광장에 모여서 광장 가운데에 있는 인민의 영웅 탑에 화환을 바치고 여러 연사들의 연설을 들었다(어떤내용으로 누가했는지)
- 4월 17일: 행진
- 정법대학 학생 600명이 학교에 집결하여 천안문광장까지 행진하였다. “자유만세”, ”반대 관료주의”, “야오방동지는 영원히 우리 마음에 살아있다!”등의 구호를 외쳤다. 이 시위는 법학과의 강사 천샤오핑이 주도하였다.
- 학생과 시민이 후야오방의 사망을 슬퍼한 이유
1. 기대와 원로, 보수파에 대한 반감-후야오방은 공산당에서 가장 개혁적이고 민주적으로 인식되던 인물. 그가 민주적인 정치개혁을 추진하길 바람. 2. 존경-다른 정치가들과 다르게 청렴. 자식도 부패와 연루되지 않음. 3. 부채의식-1986년~1987년 학생운동에서 대학생과 지식인을 보호하려다가 원로와 보수파에게 미움을 받아서 부당하게 쫓겨남.
- 4월 18일: 학생들의 인민대회당 연좌농성(사진첨부하기)
- 100명 정도의 대학생들이 천안문 광장 왼편에 있는 인민대회당 앞에서 연좌농성을 벌임. 베이징대학의 왕단과 궈하이펑등은 학생을 대표하여 청원서를 전국인민대표대회, 공산당 중앙 판공청 및 국무원 판공청의 신방국에 전달하였다. 청원서에는 후야오방의 재평가, 고위 당정간부의 재산 공개와 부패반대, 언론자유와 시위 자유의 보장 등의 내용이 포함된 7개의 요구사항이 있었다.
- 이처럼 대학생들은 사회주의 이념이나 공산당 일당제를 핵심으로 하는 사회주의 정치 체제, 공산당이 추진하는 개혁 개방을 부정하거나 반대하지 않았다. 또한 자유민주주의 수립이나 국민의 정치적 권리의 보장을 요구하지 않았다. 초보적이며 제한된 범위의 민주화를 요구했다. 이는 칼훈교수가 1989년 5월 천안문광장에서 실시한 설문 내용을 통해도 알 수 있다. (대다수가 부패의 종식을 원하고 자유선거는 부수적인 목표라는 결과가 나왔다.)
- 4월 19일: 새로운 학생조직의 설립
- 베이징대학에서 2000여명이 모여 조직설립. 왕단, 리진진, 차이링 등이 대표적이다.
- 4월 20일: 신화먼 사건
- 대학생들이 동맹휴업을 시작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신화먼은 최고지도자의 거주지인 중난하이의 출입문이다. 2000-3000여명의 학생들은 19일 밤부터 신화먼에서 연좌시위를 벌였고 무장경찰은 이들과 대치하였다. 새벽에 학생들이 300명 정도로 남자, 경찰은 강제 해산시켰고 이 과정에서 경찰의 구타로 부상을 입은 학생들이 있었다. 다음날 <인민일보>에서 학생들을 비판하면서 경찰의 구타에 대해 언급하지 않은 편파보도를 하였으며 그로 인해 분노한 학생들이 동맹휴업을 시작했다.
- 전국 11개 이상의 도시에서 동조행진과 동조 항의 시위. 상하이에서 삼천여명의 학생시위, 톈진에서도 시위.
- 4월 21일:
- 중앙군사위원회 베이징의 치안유지와 후야오방의 운구차 행렬을 보호하기 위해 무기는 r휴대하지않은 병력을 동원하기로 결정. 병력의 규모는 자료마다 차이가 있는데, 리펑은 1500명이라 주장하고 어떤 자료는 8986명이라고한다.
- 4월 22일: 후야오방의 장례식, 인민대회당 청원사건
- 정부는 천안문 광장에 수천의 군, 경 병력을 배치하고 시위를 일절 금지하였다. 하지만 전날 밤이 새도록 학생대열이 경찰의 저지선을 뚫고 광장으로 행진하였다. 새벽녘 광장에는 깃발, 플랜카드로 가득하였다. 약 15만명의 시위자들이 연사들의 끊임없는 연설을 듣고, 인터내셔널 가를 반복하여 부르며 열을 지어 앉아있었다. 정부는 한발자국 물러서서 학생들이 장례를 위해 광장에 머무를 수 있고 이 시위는 국영 텔레비전 방송에 방영할 것이라고 하였다. 군인은 광장 주위에서 지켜보기만 하고 시위자 또한 조용히 앉아 장례식을 지켜보았다. 하지만 식이 끝나자 학생들은 다시 구호(:인민대중 만세, 민주주의 건설하고 독재를 타도하자, 우리는 다시 돌아올 것이다.)를 외치며 행진하였다.
- 10시부터 추도식이 진행되었고 11시에 주요지도자들과 원로들이 돌아갔다. 하지만 이 무렵 인민대회당앞에서 4명의 대학생이 청원서를 제출하고자 하였다. 3명은 두손으로 청원서를 들고 무릎을 꿇으며 한 시간 넘게 기다렸으나 정부책임자중 누구도 이를 접수하지 않았다. 학교로 돌아간 학생들은 전면적인 동맹 휴업을 결정하였다. (리펑총리는 이에 억울하다는 입장. 자신은 아무런 보고를 받지 못하였다는 해명을 발표하였으나 그것이 사실일지라도 이미 학생들은 분노한 상태였다.)
- 4월 22일, 23일: 다른 지방에서의 시위
- 주말에는 시안(4000명의 병력이 파견됨.)과 창사에서 폭동이 일어났다. 여기에서는 수천 명의 노동자와 실업자들이 학생들의 시위행진에 가담하였다. 쓰촨성의 충칭에서는 군중이 도심을 꽉 메우고, 우한에서는 문화 혁명이후 이 지역에서 가장 큰 규모인 3만명의 시위행진이 벌어졌다.
- 이를 통해 계엄령전부터 이미 병력 동원이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운동을 진압하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정부가 학생운동이 그렇게 심각하다고 여기지 않았으며, 중요한 국제행사(5월4일 아시아개발은행 22차 총회, 고르바초프의 방중)가 예정되었기때문이다.
- 4월 23일: 베이징 고교학생자치연합회(약칭 고자련) 출범과 자오쯔양의 출국
- 고자련은 베이징대학의 민주살롱을 만든 류강이 학생운동의 진행이 개별학교를 초월하여 행동을 통일하고자 만들어졌다. 고자련은 4월 27일 대시위, 5.4운동기념시위등 주요시위와 활동을 기획하고 주도하였다.
- 자오쯔양은 북한 방문을 위해 출국하였다. 방북을 연기하자는 의견도 있었으나 자오쯔양은 국사방문은 쉽게 변경할 수 없으며, 이 운동은 애당 및 애국적, 학생주류는 양호하다고 판단하였다. 하지만 이는 당시 원로와 보수파(리펑, 리시밍, 천시퉁)과는 다른 의견이었다. 자오쯔양은 학생들에게 시위중단을 설득하되 소통을 위주로 하라는 방침을 리펑에게 지시하며 출국하였다.
- 4월 24일:
- 리펑은 정치국 비상회의 소집하였고 이 회의에서 “필요하다면 피를 흘리더라도 이 운동을 진압 해야 한다”는 덩샤오핑의 요구가 승인되었다. 언론은 이 운동을 “공산당을 뒤집어엎으려는 조직적 음모”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국영 매체의 언론인 수백 명이 이 운동에 대한 진실을 말할 권리를 요구하며 시위하였다. 또한 몇몇 대학에서 무기한 수업 거부운동이 시작되었고 다음날 베이징의 모든 대학으로 확대됨.
- 4월 26일: ‘’’“동란을 반대”인민일보 사설(사진첨부)’’’
- 인민일보 사설에서 이 시위는 나라 전체를 혼란에 빠뜨리기 위한 계획적인 음모이며 중국공산당의지도와 사회주의 체제를 부정하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따라서 불법적인 집회와 허가 받지 않은 시위는 엄금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 4월 27일: 학생과 노동자의 도시 시위행진
- 운동 내부에서 분열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으나 이 날 거리로 나가 노동자와 시민 사이에서 지지선동을 하고 대중적 시위행진을 벌이기로 결정하였다. 이 행진은 하루동안 도시를 장악하였는데 학생과 노동자의 수가 거의 반반을 이룬 대략 15만명의 시위대열이 15시간 동안 행진하였다. 노동자들이 학생들에게 동조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 직접 항의 시위에 참여함으로써 이 운동은 결정적인 진전을 맞게 되었다. 노동자군중이 군대를 포위해서 행진하는 학생들에게 다가가지 못하게 막았다. 이 시위는 5월 4일 전국적 규모의 시위를 하자는 결의로 끝났다.
1989년 4월 5일 후야오방이 사망하고, 4월 17~22일 후야오방 실각의 원인 규명을 요구하며 대규모 추모시위가 진행되었다. 22일 내부에서는 후야오방의 장례식이, 외부에서는 대화할 것을 요구하는 학생들의 시위가 이어졌다. 이에 1989년 4월 26일 학생들의 시위를 '동란(動亂)'이라고 규정지은 인민일보 사설이 공개되었고, 4월 27일 대규모 대학생 행진과 5.4 거리 행진, 5월 13일 단식 투쟁, 5월 15일 소련 고르바초프의 방문(본래 천안문에서 만남을 가질 계획이었지만 광범위한 시위로 인해 비행기 승강장에서 만남이 이루어졌다. 이 날 천안문의 시위에 대한 외신의 보도가 잇따랐다), 5월 17일 학생을 비롯한 노동자, 자영업자 등 100만 시민의 천안문 광장 집회, 5월 18일 학생대표와 리펑 총리의 만남과 자오쯔양의 시위현장 방문이 있었다. 5월 19일 덩샤오핑이 계엄령을 선포하였고, 1989년 6월 4일 유혈진압이 거행되었다.
천안문 사건의 의의
아래로부터의 민주화운동
천안문 사건은 대학생들의 민주화운동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지만, 개혁개방 10년의 억압적인 분위기와 경제적인 문제점 등 사회에 불만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참여한 노동자 및 시민들의 참여도 컸다. 정부 입장에서 사회주의의 주인은 노동자였고, 이 때문에 정부가 가장 두려워했던 것은 노동자들의 불만이었다. 실제로 천안문 사건 때 가장 큰 인명피해를 입은 것은 노동자였다. 천안문 사건을 단순히 천안문 광장에서 일어난 학생들의 민주화 운동으로 규정짓기 보다는, 중국 전역 도시 지역에서 일어난 지식인, 학생들뿐만 아니라 노동자, 개인 상공업자, 일부 당 간부, 하층민, 농민공 까지 참여한 광범위한 정치적, 경제적 사회운동으로 규정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를 비롯한 외신들은 이 천안문 사건을 서구식 민주화를 주장하는 운동이라고 여기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시민들이 원했던 것은 서구식 민주주의가 아닌 관료주의가 만연한 사회에서 자신들이 좀 더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민주적인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었다.
천안문 사건 이후
천안문 사건 이후 사회는 정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정상으로 돌아왔다. 민주화 운동을 낳은 강력한 정치적, 도덕적 열정이 이토록 빨리 사그라지고 사라져 버렸다는 것, 그리고 정부가 조장하는 소비주의와 내셔널리즘 문제에 파묻혀버린 것은 남겨진 사람들에게 좌절감을 안겨주었다. 덩샤오핑은 유혈진압으로 희생된 시민들의 유가족들에게 사과 한 마디 없었으며, 오히려 당시 동원되었던 군대와 경찰들의 노고를 치하하고 사망한 병사들의 가족에게 위로를 전하는 것에 그쳤다. 민간인 희생자들에 대해서는 ‘사회적 쓰레기’라고 비난하기 까지 했다. 실제 사망자 수는 2000~7000명에 이르지만 정부가 발표한 사망자는 300명이었다. 1990년대 중국사회는 더욱더 가혹한 정치적 탄압이 이루어졌다. 오로지 경제성장에만 치중했고, 사회주의와 민주화를 부정하고 자본주의를 이룩하려는 데에 힘을 쏟았다.
참고자료
- 모리스 마이스너 저, 김수영 역, 마오의 중국과 그 이후2 , 이산, 2004.12
- 찰리 호어 저, 김희정 옮김, 천안문으로 가는 길, 책갈피, 2002.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