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목
개요
두목(803년~약852년)은 당대의 걸출한 시인이자 산문가로 재상 두우(杜佑)의 손자이자 두종욱(杜从郁)의 아들이다. 자는 목지(牧之)인데, 호는 번천거사(樊川居士)이다. 경조만년(今陕西西安)사람이다. 26세 때 진사에 급제하여, 굉문관교서랑(弘文馆校书郎)이 되고,황주(黄州)ㆍ지주(池州)ㆍ목주(睦州) 등의 자사(刺史)를 역임한 후, 벼슬이 중서사인(中书舍人)까지 올랐다. 만년에 장안남(长安南) 번천(樊川) 별장에 있었기 때문에 후세에 '두번천(杜樊川)' 이라 불리며 '번천문집(樊川文集)' 을 저술하였다. 두목의 시는 칠언 절구로 유명한데, 내용은 역사를 읊은 감화를 위주로 한 것으로, 그의 시는 영발과 명랑하고 경세적인 것이 많아 만당의 성취가 매우 높다. 주요 작품에는 《아방궁의 부(阿房宫赋)》,《강남춘(江南春)》등이 있다.이상은(李商隐)과 더불어 '소이두'(小李杜)로 불리며, 또 작품이 두보(杜甫)와 비슷하다 하여 '소두'(小杜)로 불린다.
생애
초기 벼슬길(仕途早期)
두목은 가문에서 열세 번째로 당나라 사람들의 관습에 따라 '두십삼(杜十三)'이라고 불렸다. 두목의 정치 재능이 출중한 두목은 십대 때 당헌종(唐宪宗)이 번진(藩镇)을 토벌하고 국사를 일으켜 세운 때였다. 그는 독서를 하면서 군사에 관심을 가지고, 손자(孙子)를 전문적으로 연구한 적이 있다. 장경(长庆) 2년(822년), 두목은 20세 때에 치란과 군사에 전념했다. 두목은 23세에 《아방궁의 부》를 지었다. 25세에 두목은 또한 번진 문제에 대한 그의 견해를 표현했다. 이때의 두목은 이미 유명하고 작품에 전해지고 있다. 당문종(唐文宗) 대화(大和) 2년(828년), 26세의 나이로 진사에 급제하였다. 대화(大和) 7년(833년)에 양주(扬州)의 회남절도사(淮南节度使) 우승유(牛僧孺)의 밑에서 서기(书记)를 맡았다. 대화(大和) 9년(835년) 두목은 33세에 양주에서 장안(长安)으로 건너가 어사(监察御史)를 감찰했다. 개성(开成) 4년(839년)에, 연말에 두목은 선주(宣州)를 떠나 장안으로 가서 좌보궐(左补阙)을 하고, 사관(史馆)을 수찬하였다.
외방시기(外放时期)
회창(会昌)원년(元年)(841년)에 두목은 비부원외랑(比部员外郎)으로 전근되었다. 회창 2년(842년)에 황주(黄州)자사(刺史)로 외방되었다. 이후 두목은 지주,목주등의 자사를 역임했다. 정치와 이익을 위하여 폐단을 제거하고 국민을 배려했다. 회창 5년(845년)에, 7월에 당무종(唐武宗)이 조서를 내려 불교를 훼손했다.두목은 이 조치에 매우 찬성한다. 당선종(唐宣宗)대중(大中)2년(848년)에 사관수찬을 하고, 이부원외랑(吏部员外郎)으로 전출하였다.
노년 시기(暮年时期)
선종 대중 3년(849년)에 두목은 봉록이 낮아서 가족을 부양하기 어려웠다. 그리고 항주(杭州)자사를 놓아달라고 요청했지만 승인하지 않았다. 선종 대중 4년(850년)에 이부원외랑으로 승진했다. 그러나 두목은 여전히 여러 차례 호주(湖州) 자사를 놓아달라고 부탁하여, 세 번까지 이어졌고, 마침내 그의 요구에 응했다. 그러나 두목의 외방 요청은 경제적인 이유 때문이 아니라 조정에 만족하지 못해 자신이 조정 중에서 제대로 할 수 없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동년 가을에 두목은 호주에 가서 자사를 취임했다. 선종 대중 6년(852년)에 겨울에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주요작품
강남춘(江南春) 千里鶯啼綠映紅(천리앵제녹영홍) 강남 천리에 꾀꼬리 울고 꽃 화사하게 피었는데, 水村山郭酒旗風(수촌산곽주기풍) 강촌 산골주막에 깃발 펄럭이네. 南朝四百八十寺(남조사백팔십사) 남조 때 지은 사백 팔십 사찰엔, 多少樓臺烟雨中(다소누대연우중) 수많은 누대들이 이슬비에 젖는구나. 《강남춘》은 당나라 시인 두목이 지은 칠언절구다. 시 속에는 명랑한 강남의 봄빛을 묘사할 뿐만 아니라 강남의 안개비가 자욱한 누대의 경치를 재현해 놓아 강남의 풍광을 더욱 신기하고 황홀하게 하는 색다른 정취가 담겨 있다. 남조황제가 중국 역사에서 불교를 지나치게 신봉하고, 두목이 있던 시대의 불교도 악질적으로 발전한 반면, 두목은 반불사상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풍자시라고 보는 학자도 있다. 유교를 숭상해 불교를 배척하고 통치자의 치국(治国)에 대한 무력감과 불도(佛道)의 오국(误国)에 대한 우려를 표출하자는 취지로 해석하는 학자도 있다.
참고문헌
1.중국 위키피디아의 내용을 인용 번역한다
2.[네이버 지식백과] 강남춘 [江南春絶句] (두산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