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중국이 바라본 유교
목차
머리말
중국은 오랜 세월 세계의 패자자리에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중국의 위치는 중국의 것이 세계최고의 것이라는 중화사상을 만들었고, 중국 내부를 부패하게 만들었다. 중국은 아편전쟁을 시작으로 태평천국운동, 청일전쟁, 의화단의 난, 신해혁명 등을 겪으며 끝없는 혼란 속에 빠지게 되었다. 중국은 위와 같은 혼란을 겪으면서 자기반성, 새로운 시도와 실패를 반복하며 근대화를 향한 걸음을 걸아가게 된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영국과의 아편전쟁(1840년~1842년)의 혼란을 겪고 정체되어있던 중국의 모습의 반성과 함께 증극번, 이홍장, 좌종당 등의 한인 관룍 중심이 되어 서양의 과학기술을 받아드리고 부국강병의 시도하는 양무운동을 펼치게 된다. 그러나 새로운 도약을 꿈꾼 중국의 양무운동은 서양 국가에 의한 실패가 아니라 오랜 중국 역사 속에서 약국으로 평가받던(혹은 그 이상의 무시를 하던) 일본과의 청일전쟁(1894년~1895년)의 처참한 패배로 실패하게 된다. 청일전쟁의 패배는 세계 패권의 주인임을 자부 하던 중국에게 있어서 아편전쟁의 패배로 세계패권의 자리를 내준 것의 치욕을 넘어서 더 이상 아시아 속에서도 패권의 자리를 유지하지 못하고 일본에게 내어줘야 하는 치욕을 경험하게 해주었다. 청일전쟁의 속 쓰린 치욕만큼 청일전쟁 패배 이후 중국은 보다 근원적으로 중국을 돌아보게 되었고 양무운동의 절충적인 개혁을 넘어서 강유위와 양계초를 중심으로 양문운동 보다 급진적인 부국강병 운동인 변법자강운동(1898년)을 펼친다. 변법자강운동은 중국의 전통적인 정치제도, 교육제도의 개혁을 통해 부국강병을 성취하자는 급진적인 운동이다. 그러나 이것 역시 서태후의 쿠데타로 인해 실패하게 되고 몇 차례에 걸친 전진을 위한 중국의 변화는 중국 사회에 큰 혼란을 가증시키는 결과를 초례하게 된 것이다. 앞서 언급한 양무운동과 변법자강운동 두 운동은 모두 정체된 중국의 모습을 문제로 자각하고 서구의 제도를 중국보다 앞선 개념으로 바라봄과 동시에 중국의 문제를 서구의 제도 속에서 해결하고자 했다는 점에서 의의를 갖는다. 그러나 두 운동은 2천년에 달하는 중국의 황제제도의 문제점을 인식하지 못한 채 시작되었고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실패로 끝나게 되는 한계를 갖는다.
중국 전통의 황제제도에 문제 의식과 함께 청나라를 무너뜨리고 중화민국을 세운 것이 바로 신해혁명(1911년)이다. 신해혁명은 손문을 임시 대총통으로 하고 남경정부를 수립하고 삼민주의(三民主義)를 지도이념으로 삼는 혁명이었다. 그러나 신해혁명 역시 많은 한계를 가지고 있다. 신해혁명은 황제제도를 타도한 급진적인 혁명운동이였지만 청나라 타도 이후의 국가운영에 관한 지식의 부제로 인하여 제대로 국가를 운영하지 못했다. 그리고 손문이 원세개에게 대총통의 자리를 내어주면서 신해혁명의 주측 세력이 약화되었고 이후 원세개의 독제와 제제운동(帝制運動)으로 인하여 중국의 근대화를 향한 걸음은 또 다시 혼란으로 빠지게 된다.
위에서 살펴본바와 같이 중국은 끊임없이 근대화 운동을 실시하였지만 성공하지 못 했다.왜냐하면 중국 전통 대한 이해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모든 혁명파들은 중국의 문제를 중국의 전통에서 찾고 해결책으로 서구의 제도와 사상을 내세웠지만 중국 전통에 대한 근원적인 이해가 부족하였다. 문제에 대한 이해의 부족은 당연히 실패를 야기하게 되는 것이다. 근대의 중국은 위와 같은 몇차례의 시행착오를 통해 중국의 근대화를 위한 타도의 대상으로써 중국 전통의 유교를 바라보게되었다.
중국의 유교에 대한 세 가지 관점
중국은 여러 차례의 근대화 시도가 실패함에 따라 중국의 지식인 사이에서 중국의 전통인 유고에 대한 새로운 관점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19세기 말 20세기 초, 『익교총편(翼敎叢編)』, 변법파(變法波), 『신청년』이 바라본 중국의 유교적 전통에 관한 관점을 살펴볼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유교적 전통은 비교분석의 효율성을 제고하기 위해 유교적 전통에 대한 유교적 행위규범인 예교(禮敎)와 유교의 근본정신인 유학(儒學)으로 구분하여 당시를 대표하는 『익교총편(翼敎叢編)』, 변법파, 『신청년』의 관점에서 각각 예교와 유학을 어떻게 인식하였는지를 살펴보고 그 특징과 의의에 관해 살펴볼것이다.[1]또한 이전에 이미 행해진 많은 유교적 전통에 대한 시각을 다룬 연구들의 한계점을 극복하고자 노력하였다. [2]
『익교총편』의 관점: 유학과 예교의 일치
『익교총편』은 예더후이, 수위, 주이신, 장즈둥 등의 글을 모아서 1898년 출판된 책이다. [3] 『익교총편』은 유교적 행위규범인 예교를 신분 혹은 지위에 따라 당연히 부여되는 변화불변의 차등원리로서 인정하고 있다. 또한 예교와 유학의 유지는 하늘의 뜻을 따르는 순리로써 존속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익교총편』은 구체적으로 다음같이 예교를 옹호 했다. 장즈둥은 자신이 쓴 글을 통해 삼강(三綱)의 중요성을 주장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삼강은 군위신강(君爲臣綱), 부위자강(父爲子綱), 부위부강(夫爲婦綱)을 말하며 이 개념은 하늘에 근원을 둔 불변의 원리라고 주장한다. 여기서 장즈둥은 삼강을 통해 임금과 신하, 아버지와 아들, 남편과 부인의 관계 속에서 각각 임금, 아버지, 남편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차별의 질서를 인정하고 있다. 또한 이것은 중국의 근대화를 이끌어가는 지식인은 결코 황제의 신분을 넘어 설 수 없음을 강조하는 것이다. 장즈둥의 이러한 논조의 글은 『익교총편』의 전체적인 흐름과 일맥상통하며 수위 역시 자신의 다음과 같은 글을 통해 신분질서를 위협하는 변법파를 비판한다.
제도 개혁을 밀어붙이면서 기존의 근본 질서를 어지럽히고, 평등을 부르짖으면서 강상(綱常)을 무너뜨리고 있다.[4]
여기서 말하는 강상은 앞서 언급한 삼강과 오상(五常,仁,義,禮,智,信) [5] 을 말한다. 삼강과 마찬가지로 오상 역시 유교의 가치이며 동시에 인간이 사회를 살아가는 규범으로서 삼강에서 강조하고 있는 신분의 상위자를 향한 억압의 제도이다. 그러나 『익교총편』은 차등을 본질로 하는 예교를 하늘의 뜻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다음은 『익교총편』의 시각에서 바라본 유교의 근본정신, 유학에 대한 관점이다. 이들은 예교를 유학과 완전히 일치하다고 주장하며 그 근거로써 주돈이의 『태극도설(太極圖說』과 주자학을 내세운다. 이들의 따르면 우주의 존재는 이(理 )와 기(氣)로 이우러져 있으면 이가 기보다 우선된다. 또한 인간은 주자학의 기질지성(氣質之性)의 논리를 기준으로 ‘타고난 차등‘이 존재하며 예교를 통해 유교의 근본정신인 유학에 충실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처럼 『익교총편』은 차등의 본질인 예교를 유교의 근본정신인 유학과 불가분의 관계임을 주장한다. 또한 당시 중국에서 크게 유행하던 타도의 대상으로서 중국 전통, 즉 예교와 유학은 근대화를 위한 타도의 대상이 아니라 근대화의 길을 걷게 해주는 중국의 뿌리임을 주장한다.
변법파의 관점: 유학과 예교의 분리
변법파란 1898년 변법자강운동을 이끈 강유위, 양계쵸, 담사동 등의 전통적 유교를 비판하고 새로운 유교를 세우려고 한 세력을 말한다. 이들은 새로운 유교를 세우려고 한 목적의식 만큼 『익교총편』과는 유교를 바라보는 시각이 달랐다. 이와 같은 변법파의 전통 유교에 대한 관점은 중국이 유교 전통에서 거리두기를 시작하는 첫 단계라고 할 수 있다. [6]
변법파가 예교를 바라보는 시각은 『익교총편』과 달리 예교를 정당하지 않은 차별 제도라는 점이다. 이에 대하여 담사동은 다음과 같이 자신의 글을 통해 예교를 비판하였다.
수천 년 동안 삼강과 오륜의 참회와 재앙이 이로 인해 가혹했던 것이다. 임금은 名을 가지고 신하에게 족쇄를 채웠으며, 관리는 名을 가지고 백성에게 멍에를 씌웠고, 아버지는 名을 가지고 자식을 억압했으며, 남편은 名을 가지고 부인을 괴롭혔고, 친구나 형제 사이에 각자가 협소한 하나의 名을 가지고 서로 다투었으니, 仁이 조금이라도 남아있을 수 있었겠는가? [7]
이처럼 변법파에게 예교는 정당하지 않은 신분차별을 옹호하는 그릇된 것이며 상호의 예를 중요하는 것이 아니라 예교에서 언급한 상위 신분자가 하위 신분자를 억합하는 폭력성이 있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변법파에게 예교는 존속되어야 하는 대상이 아니라 중국의 근대화를 위해 마땅히 변해야 하는 대상이 되었다. 따라서 변버바는 기존의 예교를 기준으로 만들어진 제도를 고쳐야 한다는 변법자강운동을 펼치게 된 것이다.
다음은 변법파가 바라본 유교의 근본정신인 유학에 관한 것이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익교총편』은 예교가 유교경전에 입각해 만들어진 것이므로 유학과 일맥상통하며 불변의 원리임을 주장했다. 그러나 변법파의 강유위는 유교의 근본정신을 주자학이 아닌 공자에게서 찾음으로써 다음과 같은 글을 통해 『익교총편』의 논리를 비판한다.
거짓 경전(僞經)을 지어서 聖人이 만든 제도를 어지럽게 만든 것은 劉歆으로부터 시작되었으며, 거짓 경전을 퍼뜨려서 孔子의 정통성을 찬탈한 일은 鄭玄에 의해 이뤄졌다. 지난 이천년 동안 이어온 세월과 시간을 돌아봐도, 수없이 많은(百千萬億) 학자들의 학문을 모아 봐도, 이십 왕조의 예약제도의 崇嚴을 총괄해 봐도 거짓 경전을 聖人 의 法이라고 섬겼던 것이다.[8]
이처럼 강유위는 『익교총편』의 주장은 잘 못되어 유학(위경)과 예교는 관련이 없고 진정한 유교의 근본정신인 공자의 가르침을 배우고 공자를 교주로 인정해야 함을 역설했다. 또한 담사동 역시 공자의 가르침을 유교의 근본정신이라고 주장하며 인(仁)을 강조하며 차별이 아닌 평등을 주장했다. 따라서 변법파는 기존의 예교와 유학을 고쳐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변법파가 공자로부터 새로운 의미의 유교를 찾은 것은 『익교총편』의 잘못된 논리를 비판할 기준 역할이 필요했음을 의미한다. 하지만 이러한 변법파의 논리는 훗날 강유위가 공교(孔敎)의 국교화를 주장하며 원세개의 제제운동(帝制運動)을 돕는 한계를 지닌다.
『신청년』의 관점: 유학과 예교의 재일치
『신청년』은 1915년에서 1925년까지 발행되었으며, 중국의 근대화에 앞장선 잡지로 평가 받는다. 『신청년』의 중심 인물은 진독수, 오우, 이대소 등이 있으며 반전통주의 자로 유명하다.
진독수가 바라본 예교에 대한 관점은 다음과 같다. 진독수는 기존의 예교가 신해혁명 이후 원세개의 황제 부활 기도와 공교의 국교화 운동을 보좌한다고 다음과 같은 글을 통해 비판한다.
尊卑를 구별하고, 계급을 중시하며, 인치를 주장하고, 민권사상에 반대하는 사상과 학설 등이 전제황제를 만든 근본적 악의 원인(惡因)이었다. 우리나라 사상계가 이러한 근본적인 원인을 완전히 씻어내지 못하면, 공화제를 폐지시키고 황제제도를 부활시켜러는 원세개가 필연적으로 계속해서 나타나게 더라도 이상할 것이 없다. [9]
진독수는 이와 같이 예교가 원인이 되어 오늘날 중국이 문제를 맞이했음을 주장한다. 여기서 주의해야 하는 것은 진독수와 변법파 모두 예교를 비판했지만 그 내용이 다르다는 점이다. 진독수는 『익교총편』의 예교뿐만아니라 변법파의 공교를 언급하며 공교의 핵심은 예교와 다를 바 없으며 중국 근대화의 걸림돌인 삼강을 중요시 한다는 점이다.
다음은 『신청년』 참여자들이 바라본 유교의 근본정신인 유학에 관한 관점이다. 『신청년』의 참여자인 오우와 이대소는 예교를 뒷받침 해주는 유학의 정신이 공자에게서 연원한다고 주장했다. 특히 이대소는 군주독재는 기본적으로 가부장제도에서 나왔고, 군주독재를 정당화하는 충의 덕목은 가부장제도를 정당화한 효의 덕목에서 나왔으며, 가부장제도의 효 덕목은 개인의 주체성을 부정하고 복종을 강조하는 것이었지만 이것을 공자는 ‘수신(修身)’이라고 하면서 중시했다는 것이다. [10]
또한 이대소는 황제와 성인의 관계를 ‘큰 도둑(大盜)’과 그를 돕는 ‘사기꾼(響愿)’의 관계라고 주장하며 『익교총편』이 주장하는 황제와 변법자들이 주장하는 성인의 가치를 비판한다. 즉, 중국의 근대화를 위해서는 황제와 성인이 아닌 서구의 근대 사상을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정리하자면, 『익교총편』은 중국의 근대화를 위해서는 중국 기존의 전통인 예교(신분차별)와 유학(주자학)의 존속을 주장하였으며 변법파들은 기존의 예교와 유학은 모두 잘 못되었으며 각각 공교와 공자학으로 바꿔 중국의 근대화를 위해 나아가야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신청년은 이와 달리 중국의 근대화를 위한 개념과 유교는 공존할 수 없었기에 버려야 한다고 주장하였던 것이다.
- ↑ 이상화, 청말민국초 중국의 유교적 전통에 대한 세 가지 관점,인문학연구, 조선대학교 인문학연구소 254p
- ↑ 위와 같은 논문. 논문에 나온 내용으로 일본에서 유교적 전통에 대한 연구를 실시한 리쩌허우와 미조구찌 유우조를 대상으로 한 말이다. 논문에서는 두 학자가 모두 날카로운 시선으로 유교적 전통에 대한 분석을 통해 당시 중국의 예교 비판이 중국의 유교적 전통을 넘어서려는 시도였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지만 『익교총편』, 변법파, 『신청년』이 예교를 바라보는 시각과 비판의 기준에 차이가 있음을 설명하지 못했다고 말하고 있다.
- ↑ 위와 같은 논문, 257p
- ↑ 蘇輿, 『序』,『翼敎叢編』 1면.
- ↑ 오상은 五典, 五倫과 같은 의미이다.
- ↑ 이상화, 같은 논문, 264p
- ↑ 譚嗣同,『仁學』 上
- ↑ 康有爲,『新學僞經考』, 中華書局, 1988, 2면
- ↑ 陳獨秀,『袁世凱復活』, 『新靑年』 2-4, 4면
- ↑ 이상화, 같은 논문, 274p